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갖는 힘이 있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부모들도 그 이름 짓기에 나름의 공을 쏟는다. 이름 그대로 살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고려가 처음에 건국할 때 굳이 ‘고려(高麗)’라고 이름 지은 것은 그 나라가 ‘고구려’를 이어 북방 강국으로 발돋움하기를 희망해서였다. (물론 이름대로 다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 재밌는 것은 이름과 실체가 따로 놀 때이다. 이런 경우도 은근히 많다. 이를테면 고대 일본, 즉 왜국의 기록을 보다 보면 한자로는 ‘唐(당)’이라 쓰고 발음은 ‘가라(から)’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해외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 전달자인 가야(가라)를 그 당시의 선진국 당나라와 동일시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이름이 갖는 힘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백제가 무너지고 잠깐이지만 세워졌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바로 그것이다. 이름에 ‘웅진(熊津)’이 들어가 있다보니 다들 그 위치를 당연히(!) 그 당시 웅진, 곧 지금의 공주 자리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랬을까?
우선 백제가 멸망할 때의 수도는 사비(泗沘)였다. 지금의 충남 부여의 중심지를 말한다. 마지막 국왕인 의자왕은 막판에 잠시 달아났다가 웅진성, 즉 공주에서 붙잡히긴 했다. 하지만 다수의 백제인들을 붙잡아 본국인 당나라로 보냈던 장소는 사비성이었다. 그리고 당군이 돌아간 그곳 사비성에는 당군의 잔여병력이 주둔하였다. 무려 1만 명이나.
여기에 금석문도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해준다. 이를테면 660년 백제 멸망 후 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 새기게 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은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에 남아 있다. 공주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이들이 떠난 장소가 사비성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백제 멸망 후 3년이 지난 663년에도 당나라의 전공은 이곳 부여에 남겨진다. 1만 명의 당군을 지휘하면서 백제 부흥군과 맞서 싸웠던 유인원이 남긴 ‘기공비(紀功碑)’도 부여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공주가 아니다.

또한 ‘대당(大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는 부여에서만 발견되었다. 그것이 왜 중요하냐면, 단순히 일시적 점령이 아니라 장기적 지배를 염두에 두고 자신들의 건물을 만들어 오랫동안 관리하였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주에서는 치열했던 전투를 보여주듯 당군의 갑옷 등 무기류만 발굴되었다. 이는 명확히 공주는 전쟁터였고, 부여는 지배의 장소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불어 당시 당군의 행적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사들도 주목해볼 만하다.
- 660년 9월 23일 :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에 들어와서… (百濟餘賊 入泗沘)
- 660년 당시를 다룬 문무왕의 국서 : (소정방의 당군과 신라군이) 함께 웅진을 지켰다. (同鎭熊津) … 적신 (귀실)복신이 강 서쪽에서 일어나 잔당을 모아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격파하고… (賊臣福信起於江西, 取集餘燼, 圍逼府城, 先破外柵)
- 661년 봄 2월 :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해왔다. (百濟殘賊來攻泗沘城)
- 661년 3월 이전 : (귀실복신과 도침이) 병력을 이끌고 가서 도성에서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引兵圍仁願於都城)
- 663년의 과거 복기 기사 : (귀실복신과 도침이) 남아서 주둔 중이던 낭장 유인원을 웅진성에서 포위하였다. (圍留鎮郎将劉仁願扵熊津城) … 덕물도에 이르렀다가 웅진(도독)부성으로 나아갔다. (至德物㠀, 就熊津府城)
여기에 등장하는 장소는 모두 한 곳이다. 바로 백제의 도성 사비에 있던 사비성이자,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징(도독)부성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바로 그곳 말이다. 특히 웅진성이라고 지칭되는 곳은 공주의 동명인 그 웅진성이 아니라 정확히는 웅진(부)성을 지칭한다는 것도 같이 알 수 있다. 이처럼 당시의 기록부터 금석문까지 모든 자료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곧 당군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한 곳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당시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새롭게 자신들의 행정지역명으로 네이밍을 하면서 굳이 ‘사비’가 아니라 자신들이 보기에 더 편하다거나 적합하다고 여긴 ‘웅진’을 채택하였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참고로 泗沘라는 한자는 강이름의 뜻밖에 없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오늘날 평택에 있는 미군기지 이름이 ‘오산(Osan)’인 것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실제 행정구역보다는 미국인이 발음하기에 더 편한 가까운 지역명을 채택하였다는 설명을 참고해보자.
그럼 도대체 원래 웅진에 있던 웅진성은 이 당시 어떤 상태였던 것일까? 힌트는 <일본서기>에 있다.
(660년 9월 5일 기사) 달솔(2품) (부)여자진이 중부 구마노리성에 자리잡고… (達率 餘自進 據中部 久麻怒利城) - 일본서기
여기서의 구마노리는 '구마나리(久麻那利, くまなり)'를 지칭하는데, 바로 개로왕 사후 한성이 함락되자 문주왕이 급히 천도하였던 웅진(熊津), 즉 공주를 말한다. 이곳은 중국측 역사서에서는 ‘고마(固麻, Gùmá)성’이라고 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당시 백제어 발음으로 ‘구마’가 ‘곰(熊)’이었기에 곰나루, 즉 한자로 웅진이 되었던 곳이다. 보다시피 공주의 웅진성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아니라 백제 부흥군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여기서의 부여자진은 좌평(1품) 직급으로 부여자신(扶餘自信)이라고도 하는데, 백촌강 패전과 주류성 함락 직후인 663년 9월 25일에 7백 명의 백제 유민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왜국으로 망명을 떠나는 인물이다. 이를 보면 그가 오랫동안 백제 부흥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가 일본측 기록에서 항상 선두에 서는 것을 봐도 그렇고, 나중에 왜국에 정착하면서 가장 높은 관위를 받은 것을 봐도 그렇고, 그는 백제 유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즉 공주의 웅진성은 초기부터 얼마 동안 백제 부흥군이 계속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역시나 웅진(도독)부는 웅진성에 있을 수 없었음이 반증된다.
이처럼 이름이 갖는 힘은 좀처럼 사람의 고정관념을 깨기 힘들게 만든다. 하지만 조금만 그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굳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황을 바라볼 수 있어야지만 조금 더 객관적으로 그 상황이 눈에 들어올 수가 있다. 이는 꼭 역사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언제나 내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이 과연 맞는지 곱씹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쉽게 그 고정관념에 파묻혀버릴 수 있다. 항상 나의 뇌를 일깨울 준비를 하고 또 매번 관점을 달리하여 세상을 바라보도록 노력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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