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9월 5일에 백제 출신의 달솔(2품) 직급의 관리와 앳된 승려가 왜국을 찾아왔다. 이들은 바다 건너 도망쳐 와서는 고국의 사정을 왜국 정부에 다급히 알렸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금년 7월에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왕과 신하는 모두 포로가 되었으며, 사람들도 붙잡혀 가거나 다들 흩어져버렸습니다. 이에 서부의 은솔 귀실복신은 분개하여 임사기산(任射岐山)을 차지하였고, 또 달솔 (부)여자진은 중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 자리잡고는 흩어진 병력을 불러 모았습니다. (중략) 그래서 나랏사람들이 그들을 높여 ‘좌평(1품) 복신, 좌평 자진’이라고 불렀습니다. 오직 복신만이 신기에 가까운 무력으로 망국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귀실복신(鬼室福信)은 바로 직전 국왕이었던 무왕(武王)의 조카뻘이었다. 이로부터 무려 33년 전인 627년에는 백제의 사신으로 발탁되어 당나라를 다녀온 적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 당시엔 최소 5~60대는 되었을 것이다. 그를 싫어한 당나라 장수는 그의 직급을 한솔(5품)이라고 하였지만, 아마도 외교 경력까지 감안해보면 은솔(3품)이 맞을 듯하다. 그는 서부(西部) 출신이었고, 그가 속한 귀실 가문은 또 다른 흑치(黑齒)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왕족인 부여(扶餘) 성씨에서 분가한 집단일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의 정보는 없지만 그와 가까운 일가가 나중에 여럿 왜국으로 망명하여 관료로서 자리잡게 되는 것을 보면 이 당시 그의 영향력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서로 근거지는 달랐지만 동시에 거병하였던 부여자진(扶餘自進)의 경우 부여자신(自信)이라고도 하는데, 고위직인 달솔(2품) 직급에 중부(中部) 출신임이 확인된다. 그의 성씨만 보아도 최소한 왕가에 속하는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그 역시 나중에 왜국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고위직으로 정착하게 된다. 재밌는 것은 그가 차지하고 있던 곳인데, 구마노리성은 1백여 년 전까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충남 공주의 공산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의자왕이 이곳까지 왔다가 웅진방령(熊津方領)에게 이끌려 당군에 항복한 이후 그가 돌아와서 이곳 웅진성을 차지하고 들어선 것이었다.
백제 부흥 운동 초기의 기록은 참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데, 예를 들어 이 당시 귀실복신의 근거지라는 임사기산이 임존성(任存城)인지 주류성(周留城)인지부터가 불분명하다. 발음상으로는 임존성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반복해서 주류성이라고 나온다. 당시 북쪽에 또 임서리산(任敍利山)이라는 곳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서는 북쪽의 임존성과 그보다 남쪽의 주류성 그렇게 두 곳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한자만 놓고 봐도 임존(任存)이나 주류(周留)나 비슷한 뜻이 된다. 맞아들여 있었다거나(存) 두루두루 머물렀거나(留) 하는 거라서 어느 쪽이든 존류(存留), 즉 남아서 머문 곳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북쪽의 임존성은 당시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가 점거하고 있었기에, 상식적으로는 그보다 남쪽의 주류성이 귀실복신의 본진 역할을 하였을 게 거의 확실하다.

당시 백제의 각 지역에서는 이름 모를 의병들을 비롯하여 외세에 저항하는 백제인들의 봉기가 잇따르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돋보인 이가 바로 귀실복신이었다. 부여자진이야 원래도 왕족이었고 좌평이라는 고위직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지만, 귀실복신은 귀족 가문이긴 했어도 나이도 많았고 최고위직은 아닌 은솔까지였던 것을 보면 그가 어떻게 그렇게 단기간에 당시 유민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올라서게 된 것인지 솔직히 놀랍긴 하다.
그가 만인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한 것은 당시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가장 파격적인 시도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당나라 웅진도독부의 본거지가 된 사비성에 대한 직접 타격이었다. 당시 사비성에는 당나라의 낭장(정5품) 유인원(劉仁願)이 이끄는 1만 병력의 당군이 주둔 중이었다.
이에 앞서 당-신라 연합군이 8월 26일 흑치상지의 임존산을 공격하였다가 별다른 성과도 없이 결국 그대로 퇴각한 것은 물론, 9월 3일에는 당나라의 대군이 1만2천 명이 넘는 백제인 포로들을 이끌고 본국으로의 귀환길에 나선 상태였다. 제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귀실복신은 9월 23일에 드디어 방어력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적의 중심지, 곧 백제의 왕성이었던 그곳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백제 부흥군 측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당군을 지원하는 신라 왕자 김인태(金仁泰)의 7천 신라군이 함께 남아 있었다. 연합군의 한 축인 신라가 둔 신의 한 수였다. 아무리 귀실복신이어도 아직은 날카로운 기세가 남아 있던 연합군을 수적으로 압도할 수는 없었기에, 사비성 남쪽의 산고개와 강 어귀에까지 여러 군데에 목책을 세우고 진영을 설치하고는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들은 백제측의 20여 개 성이 그에게 합세해왔다.
당시 당나라는 중랑장(정4품)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임명하여 한반도로 파견하였었는데, 그가 9월 28일에 삼년산성(三年山城, 충북 보은)에서 신라의 태종 무열왕, 즉 김춘추(603~661)와 대면하던 도중 급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마도 심장마비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어쨌거나 당나라에서는 급히 그를 대신해 한반도 사정에 밝은 유인궤(劉仁軌, 602~685)를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 정4품)로 임명하여 왕문도의 군사들까지 맡기고는 사비성에 갇혀 있던 유인원의 당군 구원에 투입하였다.
또한 김춘추도 태자 김법민(金法敏)까지 대동하여 신라군을 이끌고 출진하였다. 이들은 10월 9일에 백제 부흥군의 이례성(尒禮城)까지 전진하여 9일 만인 18일에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 부흥군으로 넘어갔던 20여 개의 성이 신라군 앞에 성문을 열고 투항하고 말았다. 그렇게 행군을 거듭한 끝에 10월 30일에는 사비성 남쪽에 주둔 중이던 귀실복신의 진영에 당도하여 드디어 유인궤의 당군과 함께 목책을 뚫었고, 이로 인해 백제 부흥군 중 1천5백 명이 익사하거나 전사하였다.
하지만 신라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5일 만인 11월 5일에는 사비성에서 강 건너 바로 서쪽의 왕흥사(王興寺)가 있는 잠성(岑城) 공략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이틀 만인 7일에 7백 명을 전사시킨 다음 마침내 신라 수도로 회군하였다. 그 사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귀실복신의 잔여 세력은 남쪽의 임존성, 즉 주류성으로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해를 넘겨 661년 봄 2월에 백제 부흥군은 사비성을 재차 공격해왔다. 김춘추는 또 다시 대대적인 구원군을 마련하여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방면의 부대 중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임명된 이찬(2등급) 김품일(金品日)이 부대를 나누어 백제 부흥군의 두량윤성(豆良尹城)으로 먼저 보냈는데, 3월 5일에 이들은 성 남쪽에 진영을 만들려 하던 찰나에 백제 부흥군이 급습해오자 당황하여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전초전부터 신라군은 작전이 어긋나버린 셈이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나머지 신라의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에 도착하여 두량윤성 공략을 준비하였는데, 무려 1개월 6일 간이나 두량윤성이 치열하게 버텨냄으로써 결국 함락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사이 원거리에서 온 공격군은 군량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여름 4월 19일, 드디어 신라군은 퇴각을 결정하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대별로 순차적으로 퇴각을 하였는데, 후발대가 된 하주장군(下州將軍) 아찬(6등급) 의복(義服)이 빈골양(賓骨壤)에서 백제 추격군과 맞서 싸웠지만 역시나 패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부분적으로 승전도 하였고 또 가까스로 수도로 무사히 복귀도 하였지만 최종적으로 얻은 성과는 없는 셈과 마찬가지였다.
그 얘기인 즉슨 귀실복신의 백제 부흥군은 당군을 사비성 안에 가둬둔 채 여전히 공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유인궤는 어차피 휘하 군사가 적었기에 유인원에게 합류하여 모든 병력을 합친 상태였지만, 신라의 지원군이 오지 못한 상태에서는 공격 중인 백제 부흥군측과 병력의 우열이 역전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군이 물러난 다음에도 당군은 계속해서 신라측에 병력 지원을 요청해왔다. 김춘추는 다시 한번 김유신의 동생인 이찬 김흠순(金欽純) 등을 파병하였는데, 귀실복신이 직접 고사비성에서 요격하여 물리쳐버렸다. 결국 김흠순은 갈령도(葛嶺道) 방면으로 도망쳐 신라로 돌아갔고, 다시는 감히 출동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결국 당군은 백제 부흥군의 가열찬 공격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당군의 비참한 상황을 지휘관인 유인원은 자신의 기공비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벌떼처럼 진을 치고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나 산을 메우고 골짜기를 채웠다. 다들 장군을 자칭하면서 성을 함락시키고 마을을 격파하였다. 점차 중심부로 들어와서 우물을 막아버리고 나무를 베어냈으며 집을 무너뜨리고 농막을 불사지르니, 지나는 곳마다 몰살당하여 남는 이가 거의 없었다. 흉악한 위세가 너무도 강렬하여 사람들이 모두 위협에 굴복하였다. 목책을 세우고 진영을 벌리니 공격과 포위가 연달아 이어졌다. 운제(雲梯)에서 내려다 보고 땅굴이 널리 통해 있으며, 돌로 때리고 화살을 쏘는 것이 마치 별이 떨어지고 비가 쏟아지는 듯했다. 밤낮으로 전투가 지속되었고 아침저녁으로 공격을 감행해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한 것을 부활시키고 끊어진 것을 계승한다고 하였다. (후략)
또한 이 당시의 상황을 신라의 문무왕도 나중에 당나라의 행군총관(行軍總管)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유인원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하였는데 늘 신라의 구원을 받았소. 1만 명의 중국 군사는 4년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 이하의 군사는 뼈와 가죽은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겠소.
660년부터 663년까지 4년 간 줄곧 백제 부흥군의 공격이 사비성의 당군에게 집중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귀실복신은 탁월한 전략과 뛰어난 개인기로 백제 부흥군을 다방면에서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바로 백제 왕국(王國)에 정작 국왕(國王)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근대 이후의 사회였다면 자신이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이때의 사회는 아직 고대문화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를 비롯해 당시 백제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당연히 국왕의 신민으로 인식하는 고대인들이었다. 즉 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백제의 왕가 혈통의 국왕이 필요불가결했던 것이다. 즉 반드시 부여씨 왕족이 필요했다. 하지만 사비성과 웅진성이 동시에 넘어가면서 의자왕을 비롯해 태자 및 수많은 직계 혈통들이 다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한 마디로 남아 있는 왕족이 없었던 셈이다. 다만 한 군데를 빼고는 말이다.
그것은 왜국이었다. 백제와 왜국의 특수관계는 유명하다. 약간 아쉬운 부분이기도 한데, 주로 백제의 왕족들이 왜국으로 넘어가는 관계이긴 하지만, 어쨌든 왜국에는 백제의 왕가 혈통이 아직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전왕 때인 631년에 넘어간 부여풍(扶余豊, 또는 부여풍장(豊璋))이었다.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왕자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그 시점이 부여의자가 아직 태자도 되기 전이다보니 무왕의 아들, 곧 의자왕과 형제지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부여풍을 수식할 때 언제나 옛(故) 왕자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최근 국왕의 자식이 아니라 예전에 왕자였던 인물로 묘사하는 점을 주목해봐야 할 듯하다. 즉 지금 국왕의 자식이라기보다는 누가 봐도 사실상 예전에 왕자였던, 그만큼 나이가 든 인물일 확률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 615~682)만 해도 631년이면 17세에 불과했다. 아들 서열상 바로 아래 둘째도 있었으니 부여풍이 의자왕의 자식이라면 어린이 때 일본으로 넘어간 셈이 되어버린다.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황상 부여풍은 무왕의 아들이자 의자왕과는 형제지간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의자왕의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자의 출생년도로 역산해보면 못해도 하한선이 590년대일 수밖에 없다. 즉 그렇다면 부여풍은 의자왕보다는 당연히 나중이었을 테니, 아마도 631년 당시에는 20대 내지 늦게 잡아도 서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다. 그럼 661년 당시엔 최소 50대는 되었을 것이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백제 부흥군의 실질적인 리더 귀실복신과 그다지 나이 차가 나지 않는 셈이다.
신라의 지원군을 몰아내고 유인원 등 당군을 사비성 안에 가둬두었던 바로 그 시점인 661년 여름 4월에 귀실복신은 왜국으로 사신을 파견해 두 가지를 요청하였다. 하나는 군대 지원, 또 하나는 왕자 규해(糺解), 곧 부여풍(장)을 보내줄 것을 정식 요청하였다. 왜 이름이 두 개인지는 알 숙 없지만 아마도 둘 중 하나는 어른이 되어 지은 자이거나 혹은 어렸을 때의 아명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일본서기>는 이 기사가 두 번 등장하는데 660년 겨울 10월에도 좌평 귀실복신이 부여풍장을 보내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내용이 동일하보니 둘 중 하나는 잘못 기재된 게 분명하다. 아마도 그때의 요청에서 “다시 한곳에 모여 나라를 이루었다(更鳩集以成邦)”고 한 내용을 참고해보면 초기가 아니라 제대로 세력을 규합한 이후로 여겨지기에 부흥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해도 무방한 시점인 661년 여름 4월이 좀 더 적합해 보인다.
어쨌든 왜국 정부도 이에 동의하였다. 정확히는 그들 역시 이웃나라에서 벌어진 당대의 초강대국 당나라의 전격전을 목격한 와중이었기에 전쟁의 여파로 일본 열도까지 불똥이 튀지 않도록 하려면 한반도 내에서 전쟁을 막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마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중원 침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명나라가 선의로 포장하여 조선에 원군을 파병해주었듯이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왜국은 당시 정력적으로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사이메이(斉明) 천황이 661년 7월에 갑자기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아들인 나카노오에(中大兄) 황자가 나서서 차기 천황으로의 즉위도 뒤로 미룬 채 8월에 곧바로 백제 구원군을 편성토록 지시하였으며, 또한 무기와 군량까지 준비시켰다. 그리고 9월에는 부여풍에게 쇼칸(織冠, 최고 관등)을 내려주고, 또 오오노 코모시키(多臣蔣敷)의 누이와 결혼시킴으로써 그를 계속해서 왜국의 영향권 하에 두도록 나름의 장치를 두었다. 나아가 그가 백제로 떠날 때에는 호위를 위해 군사를 5천 명이나 배정해두도록 하였다. 30년 간이나 왜국에서 생활하며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 문화권에서 살아온 이에게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대우였다.
그해 11월에 귀실복신은 부흥전쟁을 통해 포로로 획득한 당나라인 속수언(續守言) 등 106명을 왜국에 선물로 보내왔다. 나름의 자신감의 표현이자 동시에 군사적으로 자신을 믿어도 좋다는 증명 차원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통했는지 왜국은 662년 봄 1월 27일에 귀실복신 앞으로 화살 10만 개, 실 5백 근, 솜 1천 근, 베 1천 단, 가죽 1천 장, 볍씨 3천 곡 등 어마어마한 군수품을 보내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부여풍 한 명뿐이었다.
그는 662년 5월에 왜국 수군 170척의 지원을 받아 백제를 향해 출발하였는데, 총 5천 명이 탑승하였을 테니 한 척당 약 30명에 추가로 그만큼의 군수품이 포함된 규모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맘때 그의 도착을 진심으로 기다려온 귀실복신은 항구에 미리 나와서 새로운 국왕을 환영하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국정의 모든 권한을 헌납하였다. 이를 지켜본 모든 이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때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바로 백제의 부활에 대한 감격 말이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였다. 모두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그때 귀실복신은 백제 부흥운동의 동료였던 승려 도침을 갑자기 제거하였다. 사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의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는 두 가지 정보가 있다.
한 가지는 백제 부흥군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에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 귀실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자 그대로 보자면 군대를 이끈(領軍) 것은 도침이었고, 귀실복신은 추상적인 의미인 엄정하고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현장 지휘를 도침이 주로 하면서 점차 병권을 그가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니었나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는 도침이 유인궤의 사자를 접견하면서 하였다는 말이다.
“사자의 벼슬이 낮구나. 나는 한 나라의 대장이니 접견하기에는 수준이 맞지가 않다.”
그러면서 그냥 돌려보냈다는 것인데, 어찌 보면 자신감의 발로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문제는 이를 곁에서 들었을 귀실복신의 심리일 것이다. 도침이 대장이면 귀실복신은 무어란 말인가. 병권을 도침이 차지한 마당에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은 그저 꿰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느껴질 만도 한 멘트였다.
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지만, 이 직후에 귀실복신은 도침을 과감히 처단하였다. 그리고 다시 도침의 병권을 되찾아서는 모든 병력을 그의 휘하에 두는 것으로 일원화시켰다. 여기까지 보면 또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손 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당시 백제의 국왕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부여풍이었다. 그런데 그는 귀실복신이 국정의 모든 권한을 헌납하였음에도 여전히 실권을 오롯이 다 행사하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당연한 얘기지만 왜국에 가서 30년 동안 외국인으로서 궁정 정치만 보았을 따름인 그가 혈통 하나로 갑자기 하루 아침에 본국의 국왕 자리에 오른 것인데, 과연 얼마나 국왕으로서의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백제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깐의 환희는 금세 가신다. 환희가 떠나면 남는 것은 비루하고 고된 현실의 삶뿐이다. 귀실복신도 그랬을 테고 말이다.
그 사이 661년 9월에 있었던 신라군의 옹산성(甕山城) 및 우술성(雨述城) 함락, 백제인 달솔(2품) 조복(助服)과 은솔(3품) 파가(波伽)의 집단 투항 등 백제 부흥운동에는 점차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662년 7월에 일어났다. 그간 사비성에 틀어박혀 옴짝달싹 못하던 당군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인원과 유인궤는 합심하여 웅진도독부 동쪽으로 백제 부흥군의 방어막을 뚫고 나오는 데 성공한 것은 물론, 지라성(支羅城)과 (두량)윤성(尹城), 그리고 대산책(大山柵)과 사정책(沙井柵) 등의 목책까지 차지하였다.
이에 귀실복신은 진현성(眞峴城)이 강가에 있고 높고 험하여 요충지여서 이곳을 마지노선으로 당군의 진군을 막아설 계획을 세웠다. 이때 신라군도 당군에 합세해 있었는데, 신라군이 밤에 몰래 성가퀴를 타고 넘어가 새벽녘에 성 안으로 침투하여 수비병 8백 명을 참살하고 성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당군과 신라 사이의 군량 수송로가 재확보되었다. 이는 거꾸로 얘기하면 그간 백제 부흥군 측에서 당군과 신라군을 분리시켜 공략한다는 대전략의 한 축이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당군은 자체 병력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백제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매번 곤욕을 치르고 있던 와중이었기에, 이번에 새로 본국에 추가로 지원병력을 요청하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이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주로 산둥반도 일대에서 7천 명의 신병을 징집하였고, 해를 넘겨 663년이 되어서야 장군(종3품) 손인사(孫仁師)를 웅진도행군총관(熊津道行軍總管), 즉 웅진 방면군 사령관으로 새롭게 임명하여 바다 건너 파병을 하게 된다.
그 사이 백제 부흥군의 동향은 기록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데, 다만 662년 12월에 부여풍과 귀실복신의 사이를 갈라지게 만드는 일이 하나 있었다. 부여풍이 귀실복신을 대동하여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와 있던 왜군 지휘부와 회의를 가졌는데, 주제가 바로 천도였다.
“이곳 주유(州柔, 주류성)는 농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업과 양잠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고, 방어하기 좋아 싸울 만한 곳이오. 그래서 여기에 오래 머문다면 백성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피성(避城)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소. 피성은 서북쪽으로는 띠를 두르듯 옛 연단경(連旦涇)의 물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깊은 진흙과 커다란 제방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은 농지로 둘러싸여 있고 도랑을 터뜨리면 물이 쏟아져내리는 곳이오. 즉 토산물과 각종 물산이 삼한(三韓)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 할 수 있겠소. 땅이 비록 낮긴 하지만 옮기는 게 좋지 않겠소?”

정확히는 부여풍과 귀실복신 중 누가 이 논의를 주도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도 주류성을 떠나고 싶어 하였던 것이 부여풍이었던 것을 보면 이때의 발언 역시 부여풍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고자 하는 곳의 이름부터가 피성(避城), 곧 위급상황 시 대피를 위한 성이었던 것을 보아도 나중에 해상으로 도망칠 것까지 감안하여 내륙에 위치한 주류성보다는 좀 더 해안에 가까운 피성으로 옮기고자 하였던 것은 결국 부여풍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귀실복신은 이에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앞서 국정의 모든 권한을 신임 국왕에게 헌납하였던 바 그대로 그는 행동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 제안을 반대한 이는 오히려 왜군측이었다. 피성은 적군과 만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라는 점, 하지만 주류성은 산이 험하여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을 들어 천도에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던 부여풍에게는 귓등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결국 국왕의 뜻대로 백제는 수도를 피성으로 서둘러 옮겼다.
이에 대해 왜군측이 우려했던 부작용은 금세 확인이 되는데, 불과 두 달 후인 663년 봄 2월에 김흠순과 김천존(金天存)이 이끄는 신라군이 대대적으로 거열성(居列城), 거물성(居勿城), 사평성(沙平城), 덕안성(徳安城) 등 중요 지역들을 함락시키면서 2천 명 가까운 백제군 사상자를 남겼다. 그렇게 갑자기 신라측과의 접경지대가 더욱 가까워지자 당장 피성에 머물고 있던 부여풍은 위기감에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마도 이것이 부여풍과 귀실복신 사이를 갈라놓은 결정타가 되었던 것 같다. 추정컨대 주류성 환도도 그렇고 부여풍의 경험 부족이 아무래도 눈에 밟혔을 귀실복신은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일부 역사서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그가 스스로 권력을 쥐고 국정을 직접 꾸려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둘의 사이는 이 무렵 쯤엔 완전히 멀어져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약 두 달 후인 5월 1일에 왜국에 도착한 한 인물이 부여풍이 귀실복신의 잘못을 성토한 사실을 조정에 보고한 것이다. 그는 직전에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제를 들렀다 왜국으로 건너온 것이었으니 4월경에 이 얘기를 부여풍으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사유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왜국에서 왜인의 말을 하며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온 부여풍의 입장에서는 왜인이 같은 백제인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속마음은 얼마 안 있어 그의 행동까지 규정짓게 만들고 만다.
663년 6월 늦여름의 어느날, 귀실복신이 병으로 굴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 그를 부여풍이 문병을 왔다. 그런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측근을 거느린 방문이었다. 물론 그가 국왕이었으니 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그 측근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때의 상황을 부여풍은 귀실복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가 먼저 모반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를 빌미로 그는 측근들을 대동하여 병상에 있던 귀실복신을 전격 체포하였고, 죄를 묻겠다면서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는 등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그가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는지 아니면 자신은 억울하다며 끝까지 버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허나 어차피 그의 답변이 중요치는 않았다. 군주의 눈 밖에 난 것 자체가 그의 잘못이기 때문이었다.
부여풍은 귀실복신이 묶여 있는 그 장소에서 측근들에게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최종적으로 의견을 물었다. 그 중 한 명인 달솔 덕집득(德執得)이 사악한 반역 죄인은 석방해서는 안 된다며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를 들은 귀실복신이 마지막 힘을 내어 덕집득에게 침까지 뱉으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부여풍은 병사들에게 귀실복신을 처형하고 그 목은 소금에 절이도록 명하였다. 그렇게 백제 부흥군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마지막 희망은 그 생명력이 다하고 말았다.
이는 곧 적국 신라에까지 소문이 났다. 백제왕이 귀실복신이라는 가장 우수한 장군(良將)을 제거했다는 사실은 경쟁자 입장에서는 희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다음달인 7월 17일에 문무왕이 김유신, 김인문 등 거의 30명에 달하는 장군들을 대동하여 친정에 나섰다.
부여풍도 고구려와 왜국에 각각 지원 요청도 하는 등 나름 다방면으로 손을 쓰긴 썼다. 하지만 그는 군사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에 보인 행동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수도 주류성을 휘하 장수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왜국의 수군이 온다고 한 백촌(白村)으로 미리 마중 나가 있겠다고 한 것이다. 전투는 떠맡기고 자신은 의전에나 신경을 쓰는 모습이 그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결과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백강 하류에서 벌어진 수상 전투는 왜군의 1천 척을 상대로 손인사의 170척 정예 수군이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여 압살하다시피 승리를 거두었다. 지원군의 패전을 지켜보던 부여풍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잽싸게 고구려로 내뺐다. 그리고 주류성에서 벌어진 공성전은 국와조차 해외로 도망친 상황에서 굳이 결사항전을 벌일 의지를 버린 채 항복하는 것으로 손쉽게 적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유일하게 임존성이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조차도 투항한 같은 백제인들에 의해 함락당하였다.
그렇게 백제 부흥운동은 귀실복신의 빈 자리만 커다랗게 느낀 채 종결되었다. 귀실복신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 부여풍에 의해 비참하게 목숨을 빼앗겼지만, 그의 핏줄은 그래도 결국 살아남았다. 수륙 양면에서의 결정적 패전 이후 백제 유민들은 퇴각하는 왜군의 배를 얻어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고국을 바라보며 울면서 왜국으로 건너갔다. 그들 중에는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688)나 달솔 귀실집신(鬼室集信) 같은 귀실 가문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왜국 정부로부터 귀실복신에게 공(功)이 있었다는 이유로 우대를 받았는데, 귀실집사의 경우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관료육성기관인 다이가쿠료(大学寮, だいがくりょう)의 장관급인 학직두(學職頭)까지 오른다. 그의 후손들은 어떻게든 살아 남았지만 그럼에도 백제의 부활은 끝내 성공시키지 못한 이의 못다 이룬 설움이 오늘날까지도 느껴지는 듯하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일본서기, 부여융 묘지명, 당 유인원 기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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