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0년 7월 12일, 당나라군 13만 명, 신라군 5만 명이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 포위를 위해 그 앞 소부리 벌판까지 진격해왔다. 의자왕의 아들들이 당-신라 연합군 진영으로 와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지만 소용없었다. 성을 무력으로 함락시키면 합법적으로 대량의 전리품을 거머쥘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었기에, 굳이 항복을 받아주고 그런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당-신라 연합군의 거절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그날 밤 바로 태자 부여효(扶餘孝)와 극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사비성을 몰래 빠져나갔다. 국왕이 다른 아들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심지어 손자마저 방치한 채 도망친 것이었다. 그는 다급히 동북쪽의 군사요충지인 웅진성(熊津城, 공주 공산성)으로 향했다. 당장에 포위망이 완벽히 구축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길인 수로, 곧 백강(금강)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다음날인 7월 13일 아침, 이 모든 상황을 책임지고 진두지휘해야 할 국왕인 아버지가 달아났다는 소식에 당황한 것은 아들들이었다.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사라진 마당에 이들도 각자 자신만의 주관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 가장 실망이 컸던 둘째 아들 부여태(扶餘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직접 백제의 국왕으로 등극하는 것이었다. 당장 국가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겨우 명목상의 국왕 자리가 탐나서라기보다는, 아마도 갑작스런 국왕의 부재로 인해 누구든 구심점이 되어주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다만 이것이 또 불필요한 분란을 만들어낼 줄은 그도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의자왕의 여러 아들 중 가장 먼저 태자가 되었던 부여융(扶餘隆)에게 아들 부여문사(扶餘文思)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왕과 태자가 멀쩡히 계신데 숙부가 자기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군이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이긴 하지만 백제가 운 좋게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때를 가정해본다면, 지금의 상황은 둘째 아들 부여태가 결과적으로 멀쩡히 부왕이 살아계신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칫 부여융과 자신마저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음을 걱정한 것이었다.
당연히 말뜻을 알아들은 부여융은 아들 및 측근들과 함께 행동에 나섰다. 이들이라고 해서 강제로 성문을 열 수는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를 목격한 일반 백성들도 부여융 일행을 따라 단체로 성벽을 타고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소정방은 역으로 성벽을 오를 좋은 타이밍이라고 여기고 군사들에게 성가퀴를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 상황에서는 스스로 왕위에 오른 부여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면 당군에게 성을 정복당하여 자신은 전쟁의 주범으로 몰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이 함락되기 전 조금이라도 일찍 항복을 청하려고 다급히 성문을 열도록 하였다.
사비성의 자진 항복은 의자왕이 피신한 웅진성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7월 18일에 웅진성의 장관인 웅진방령(熊津方領) 예식(禰植, 또는 예식진(禰寔進))이 의자왕 일행을 데리고 성을 나와서 당군에 투항한 것이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백제는 이날 멸망하였다.
하지만 백제 지배층의 자진 투항만으로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당군은 항복을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상관없이 군사들에게 전리품 약탈을 허용하였고, 당연히 이 과정에서 백제의 장정들 상당수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강한 충격을 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겠지만, 당군에 항복하여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였지만 패배한 국가의 백성들이 마구잡이로 약탈당하는 참상을 지켜보던 이들 중에는 서른한 살의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도 끼어 있었다.
그는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 등 10여 명의 장수들과 뜻을 함께 모아서는 당군 진영에서 탈출하였다. 이들이 처음 향한 곳은 흑치상지의 출신지인 서부(西部)였던 모양이지만, 최종적으로 자리잡은 곳은 임존산(任存山)이었다. 해발 5백 미터에 가까운 이 산에 급히 목책을 세우고는 언데 닥쳐올 지 모르는 당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는데, 이들의 거병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열흘도 되지 않아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백제 유민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예측하였던 대로 약 한달 후인 8월 26일에 기어코 당-신라 연합군이 임존산의 백제군 진영을 공격해왔다. 하지만 그 사이 이들도 병력 보강도 많이 된 데다가 또 험한 지형을 이용해 다층의 방어막을 구축해둔 상태였다. 아무리 연합군측의 정예의 공격이라 하더라도 결국 본진은 뚫지도 못한 채 주변의 작은 목책만을 무너뜨린 게 전부였다.
결국 연합군의 전면적인 퇴각으로 임존산의 백제 부흥군은 기세를 드높였고 동시에 주위에 널리 그 명성이 퍼지게 되었다. 그 여파는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무려 2백여 개의 성이 백제 부흥군에 가담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마도 이 무렵에 주류성(周留城)을 중심으로 한 귀실복신(鬼室福信)측의 백제 부흥군과 세력을 합치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하면 백제 멸망 당시 지방행정체계가 5부(部) 37군(郡) 200성(城)이었기 때문에 2백 개의 성이 오로지 흑치상지에게만 합류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이는 흑치상지 한 명이 아니라 귀실복신 등을 포함한 전체 백제 부흥군이 당시 웅진도독부가 있던 사비성 등 일부를 제외하고 백제의 거의 전 영토를 재확보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선전 문구였을 공산이 크다.
흑치상지는 성이 흑치이고 이름이 상지였으며, 자는 항원(恒元)이었다. 고대 사회였기에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집안도 훌륭했다. 흑치 가문은 원래 왕실인 부여씨의 일파였는데, 언젠가부터 흑치 지역을 봉지로 받으면서 성씨로 흑치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 대대로 달솔(2품)의 직급을 세습하여 받았는데, 증조할아버지 흑치문대(文大), 할아버지 흑치덕현(德顯, 또는 가해(加亥)), 아버지 흑치사차(沙次(子)) 역시 모두 달솔이었다. 흑치상지도 스무 살 이전에 달솔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의 달솔로서의 공식적인 사회 경력은 풍달군(風達郡, 위치 미상)의 군장(郡將)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가 7척이었다고 하는데, 시대별로 단위가 달랐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못해도 2m에 버금가는 덩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형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격도 강인하고 용감하였으며, 나아가 지략까지도 겸비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여 좌구명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반고의 한서(漢書), 사마천의 사기(史記) 등을 탐독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한번은 그가 타던 말을 병사가 때린 일이 있었다. 당연히 주위에서 그 병사를 벌해야 한다고 나섰지만 흑치상지는 이렇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개인 말의 사적인 일로 인해 공적인 일을 하는 병사를 매질하겠소.” (何遽以私馬, 鞭官兵乎)
이처럼 공과 사가 분명했던 그는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받은 상들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물욕 또한 없었다. 그러니 나중에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인품을 아는 이들은 누구나 그를 위해서 애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귀실복신의 세력과 함께 한 이후로 그의 활동 기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백제 부흥군의 여러 전선에서 한 축을 담당하였으리라고만 추정해볼 따름이다. 귀실복신이 승려 도침(道琛)을 제거하였을 때에도, 또 무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부여풍(扶餘豊)이 귀실복신을 축출하였을 때에도 흑치상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혹 중앙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최전선에서의 군사적 활약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일까? 여전히 임존산을 근거지로 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긴 하나, 이 또한 계속 그러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8월 28일의 백촌강(白村江) 패전과 9월 7일의 주류성 항복 당시 그와 사타상여도 그곳에 있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부여풍이 불명예스럽게 고구려고 달아나고 남은 백제 부흥군, 즉 부여충승(扶餘忠勝), 부여충지(忠勝忠志), 왜군, 탐라 사신 등이 당-신라 연합군에 항복하였을 때 그 둘도 함께였다. 그 당시 임존성은 지수신(遅受信)이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이 지수신과 흑치상지의 관계도 명확하진 않다. 아마도 초창기에 임존산 전투 후 2백여 개 성이 합류해 왔을 때 지수신도 따라온 것인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다른 전장에서 활약하면서 그가 귀실복신에 의해 새로 임존성을 담당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 흑치상지가 당군 진영에서 탈출할 때부터 임존산에 같이 있었던 것인지 모든 게 불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지수신의 전투력 역시 상당히 강력했다는 사실이다. 남쪽이 다 평정되자 당-신라 연합군은 북쪽으로 향했다. 가장 핵심은 북쪽 지역의 백제 부흥군 중심지였던 임존성이었다. 10월 21일에 공격을 시작하였지만 달을 넘겨도 함락은 요원했다. 결국 병사들이 모두 지쳐버리자 문무왕이 회군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11월 4일에 군사를 돌렸고, 신라군은 11월 20일에야 수도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런 험지를 함락시킬 만한 뾰족한 방도가 없자, 당나라의 유인궤가 나름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바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공성전을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당나라 본국에서 지원 나와 있던 손인사(孫仁師)같은 장군은 반대하였다. 투항해온 이들에게 갑옷과 무기, 군량까지 내주었다가 만약 이들이 배신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당연한 논리였다. 하지만 유인궤는 이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어 충성심을 입증하도록 하는 게 더 낫다고 우겼고, 결국 그의 뜻대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가 임존성 공략에 투입되었다. 그렇게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 실행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인궤의 기대대로 실제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한때 동료였던 지수신을 상대로 우월한 전투력을 발휘하였고, 결국 방어망이 뚫리게 된 지수신이 가족마저 남겨둔 채 고구려를 향해 북쪽으로 달아나는 것으로 공성전은 마무리되었다.
이후 흑치상지는 웅진도독부에서 수년간 더 임무를 수행하고 670년대 초에 당나라로 넘어갔다. 그간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중원에서도 실력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오랫동안 당나라를 위해 토번, 돌궐 등 이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한 그는 수차례 전공을 거두며 승진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외국인인 그에게는 당나라 안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하 장수의 결정적 패배와 부패한 관리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힌 그는 좌절감에 스스로 목을 메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689년, 그의 나이 60세 때의 일이다. (다른 기록에서는 결국 교수형을 당하였다고도 하지만 묘지명의 문맥상 자살이 맞는 것 같다.)
이를 억울하게 여긴 맏아들 흑치준(黑齒俊, 676~706)이 명예 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덕분에 겨우 흑치상지는 거의 10년이 흐른 후인 698년에 최종적으로 복권될 수 있었다.
흑치상지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양 극단으로 갈린다. 전통적으로 역사에서는 당나라의 흑치상지 열전의 영향으로 유능한 장군으로서 기록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민족주의 역사가 신채호는 그를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자로 단죄하고 있다. 어떤 한 인물이 그 인생에서 하나의 성격이나 방향만 지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과연 자신만을 위해 조국 백제를 팔아먹은 인물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백제 유민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투항한 것인지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확인할 길은 요원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의 신사적인 성격과 뛰어난 군사적 능력 그리고 치열한 투쟁을 통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이다. 다음의 기록은 투항 이후에도 그의 여전한 평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일 것이다.
인덕 초(664년)에 절충도위(折衝都尉)에 제수되어 웅진성(熊津城)에 주둔하게 되니 병사들과 군중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일본서기, 흑치상지 묘지명, 흑치준 묘지명, 부여융 묘지명, 예식진 묘지명, 대당평백제국비명, 당 유인원 기공비
'위클리 히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웅진도독부는 어디에 있었는가? (웅진/공주 vs. 부여/사비) (0) | 2026.06.11 |
|---|---|
| 부여 사비성(泗沘城), 동방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0) | 2026.06.09 |
| 고구려의 평양과 낙랑군 이야기 (0) | 2026.05.25 |
| 『지정생존자』, 인간은 차별을 원하는가? (3) | 2026.05.13 |
| 고려와 발해를 잇다 - 역사 속 경계인들의 이야기 (2) | 2026.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