위클리 히스토리 33

역사 연구를 위한 소스들

역사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자료가 많이 필요하다. 당연히 원사료와 같은 글감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진이나 지도 등 정말 많은 자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공신력과 자료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고, 더하여 저작권 이슈까지도 가급적 해결하고 넘어가야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은 이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를 공개하고자 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 국사편찬위원회한국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쓴다고 했을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가장 1순위가 되는 사이트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우리의 역사 원전 자료가 풍성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정사조선전(소위 25사), 일본육국사, 입당구법순례행기, 선화봉사고려도경, 원고려기사 등 각종 외국 자료도..

마한(馬韓), 고조선과 한반도를 잇다

장면 #1. 2009년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바로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봉영기가 발굴된 것이다. 여러 놀라운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오랫동안 백제 무왕의 아내는 선화공주라고 믿어왔던 신화가 깨진 것이다. 그곳에는 무왕의 왕후가 좌평(1품)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이라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신화 속 선화공주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장면 #2. 무왕(武王) 조에는 서동(薯童)의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연(一然)이 여기에 주석을 달아놓은 것이 전해진다. 옛 판본에는 무왕이 아니라 무강(武康)왕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마디로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고 정확히 지적하였다..

부여의 후예, 두막루

723년, 두 사신단이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한쪽은 몽골의 선조로 추정되는 실위 계통의 달구(達姤)였고, 또 하나는 달말루(達末婁)라는 생소한 이름의 국가였다. 흥미로운 점은 특히 후자가 스스로를 “북부여의 후예”라고 소개했다는 것이었다. 옛날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유민들은 나하(那河, 타루하(他漏河))를 건너 그 북부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달구는 나하의 남쪽에 있어서 동북쪽에 위치한 달말루와 가깝게 지냈기에 이번에 함께 오게 된 것이었던 모양이다. 북부여의 공식적인 멸망 시점은 346년으로, 연나라(전연)를 세운 모용선비 세력에 의해 그 국왕과 5만 명이나 되는 국민이 끌려가는 것으로 부여의 역사는 곧 종결되었다. 부여의 수많은 후예들, 이를테면 북부여 외에도 가섭원..

북국 부여, 그 길고도 짧은 역사

부여라는 나라를 알고 있는가? 들어는 보았겠지만 실제로 잘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와 달리 부여의 역사는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에도 부여는 등장하긴 하지만 그저 고구려의 조연 정도 역할에 그친다. 한 마디로 무플에 가까운 존재감이다. 그럼 부여의 시작은 언제일까? 에 인용된 에는 그것을 기원전 59년 4월 8일로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년 4월 8일, 천제(天帝)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부여는 기원전 사람인 ..

고조선과 부여, 같거나 다르거나

우리는 종종 배운 대로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그 배운 내용도 실은 누군가가 언젠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에 불과할 때도 있는데 말이다. 예컨대 4대 문명이란 개념이 원래 존재하지 않는데도 언젠가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또 혀의 미각은 사실은 우리가 배운 것처럼 맛별로 특정 영역에만 몰려 있지도 않다. 뿐인가, 한국어를 우랄알타이어로 많이들 들었겠지만 그것은 이미 폐기된 낡은 개념일 뿐인데도 여전히 그렇게 알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다. 마치 지구는 평평하다고 배운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역사에도 그러한 일들은 태반이다. 특히 상고사, 고대사에서는 그런 수많은 논쟁적인 아이템들이 있다. 오늘은 그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 한 가지를 해보고자 한다. 바로 고조선과 부여의 이..

나당 7년전쟁(670~676), 신라와 당의 치열했던 한반도 패권 다툼

660년 백제 멸망, 663년 백제 부흥운동 실패, 668년 고구려 멸망. 7세기의 한반도는 신라가 초강대국 당나라를 끌어들여 초래한 연쇄적인 국제전으로 인해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되었다. 신라가 생존을 위해 벌인 일생일대의 도박은 그 여파가 너무도 컸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고구려까지 포함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하겠다는 그런 의지 따위는 신라에 없었다. 이웃한 두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당나라의 지원군은 결코 순수한 의도로 한반도의 약소국 신라를 돕기 위해 굳이 외국 영토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그 동안 골머리를 썩어온 강대국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서 그들 배후의 지원 세력이 필요했을 뿐이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

김동인의 역사 장편소설 3부작 - 견훤, 서라벌, 을지문덕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은 20세기 조선의 몰락 후 일제강점기 때 사실주의 단편소설을 쓴 엘리트 출신의 천재 소설가입니다.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등으로 워낙에 유명하지만, 일제의 폭정이라는 야만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일종의 탈출구로서 민족주의적 감수성이 담긴 중단편 역사소설도 여럿 남겼습니다. 특히나 견훤(진헌), 을지문덕, 주몽 등을 다룬 장편소설 3부작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희소성이 높고 그만의 독창적인 시대관이 담겨 있는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들입니다. 그는 가난과 병마와 싸우던 중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서울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만의 역사관을 한번 느껴보고 싶은 분들께 그의 장편소설 3부작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도서 구경하기: https://bookk.co.kr/searc..

탐라국, 초기 교류의 역사

역사는 언제나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특히나 기록이 풍부하지 못한 초기의 상황은 흐릿한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나가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오늘날 제주라고 불리는 탐라국의 초기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3세기 중반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담고 있는 진수의 에서는 “주호(州胡)가 마한(馬韓)의 서해(西海) 가운데(中)의 큰 섬(大島)에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서해라는 표현 하나 때문에 주호가 과연 지금의 제주를 가리키는 것이 맞는지 여전히 의문을 사고 있다. 그 다음으로 탐라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의 백제와 관련된 기록에서이다. (476년 4월) 탐라국(耽羅國)에서 토산물을 바치니 백제 문주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恩率, 3등급)로 삼았다.(498년 8월) 백제 동성왕이 탐라(耽羅)가 공물과 부세..

신라와 왜(倭), 먼나라 이웃나라

의 신라본기에는 시조 박혁거세 관련하여 신기한 기사가 나온다. 왜인(倭人)이 병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범하려 했는데, 시조(박혁거세)가 신령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 (B.C. 50년) 말도 안 되는 기사이긴 하지만 신라 초기부터 왜(倭) 즉 고대 일본과의 연관을 상징하는 내용이다.뿐만 아니다. 신라 초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아예 왜의 출신들도 은근히 있다. 석탈해(昔脫解)가 왕(尼師今)이 되었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천 리에 있다.호공(瓠公)은 그 족성(族姓)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에 호공이라고 칭하였다. 더욱이 왜병의 신라 침공은 역사 ..

발해와 요동반도

발해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들이 있다. 한번 그 근거가 되는 것들부터 살펴보고 넘어가보자. 가탐(賈耽)의 지리 기록가탐은 8세기 후반에 활동한 당나라의 관료였다. 고구려 유민인 왕사례(王思禮)와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것은 관료로서의 업적보다는 개인적으로 지리학을 무척 좋아해서 관련된 지리책과 지도까지 편찬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저작은 없지만 다행히 의 지리지에 그의 글이 다수 남아 있다. 그렇게 우연찮게 발해에 대한 지리 정보도 그의 글을 통해 일부가 전해진다. 등주(登州, 산동반도 동북쪽 끝)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勺口)에 도착하니 발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