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떤 이가 “명작”을 자신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라고 정의한다고 하였다. 나 역시 이에 깊이 공감하였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돌이켜봐도 내가 감탄하며 보았던 작품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일관된 흐름 속에서도 보는 이마다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감동과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한 편의 잘 만든 드라마는 우리를 감탄하게 하기도 하고, 울고 웃게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 대해 통찰하는 계기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다들 누구나 각자 인생의 드라마 한 편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2019년에 방영된 『60일, 지정생존자』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 웰메이드 드라마이다. 미국의 『Designated Survivor 』라는 원작드라마를 한국 버전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한국적 상황과 배경으로 새롭게 재탄생시켜서 당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이기도 하다.

지정생존자라 함은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우리로 치면 국무총리), 그 다음으로는 우선순위에 따라 각 장관이 국정을 담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소위 서열에 따른 권력의 승계 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드라마는 극단적으로 대통령부터 각 장관들까지,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급사한 상황에서의 긴박한 정치 상황을 여러 사건들과 병행시키면서 잘 조명한다. 그래서 웰메이드 드라마이다.
여기서는 굳이 드라마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고자 함은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면서 감탄하였던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멋들어진 주인공의 고뇌어린 대응도, 정의를 되찾고자 하는 이들의 각고의 노력도 아닌, 의외로 안타고니스트 중 하나로 등장하는 국방부장관 오영석(이준혁 역)의 다음의 발언이었다.
우리 국민들이 차별금지법을 지지할까요? … 인간은 항상 차별을 찬성해왔습니다. 그래야 이 전쟁 같은 세상에서 자기가 조금은 유리해지니까. 본능이죠, 사람이니까. 차별에 찬성한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겠죠. 그래서 동성애란 핑계로, 종교와 신념, 전통이란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한 채 반대하는 겁니다. 인간은 가면 속에서 차별에 찬성하고 평등에 반대하는 이기적인 족속이죠. 그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민낯이에요.

소름돋도록 정확한 지적이다. 인간의 이성 저 아래에 존재하는 실제 본성을 어쩌면 이토록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드라마에서는 이 ‘차별금지법’을 결국 처리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별 차이가 없다. 저 발언의 내용이 곧 현실이니까.
인류의 역사는 슬프게도 차별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종교를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마녀사냥이나 이단 종교재판 등 보통은 유일신 사상이 강할 때 그런 일이 주로 발생은 하였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평화의 종교인 ‘불교’가 도입될 때에도 이차돈의 순교가 수반되었다.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은 인간을 숙청했다. 피부색깔로 대변되는 인종 차별(미국의 흑인 차별만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외노자 차별은 다르겠는가)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지역에 따른 출신 차별(예전보단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성 차별(남자가 여자에게만이 아니라 동성간도 적지 않고 비중은 적지만 직업별로는 역전현상도 일어난다), 직업 차별(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등 어떻게든 집단을 구분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언제든 차별은 동반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또 다른 큰 문제는 그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여 없애는 것이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Pol Pot)가 일으킨 킬링 필드나 SF 삼체의 배경이 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어떤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땅에서도 특히 근현대 시기에 다른 ‘생각’만으로 사람이 죽어나간 일이 많았다. 여순 사건과 제주 4.3 등 수많은 민간 피해자들의 문제는 아직도 다 해결되지 않았다. 멀쩡이 총칼이 사진 찍혀도 사실을 부인하고 외면하는 것이 곧 인간의 눈 먼 본성이다. (어떤 학자가 역사상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크고작은 전쟁의 수를 세보니 2년에 한번꼴이었다고 한다. 전쟁은 곧 남에 대한 나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나와 다른 남을 상대로 하기에 그토록 잔인한 전쟁이 가능했던 것이다. 베트남전을 일으켰던 미국군 그리고 심지어 거기에 참전하였던 일부 한국군의 만행을 떠올려보라. 결코 ‘정의로운’ 전쟁이란 없다.)
재밌는 것은 언어에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영어와 지구상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언어를 접했을 때의 우리의 심리를 떠올려보라. 왜 여전히 왠만한 노래들에는 다 영어 가사가 들어갈까. 유럽 노래들도 모국어가 아닌데도 영어로 세계적 히트곡이 많이 나왔던 이유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나마 요새는 K팝의 영향으로 한국어 가사가 들어가는 역수출(?) 현상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처럼 어느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다.
불평등 혹은 공정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이 시민정신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외국인 난민도 제3세계 출신이면 거부감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고, 같은 노동자라고는 해도 비정규직이 노조를 조직해도 정규직 노조가 스스로 차등을 두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사실도 놀랍고, 남초 사회에서 여성 등 약자 포션은 지켜야 하는 가치가 되지만 반대로 여초 집단에서는 남성 할당제가 불가한 것이 또 현실이다. 내가 유리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발끈하고 들고일어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지정생존자』는 정치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현실을 냉정하게 꼬집는 철학적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영석의 저 대사는 우리의 폐부를 깊이 찌르고 들어온다.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순자(荀子)의 성악설이 더 우리의 본성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누군가 나보다 못난 이가 있어야 내가 상대적으로 안심하게 되는 사회적 계층성,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는 오랜 기간 노예제가 존속되어 왔다. 고려시대 최승로는 노비제를 이렇게 옹호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양천(良賤)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태조(왕건)가 나라를 창업하신 초기에 뭇 신하들 중에서 원래 노비를 소유하던 자를 제외하고 그 외에 원래 없던 자는 혹은 종군하면서 포로로 얻었거나 혹은 재물로 사서 이를 노비로 삼았습니다. (중략) 광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노비를 안험(按驗)하여 그 옳고그름을 판별하도록 명령하셨으니, 이에 공신들은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이에 대해 간하는 자도 없었으며 (중략) 천한 것들이 힘을 얻어 존귀한 이들을 능멸하고 깔아뭉개고 다투어 허위사실을 끌어다가 본래의 주인을 모함한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광종께서는 스스로 화근을 만들어놓고 능히 끊고 막지 못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서는 잘못 죽인 것이 매우 많아서 덕망을 잃은 것이 컸습니다.
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오히려 최승로의 이 주장을 읽으면서 광종은 노비 해방을 주도한 것만으로도 성군으로 칭송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솔직히 순진한 발상이 맞다. 누군가 어두운 역할을 맡아줘야 다수는 밝은 빛에서 생활할 수가 있을 테니 말이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자원을 가진 한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영화 “설국열차”를 참고해보라.)
형태만 달리하고 있을 뿐 온갖 현대판 ‘노예’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주로 돈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모 정치인이 너무 두터운(?) 사회안전망을 반대하면서 주장했던, 사회에서 허드렛일을 해줄 사람은 어쨌든 필요하다고 한 것은 우리네 깊은 어두운 본성을 끄집어 내어 입으로 내뱉은 것에 불과하다. 타인의 못남이 있어야 우리의 잘남이 인정받게 되고, 남의 가난함이 있어야 나의 부유함이 완성되는 것이다. 다수의 인간은 자신의 행복감은 남의 불행과 비추어서 판단한다. 슬프지만 그렇다. 내가 10억이 있어도 남이 20억이 있으면 불행해지고, 내가 1천 만원만 있어도 남이 그조차 없으면 행복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저 인간의 냉혹한 본성을 어떻게 부작용은 최소화하면서 조화롭게 다룰 것이냐로 귀결한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앞으로도 결코 성공할 리 없는 그런 해결책을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모색해봐야 한다. 정답은 없다. 우리네 부족한 각자의 의견과 행동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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