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부여 사비성(泗沘城), 동방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위클리 히스토리 2026. 6. 9. 15:33

수도의 함락으로 한 국가가 멸망한 경우는 그 과정 자체가 다이내믹하면서도 극적이기에 역사가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정보가 부족하기로 악명 높은 발해조차도 수도 상경성의 함락 과정은 일자별로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에 비견되는 것이 고구려의 평양성 함락, 그리고 백제의 사비성 함락이다. 어느 것 하나 감히 제외할 수 없을 만큼 극적이지 않은 경우가 없다. 그 중에서도 오늘은 백제의 최후를 한번 살펴보자.

 

백제는 크게 보면 두 번의 천도를 거쳤다. 초기에 한성의 위례성 자체도 옮긴 기록이 있지만 지근거리의 이동은 거국적인 천도는 아니니 제외하자면, 한번은 웅진(공주), 또 한번은 사비(부여)가 그곳이다. 우선 475년 9월에 고구려 장수왕이 3만의 대군을 동원해 백제의 왕도 한성(漢城)을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함락시키고 개로왕(蓋鹵王)은 살해당했다. 앞서 신라로 구원병을 요청하러 가 있던 동생 문주(文周)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성이 파괴된 이후여서 부득이 그는 다음달인 10월에 곧바로 웅진(熊津)으로 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리잡은 곳이 지금의 공산성(公山城)이 있는 충남 공주이다. 당시에는 고마(固麻, Gùmá)나 구마나리(久麻那利, くまなり)라고 불렸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곰(熊)나루가 원래의 의미였던 듯하다. 어쨌든 당장 급하게 천도할 수 있던 곳을 찾으면서 크게 두 가지를 고려하였을 것이다. 첫째는 시간이 부족했으니 기왕이면 이미 있는 시설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을 테고, 둘째는 갓 수도가 함락되었다보니 방어력이 우수한 곳이어야 한다는 게 제일 중요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오늘날 공산성을 가보면 공간은 아주 넓지 않지만 산세를 활용한 성의 배치도 매우 뛰어나다는 점과 함께, 바로 앞에 금강(錦江), 당시 이름으로 웅천(熊川)이 있어 위급상황에서는 탈출하기에도 좋다는 이점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웅진은 임시 수도에 가까웠다. 문주왕 이후 동성왕(東城王) 대에 이르러 사비(泗沘) 지역으로 여러 차례 사냥을 다녀온 것은 물론, 486년 7월에는 우두성(牛頭城)을 쌓고 또 501년 8월에는 사비 남단에 가림성(加林城, 충남 부여 성흥산성)을 쌓았다. 여기서 우두성은 한자 그대로 ‘소머리’라는 뜻인데 사비를 당시 백제어로 ‘소부리(所夫里)’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을 보면 같은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가림성과 우두성이 접해 있던 강을 백강(白江)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충남 부여 앞을 흐르는 백마강(白馬江)을 말하는 것이어서 우두성이 곧 이후 사비성이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부터 사비는 백제의 차기 수도로서 적극 검토되었던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여하튼 동성왕이 살해당하고 무령왕릉으로 유명한 무령왕(武寧王)의 치세를 지나 그의 아들 성왕(聖王)이 재위하였을 당시 드디어 538년 봄에 사비로 천도하고 국명 또한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였다. 이렇게 임시수도 웅진(공주)의 시대는 63년 만에 막을 내리고, 새롭게 新행정수도 사비(부여)의 시대가 열렸다.

 

하나의 강으로 연결돼 있는 공주(동북쪽)와 부여(서남쪽)

 

사비는 땅의 생김새도 웅진을 많이 닮아 있었다. 웅진이 북쪽으로 금강을 두르고 있다면 사비는 서쪽으로 백마강이 흐르는 차이 정도인데, 그조차도 웅진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90도 돌리면 거의 사비와 비슷한 형태가 된다. 반달 모양의 땅 한쪽 끝에 각각 공산성과 부소산성(扶蘇山城)이 존재한다는 점 또한 거의 빼다 박은 수준이다. 다만 외형적 측면에서 결정적 차이는 나성(羅城)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공주는 아무래도 언젠가 옮길 곳이라고 여겨서 그런지 몰라도 웅진성을 수리한 기록은 있지만 도시의 외곽을 방비하는 나성을 축조한 기록은 없다. 부여는 이 점에서 차별점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사비성 지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반월성(半月城) : 돌로 쌓았다. 주위가 13,006척이니 이것이 곧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쌓아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부여 나성의 유적을 보면, 부소산성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청산성을 찍고 남쪽으로 쭉 뻗어서 능산리 고분군을 지나 백마강 반대편까지 닿는다. 이것을 당시 기록에서는 성곽이라는 뜻의 곽(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연상되는 곳이 하나 있다. 극동의 백제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던 동로마 비잔티움(Byzantium) 제국의 수도가 바로 그곳이다. 오늘날에는 튀르키예의 영토로 이스탄불(Istanbul)이라고 불리는 지역인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비잔티온(Byzantion)이라고 불렀고, 당시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영어식으로 축약하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 되는 곳이다. 오랜 유럽의 우세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역전당한 역사적인 해인 1453년에 이곳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메트(Mehmet) 2세의 손아귀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비잔티움 제국은 330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의 천도 이후로 따지면 천년왕국 신라보다도 더 긴 1,123년 만에 멸망하게 되는데, 그 과정 자체도 워낙에 드라마틱하다보니 서양사에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관심을 받는 주제이기도 하다.

 

1천 년이 넘도록 제국의 수도로서 공고히 자리매김했던 콘스탄티노플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유명한데, 도서 서쪽 내륙지대를 수직으로 둘러싼 성벽이 보호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내 총면적이 약 14㎢이고, 성벽의 길이는 5.7㎞인데, 우연찮게도 부소산성을 포함한 사비성 전체의 면적도 거의 그 정도에 동쪽 나성의 길이 역시 그만큼 된다. 마치 역사의 평행이론처럼 말이다. 땅의 모양도 콘스탄티노플은 동쪽의 바다를 바라보는 형태라면, 사비는 서쪽으로 강을 마주하는 형세이다. 언뜻 보아서는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과 부여(사비성) - Google Earth

 

다만 그럼에도 결정적 차이는 방어력에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최대 높이 12m, 넓이 5m의 외성벽과 안쪽의 내성벽, 그리고 바깥에 해자가 둘러싼 삼중방어의 구조였다. 그것이 곧 비잔티움 제국이 수많은 외침을 겪었음에도 단 한 차례도 육상으로의 침공이 뚫린 적이 없었던 가장 큰 성공 요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백제의 사비성곽, 즉 지금의 동(東)나성은 최대 높이 7m에 최대한 지형을 활용하여 산의 고지까지 활용한 형태이다. 축성 방식은 의견이 갈리긴 하지만 오늘날 봐서는 흙과 돌이 적절히 조합된 형태로 보인다. 해자도 부분적으로 있었던 흔적이 나타나는데, 전반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의 도시방어체계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미흡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은 15세기의 기술발전에 힘입어 성벽 자체를 무너뜨려버리는 막강한 화력의 거포가 도입된 이후에야 무너졌다면, 그에 반해 7세기의 사비성은 당-신라 연합군의 대규모 물량공세만으로도 뚫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성벽(Wikipedia)과 부여 나성(부여군청)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어쩌면 단순히 성벽의 방어력 차이는 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 차이는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는 비잔티움의 마지막 확제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기로 결심하고 전투 와중에 장렬히 전사하였다면, 660년의 사비성 전투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이 막판에 사비성을 탈출하여 웅진성까지 도망쳤다가 결국 꼬리를 내리고 항복하고 만다는 점이다. 어차피 그는 결국 바다 건너 당나라로 끌려가 얼마 안 있어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데, 그럴 거면 왜 그때 그 자리에서 굳이 도망을 쳤을까 참으로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리더인지 아닌지는 가장 위급할 때 어떻게 처신하느냐에서 갈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