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고구려의 평양과 낙랑군 이야기

위클리 히스토리 2026. 5. 25. 15:53

오늘은 민감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시작하기 전에 변명부터 해보자면, 역사에는 정답이란 것이 없다. 그저 여러 근거들에 대한 타당한 취사선택과 좀 더 합리적인 해석, 그리고 각자가 이를 기반으로 판단하고 제시하는 주장 내지 의견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직접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있지 않는 한은 부득이 이 지난한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 곧 역사를 바라보는 (어쩌면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일 것이다. 그 점을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해보자.

 

평양에 있던 낙랑?

학계에서는 고구려에 평양이 하나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뭔가 대단한 이유나 증거가 있어서는 아니다. 현재 평양이 있던 자리에 ‘낙랑’이 있었기에 3세기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 같은 곳에 두 세력이 공존하게 되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현재 자리에 낙랑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들은 아주 많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 후 북한이 평양 및 황해도 일대에서 발굴한 것까지 못해도 수백 개가 넘는다. 심지어 연도가 확인 가능한 유물만 해도 1백 개를 웃돈다. 그 중 다수는 한사군의 각 명칭이 정확히 박혀 있다. 시대도 다양하다. 기원전부터 4세기까지 두루 발견된다.

 

평남대동 전 토성지 내 출토 낙랑 봉니(일제강점기 촬영) - 국립중앙박물관

 

일제가 그들이 주장하는 낙랑 지역에 낙랑 관련된 유물을 가짜로 파묻었다가 발굴한 척을 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해방 이후에 북한측에서 발굴한 것들도 꽤 많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아무래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특히 1990년대 초에 발굴된 일명 ‘낙랑군 호구부’의 경우 기원전 46년과 45년의 낙랑군의 각 현별 인구를 비교한 자료인데, 너무나 멀쩡히 ‘낙랑’이라고 추정되는 지역에서 ‘낙랑’의 행정자료가 발견된 셈이어서 소위 빼박 증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사군 중 낙랑이 대략 4세기까지도 이곳 평양 인근에 남아 있었다면, ‘평양’으로 천도하였다는 고구려는 대체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된다. 학계는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 때에 한사군을 실질적으로 한반도에서 모두 몰아내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전에는 같은 평양 지역에 낙랑과 고구려의 수도가 동시에 공존하는 셈이 된다. 둘 중 하나는 그곳에 없어야 한다면, 학계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구려의 평양을 치워버리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2년(311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4년(313년) 겨울 10월. 낙랑군(樂浪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15년(314년)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침략하였다.
16년(315년) 봄 2월.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중국측 자료도 있다. 다음은 <자치통감>의 건흥 원년(313) 4월 기사이다.

 

요동의 장통(張統)이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미천왕)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王遵)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모용)외(廆)에게 귀순하니, 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太守)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遼東 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 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 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글자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정말로 313년에 미천왕이 낙랑군을 침탈하였던 그때에 맞춰 선비족인 모용외 세력에게 낙랑군 세력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다만 여기서도 문제가 있는데, 우선 낙랑과 대방이 여전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 위치가 맞는지, 또 만약 맞다 해도 1천여 가면 너무 인구가 적다는 점이 그것이다. 후자의 경우 특히 과거 한때 거의 4만4천 호(戶)에 28만 명이 넘었던 인구에 비하면 너무 초라할 지경이다. 어차피 많이 쪼그라들었는데 그 인구가 모용외 세력으로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많았지만 소수인 저만큼만 겨우 빠져나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저들이 옮겨간 곳은 요서지역이었다. 물론 오늘날 평양에서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심지어 1천여 가로 규모가 적은 것을 보면 물리적으로 집단 해상 이주가 불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그렇게 오랫동안 죽어라 싸우던 상대방이 그렇게 집단으로 대탈출을 벌이는데 아무런 제재도 없었다는 게 한편으로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든다. 혹시 오히려 낙랑과 모용선비의 거리가 그만큼 멀지 않았을 개연성은 없을까? 이들이 새롭게 낙랑군을 설치한 곳은 요동반도에서 멀지 않다는 점을 우선 기억해두자.

 

그래도 이 장통이란 인물은 이 당시 실존하였음이 증명된다. 모용외에 의해 그들 땅에서 낙랑태수로 임명받은 장통은 자연히 선비족을 위해 활약하게 되는데, 예컨대 319년 겨울 12월에 고구려의 하성(河城)을 공격하여 그곳의 장수 여노자(如奴子) 및 고구려인 1천여 가를 생포하여 당시 수도였던 극성(棘城)으로 회군한 적도 있었다. 여기서 하성의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당시의 대치상황을 고려하였을 때에는 요하의 강변쪽에 자리한 고구려측의 최전선 기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미천왕 대에 한사군을 몰아냈다는 학계의 입장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더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정말 한사군을 몰아낸 것이 맞냐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에 과연 제대로 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한 지역을 침략한 것과 완전히 점령까지 한 것은 같을 수 있느냐는 단순한 질문에 누가 확답을 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같은 미천왕 시기의 다음은 현도군 공격이 있기 13년 전의 기록인데, 여기에도 침략만 하였지 영구히 점령하였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13년 후에 위의 현도군 공격 기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천왕 3년(302년) 가을 9월. 왕이 병력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침략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다시 이 앞의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공격 기사만 있을 뿐 점령은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이상하지 않은가? 심지어 8천 명을 옮길 정도로 거의 점령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도 여전히 재공격이 이루어질 정도인데, 낙랑의 장통과 왕준이 1천여 가를 옮긴 정도로 고구려가 다 점령한 것은 또 맞느냐는 쉬운 질문에 누가 단정을 지을 수 있을까. (심지어 1천여 가면 기본적으로 8천 명보다도 적은 수준이다.)

 

오히려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생각해보자면, 혹 이들의 쟁투는 지금의 평양에 수도를 두고 있던 고구려가 그보다 멀리 어딘가에 있던 낙랑 세력과 벌인 것이고, 어차피 거리가 있다보니 침략은 하되 점령은 어려웠던 모종의 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선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고구려가 수도를 지금의 평양에 둔 것이 맞는지, 그리고 또 평양에는 과연 낙랑인들이 없었던 게 맞는지 좀더 깊이 살펴보고 마저 이야기를 계속해보겠다.

 

바다로 보는 평양의 위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기록에 대해서는 앞서 다른 글에서 길게 다뤘기에, 여기서는 그때 굳이 다루지 않았던 평양의 위치에 대해서만 독립적으로 다뤄볼 것이다. 재밌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기록인데, “바다”의 위치를 가지고 우회적으로 평양의 위치를 확인해볼 수 있다.

 

태조대왕 62년(114년) 가을 8월. 왕이 남해(南海)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찰하였다.
중천왕 4년(251년) 여름 4월에 왕이 관나부인(貫那夫人)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져버렸다.

 

고구려는 초기에 이미 동쪽으로 옥저를 정복함으로써 ‘동해(東海)’와 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남해는 동해가 아닌 어딘가여야 하는데, 남쪽으로 오늘날 남해안까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그 남해를 말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것은 251년에 드디어 ‘서해(西海)’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251년 즈음에야 서해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로부터 불과 4년 전에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기록에 주목해보자. 즉 수도를 남쪽으로 옮겼기에 오늘날 황해를 가리켜 지리적으로 드디어 ‘서쪽’ 바다라는 표현을 쓸 여지가 생긴 것이다. 즉 방향의 기준이 되는 위치가 옮겨졌다고 해석하면 모든 것이 쉽게 이해가 된다.

 

이의 배경이 되는 사건도 기록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바로 태조대왕 때의 영토확장 기사이다.

 

태조대왕 4년(56년) 가을 7월. 동옥저를 정벌하고 (중략)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 동해)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살수를 보통 지금의 청천강으로 보는데, 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맞다고 치고 넘어가겠다. 즉 이미 고구려는 황해와 접해 있는 해안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를 ‘남해’라고 지칭한 것은 고구려의 수도(당시는 국내(國內) 지역)에서 바라보았을 때 남쪽 어딘가라고 보고 ‘남해’라고 불렀을 것이다. (참고로 요동반도에서 발해와 황해는 정말 ‘남해’가 되겠지만 여기서는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겠다.)

 

그리고 그게 ‘서해’로 처음 불리게 되는 시점은 바로 위의 중천왕 기사처럼 251년이다. 그렇다면 이 당시 고구려의 수도에서 바라보았을 때 황해가 자연히 서쪽이라는 말이 된다. 즉 24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평양에서 바라보았을 때 서쪽에 바다가 있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즉 평양은 곧 지금의 그 평양일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같은 평양에는 동시에 낙랑인들이 있었다는 것인가, 없었다는 것인가?

 

평양에 있던 사람들

역사에는 흥미로운 기사들이 차고도 넘친다. 그중 일부를 소개하겠다. 현재 공식적으로 평양 인근에서 금석문으로 남아 있는 한사군 태수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무신년(348년) 어양(漁陽) 출신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영화 9년(353년) 3월 10일 요동(遼東)·한(韓)·현도태수(玄菟太守)령(領)의 동리(佟利)

 

대방태수 장무이 벽돌 - 국립중앙박물관

 

그래서 이때는 이들이 태수를 자칭하였다거나 혹은 지배층인 고구려에서 임의로 그런 직책을 내려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우선 현도군은 이곳에 있지도 않았고(보수적인 학계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다음의 인근에 있던 또 다른 ‘태수’의 존재를 보아도 정말 이들이 태수 직책을 수행한 것이 맞을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건무 8년(342년) 서읍(西邑)태수 장군(張君)

 

여기서 서읍은 한사군에는 없고 오히려 고대 중국의 지명인데, 장군이라는 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비공식적으로 서읍태수를 자칭한 것이 아닌가 강하게 의심을 주는 부분이다. 이게 맞다면 장무이나 동리도 마찬가지로 실제 직책이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명예직처럼 허명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는 셈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웃나라 백제에서도 발견된다. 개로왕이 472년에 북위(魏)로 보낸 국서 중 다음의 발췌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자.

 

사사로이 임명한(私署)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부)여례((扶)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즉 백제에서 자체적으로 대방태수를 임의로 임명하였다는 내용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어쨌든 그 이름조차도 장무이와 비슷한 장무였다. 혹 그도 대방 지역의 유민 출신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백제의 국왕도 할 수 있는 일을 고구려는 과연 못했을까? 즉 저 위의 장무이와 동리 역시 고구려 정부가 내려준 고구려 영토 내의 대방태수 등이 아니었겠나 짐작되는 부분이다.

 

오늘날 평양의 낙랑지구에서 발굴되었거나 아직도 발굴되고 있는 여러 낙랑계 유물들은 비교적 한나라 계통의 것들로 밝혀져 있다. 대략 편년이 가능한 것들의 통계를 내보면 기원전부터 4세기 때까지도 두루 나타난다. 이 얘기는 곧 그 기간 동안은 어찌되었든 낙랑 유민들이 그곳에 살았다는 반증이 된다. 기왕 있는 사실까지 눈감을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인천에 거주중인 화교같은 존재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주 먼 미래에 만약 인천의 차이나타운을 발굴하고는 거기서 나오는 중국계 유물들을 보고 이곳을 중국 영토였다고 볼 게 아니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후기에 나타나는 평양 지역의 낙랑인들은 다민족국가 고구려의 하나의 구성원이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장무이나 동리 등은 그런 이들의 명예직에 불과하였고 말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평양에 고구려의 수도와 대방태수든 현도태수든 누가 나타나도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즉 이처럼 해석할 수 있다면 미천왕이 한사군을 공격하였을 때의 그 당시 위치도 굳이 평양이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다만 우리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선조가 실질적으로 어디로, 언제 그 땅을 떠났느냐이다.

 

북쪽으로 이동한 낙랑

그렇다면 그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 참고해볼 만한 기사가 몇 가지 있다. 우선 <후한서>에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보고 가자.

 

마한은 (중략)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其北與樂浪, 南與倭)

 

남쪽으로 왜국은 바다 건너에 있었다. 그런데 접해 있다는 표현을 쓴다. 놀랍게도 낙랑은 왜국와 마찬가지로 취급된다. 혹 낙랑도 왜국처럼 바다 건너에 있었지만 동일하게 접해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과거 지리적 표현에는 바다를 사이에 둔 경우에도 접해 있다는 말을 쓰기도 했다. 왜냐면 어쨌든 바다 자체가 제3국의 소유가 될 수는 없는 개념이었기에, 굳이 따지자면 바다만 건너면 만나게 되는 사이는 접해 있다고 보는 그런 고대인의 관념이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는 해석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이쯤 하고 다음 기록을 보겠다. 이번에도 중국측 역사서인 <후한서>이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있던 부여가 다름 아닌 낙랑을 공격한 기사가 전해진다.

 

영초 5년(111년)에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항상 그렇지만 뭔가 믿기지가 않으면 기록이 잘못 되었다고 퉁치고 넘어가는 습관이 학계에는 있는데, 이 기사의 경우 <후한서>가 동이열전 내용을 <삼국지>에서 베끼듯이 복사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없는 내용을 직접 추가한 것이기에, <후한서>의 찬자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덧붙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정확도가 다른 부분 대비 오히려 좀 더 높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이는 고구려측 기록으로도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태조대왕 66년(118년) 여름 6월. 왕이 예맥(穢貊)과 함께 한의 현도군을 습격하고 또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여기서의 화려성은 다름 아닌 낙랑군의 화려현을 지칭하는데, 부여가 낙랑을 공격한 시점과 불과 7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이 당시 낙랑은 현도와 마찬가지로 과거 위치에서 더 멀리 이동해 와 있었음을 최소한 알 수가 있다. 참고로 현도군은 고구려의 서북쪽에 있었으니 그로부터 너무 멀지 않은 곳에 낙랑군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좀 더 범위를 좁혀보자면, 이런 기록도 참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태조대왕 94년(146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大守)의 처자를 잡아왔다.

 

여기서 서안평을 역사학계에서는 중국 랴오닝성 단둥(丹東)시에 있는 구련성진(九連城鎭) 애하첨촌(靉河尖村)의 애하첨고성(靉河尖古城)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단둥시는 오늘날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북한 신의주와 마주한 곳이다. 그렇게 비정하는 이유는 이곳에서 ‘안평락미앙(安平樂未央)’이 새겨진 와당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것이 곧 이곳이 ‘서(西)’안평이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즉 ‘안평’이라는 증거는 될지언정 어째서 ‘서안평’이 되어야 하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름 그대로라면 고구려측 안평에 대응하여 그보다 서쪽에 있기에 서안평이라고 하였을 테니, 당연히 ‘안평락미앙’이 발견된 단둥시가 고구려의 ‘안평’이고 서안평은 그보다 서쪽 어딘가, 아마도 방향으로 본다면 요동반도쪽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서안평의 위치를 대략 잡은 다음 확인할 것은 이때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대방현령 본인과 낙랑태수의 가족의 존재이다. 이들은 왜 서안평에 있었던 것일까? 대방이 황해도에 있었다면 왜 현령은 굳이 압록강 너머 오늘날 중국 땅에 가 있었다는 것일까? 거기다 낙랑태수는 아예 가족이 통째로 서안평에 있었다. 왜였을까?

 

이를 억지로 이들이 우연히(?) 이동 중에 서안평에서 마침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주장하기도 하는데, 물론 여기에는 근거가 있지는 않다. 그저 이들이 황해도와 평양에 없고 여기에 있었으니 이동 중(?)이었을 거라고 보는 것뿐이다. 그런데 앞서 태조대왕 때 이미 살수(극보수적으로 청천강이라고 간주하더라도)까지 고구려가 확보하였다면, 원래는 그곳에 있어야 할 이들이 굳이 요동반도까지 넘어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곳으로 가지 못하는 사정이 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이들이 이곳 어딘가에서 살고 있었다는 게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평양쪽에는 잔류 세력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고구려 정부에 귀속된 상태였을 공산이 크다. 반대로 낙랑의 원 지배세력은 모종의 사유로 어느 시점인가 본거지를 떠나 (아마도) 요동반도로 옮기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낙랑은 언제 평양을 떠났는가?

그렇다면 언제쯤 평양에 있던 낙랑 세력이 분화되어 떠날 이들은 떠나고 남은 이들은 고구려의 지배 하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일까? 이는 역사기록상으로는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 낙랑을 계속 평양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추정해볼 여지는 있다.

 

우선 시간의 흐름을 정리해보자. 중국측 기록에 남아 있는 소위 한사군의 약사이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임둔·현도·진번의 4군(郡)을 두었다.
시원 5년(기원전 82년).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고구려 지역으로 옮겼으며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후에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시 단단대령의 동쪽 7현(縣)을 떼어 낙랑 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건무 6년(서기 30년). 동부도위(東部都尉)를 폐지하고, 단단대령 동쪽 지역을 결국 포기(棄)한 뒤, 그 지방의 우두머리(渠帥)들을 현후(縣侯)로 봉하였다.

 

마지막 부분이 중요한데, 표현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사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냥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도록 방치했다는 뜻이다. 즉 포기했다는 말이 포인트이다. 이런 사정은 여기저기에 파편화된 기록들을 모아보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우선 <삼국사기>에 전하는 대무신왕 때의 호동 왕자의 기록을 보면, 서기 32년에는 낙랑왕의 존재가 나타나고, 또 서기 37년에는 고구려에 의한 낙랑 멸망 기사가 나온다. 시점이 비슷하다보니 연속된 기사로 보기도 하고, 혹은 전자는 위치도 옥저 지방이고 또 낙랑을 하나의 독립국으로 간주하고 있기에 서로 별개의 존재로 보기도 한다. 여하튼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시점이다. 이 서기 30년경을 전후한 시점에 낙랑과 관련된 기사가 여럿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다름 아닌 한나라 내부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바로 위의 인용문 마지막에서 보았다시피, 당시 한나라는 방대해진 영토를 물리적으로 다 관리할 수 없다보니 변경의 군(郡)을 줄여서 행정 리소스를 절약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한나라는 창해군 폐지의 사례처럼 이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데, 너무 먼 거리의 지방은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현지인들에게 다 넘기고 명분만 남기는 행정 처분을 하는 경우였다. 그 결과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의 지역도 그 영향을 받아 독립하였다고 한다. (앞서 호동이 옥저로 갔다가 낙랑왕을 만나게 된 것도 그렇다면 어느 정도 연결이 된다.)

 

이는 여파가 컸는데, 이를테면 같은 해 초에 낙랑의 토착민(土人)인 왕조(王調)가 반란을 일으켜 낙랑군수 유헌(劉憲)을 살해하고 낙랑군을 점령하고는 스스로 낙랑태수를 자임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해 가을에 한나라 광무제는 왕준(王遵)을 새로 낙랑태수로 임명하여 왕조 토벌을 지시하였다. 이때 낙랑군의 삼로(三老)인 왕굉(王閎)과 낙랑군의 결조사(決曹史)인 양읍(楊邑) 등 군의 관리들은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아들였다.

 

여기서 삼로는 원래 중국 진한시대의 지역관(鄕官)이었는데, 지역민 중에서 유력자를 선임하여 지방사회의 교화를 담당토록 하는 제도였다. 여기서 지역민이라는 개념이 중요한데, <삼국지>나 <후한서>의 기록들을 보면 옥저나 예에서는 현지인들이 스스로 삼로(三老)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토착민인 왕조도, 삼로인 왕굉이나 그 밑의 양읍 등모 모두 중국계가 아니라 낙랑의 현지인들이었을 것이다.

 

다만 광무제가 서기 30년에 동시에 지방행정 개편을 하여 정부규모를 축소하던 상황과 역행하는 이 사건은, 정확히는 군사작전을 통한 대외확장책이 아니라 낙랑 내부에서의 자발적인 교통정리를 마치 광무제 자신이 개입하여 이룬 것처럼 역사기록이 미화된 것으로 읽혀진다.

 

이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의 또 다른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그런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가 있다.

 

건무 20년(44년) (가을). 한(韓)의 염사(廉斯) 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그를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켰다.

 

그런데 이는 의외로 낙랑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 제공해준다. 거의 비슷한 일화가 <삼국지>에는 좀 더 자세히 전해진다.

 

지황 연간(20~23년), 염사착(廉斯鑡)이 진한(辰韓)에서 …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생활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 한나라 사람 호래(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 낙랑의 현)으로 갔다. … (낙랑)군은 …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데려갔다. … “... 만약 따르지 않으면 낙랑이 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공격할 것이다.” (후략)

 

우선 염사의 소마시와 아래의 염사착은 동일인으로 볼 수 있으며(염사는 진한의 지역명일 것이고, 또 중국어에서 소마시는 수마쉬(Sūmǎshì)’, 염사착의 착은 ‘춰(Chuò)’로 발음되는데 그때그때 들리는 대로 비슷한 한자를 써서 이름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시점 차이가 나는 것은 우선 염사착 일화 자체가 한 해에 모두 다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서 일어난 일이었을 확률이 높고, 또 이는 가능성은 적지만  건무 20(二十)년 역시 건무 6(六)년, 즉 서기 30년의 기사를 옮겨적는 과정에서 오기가 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참고하자.

 

여하튼 전체적인 내용이 파격적이어서 이를 설화라고 보기도 하나 여기서는 역사적 기록으로서 보자면, 진한에 와 있던 외지인 염사착이 한나라 말도 할 수 있었다보니 진한에 붙잡혀 있던 호래 등을 데리고 낙랑의 지역인 함자현에 가서 낙랑군에 연락을 취했고, 그곳에서 ‘배’를 이용해 탈출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진한측에 남아 있던 호래의 동지들을 빼오기 위해 또 다시 ‘배’를 이용해 공격하겠다며 겁을 주는 내용이 주된 스토리이다. 이 말인 득슨 이 당시만 해도 이미 낙랑은 진한과는 육상으로 접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 원거리에 위치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쉽게 말해 앞서 한나라가 서기 30년경에 변경의 군을 일과 폐지하던 당시 낙랑도 그 영향을 받았는데, 다만 내부적인 혼란과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폐지가 아니라 유지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중간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배’로 이동이 필수적인 상황이 된 것을 보면 그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기존 근거지를 잃고 물러나 바다 건너에 제2의 낙랑군을 설립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 역시 다른 기록에서 간접적으로 크로스체킹을 해볼 수 있다.

 

(진한에서는)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내용의 출처는 <삼국지>이니 당시 기록이 모아진 시점을 봤을 때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3세기 때의 기록이다. 이는 곧 언젠가 낙랑 사람들이 떠났고 현재는 그들 중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즉 시점의 차이는 있으나 이때는 이미 낙랑 출신으로 자인하는 이들은 정식으로 소속을 가진 독자적인 행정조직이 아닌 잔존 세력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게 가능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실사례가 바로 한사군 중 하나로 유명한 현도군이다. 앞서 한번 한사군의 약사에서 언급하였지만, 실제로 현도군은 처음 위치에서 여러 차례 뒤로 후퇴한 기록이 전해진다. 낙랑군은 그에 반해 기록이 부실하여 확인이 어려울 뿐 그 운명 역시 현도군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역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일부 정보만 가지고 시간적으로 앞뒤 모두의 정황까지 한꺼번에 단정짓는 것이다. 이를테면 발해의 영토도 건국부터 멸망까지 끊임없이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특정시점의 정보만 가지고 요동반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발해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단정하거나, 혹은 거꾸로 처음부터 끝까지 발해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행위처럼 말이다. 어느 시점에는 차지했다가 또 어느 시점부터는 잃을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느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바라보려는 게 인간이 갖는 본질적인 한계이긴 하지만 말이다.

 

낙랑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한나라가 변방을 정리하던 당시에 이미 낙랑도 주류세력은 기존 근거지를 떠나 (지금의 추정으로는 요동반도로) 후퇴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다시는 옛 터전을 밟지 않았냐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는 동향도 발견된다. 우연히도 그 계기는 공손도(公孫度)가 연 “요동왕국”의 운명과 함께였다.

 

아버지 사후 뒤를 잇게 된 공손강(公孫康)이 시점은 불분명하나 3세기 초에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기반으로 대방군(帶方郡)을 새로 만든 게 시작이었다. 둔유현은 과거 낙랑군의 현이었는데 황무지를 개간하였다는 것과, 또 따로 병력을 파견하여 한나라의 유민을 모아 한(韓)과 예(濊)를 공격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후자가 중요한데, 한(韓)과 예(濊)에 가까웠던 한나라의 ‘유민(遺民)’들을 끌어들여 옛 낙랑군의 남측 빈 땅에 대방군을 세웠다는 것인데, 한과 예와의 지리적 거리도 그렇고 이들 유민이란 곧 옛 낙랑군의 잔존세력이었을 공산이 크다. 즉 그렇다면 요동왕국의 공손강은 모처럼 다시 옛 낙랑군 밑단에 대방군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였다는 셈이 된다. 그러자 옛날 주민들이 점차 돌아왔다(舊民稍出)는 것도 그 가설을 일정 부분 뒷받침해준다. 옛 한나라 시절의 군이 새롭게 생기자 한반도 세력에게 2등시민처럼 핍박받던 그들이 옛 선조들의 원 세력으로 귀순해왔다는 말로도 해석되기 때문이다.

 

정황상 대방군의 위치는 아마도 오늘날 황해도 어딘가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이는 고구려 입장에서는 눈엣가시가 되었을 수밖에 없다. 이때 아직 수도는 평양이 아니긴 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갑자기 배후지역에 경쟁세력의 전진기지가 생긴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238년에 그 유명한 사마의(司馬懿)가 요동왕국의 마지막 계승자인 공손연(公孫淵)을 치러 요동 지역으로 왔을 때, 고구려도 지원병력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그것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낙랑군과 대방군은 유지가 된 것일까?

 

우선 사마의 본진의 공손연 토벌 당시 동시에 위나라의 별동대는 바다를 건너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때 파견한 이들이 대방은 유흔(劉昕), 낙랑은 선우사(鮮于嗣)였는데, 각각 대방태수와 낙랑태수로 임명하여 공격토록 하였다. 이후 245년경에는 낙랑은 유무(劉茂), 대방은 궁준(弓遵)으로 태수가 변경되어 있었다.

 

이 당시는 동북아시아의 격변기였다. 공손씨의 요동왕국 멸망 후 위나라와 고구려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자 서로 이 지역에서 미래의 권력이 되기 위한 군사적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동천왕은 242년에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선제공격하여 기선제압에 나서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족으로 동예 지역을 확보하여 배후에서도 위나라의 대방군에 대한 압박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에 위나라도 대대적인 대고구려 전쟁을 준비하여 착착 실행에 옮겼다. 245년에 낙랑과 대방의 두 태수가 동예를 상대로 지역패권을 되찾기 위해 군사활동을 벌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 정점은 246년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 침공이었고, 그 결과 고구려는 수도 환도성을 잃고 멸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관구검 기공비 - 랴오닝성박물관

 

그 와중에 문제는 부종사(部從事)였던 오림(吳林)이 대표로 과거 낙랑이 한(韓)을 관할하였다는 주장을 하며 진한을 낙랑에 편입시키려 하였고, 그것이 현지인들의 분노를 촉발시키고 말았다. 역사서는 통역이 말을 잘못 옮겨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는 역사가의 변명일 뿐이고, 실제로는 급성장해 있던 현지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위나라 관리가 현지인들을 미개인 취급하며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였던 것이 반발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상황은 일파만파 커져서 당시 지역 리더의 호칭이던 신지(臣智)들이 진한의 8개국 소속의 분노한 현지인들과 함께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해왔다. 그 결과는 대방태수 궁준의 전사였을 정도로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중국측 역사서는 낙랑과 대방이 한(韓)을 멸하였다고 적고 있지만 태수가 사망할 만큼 역공에 시달렸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아마도 명시적으로 적지만 않았을 뿐이지 이때 대방군 세력은 새로운 영토에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246년 8월 즈음에 백제의 고이왕도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경을 공격하기도 했다. 좀더 후대에 백제도 요서 지역에 진평군(晉平郡)을 설치하고 해외영토 확보에 나선 적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 이른 시기인 멀쩡히 위나라의 대고구려 공세가 격화되던 무렵에 위나라 후방을 쳤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때 표현된 게 낙랑도 아니고 낙랑의 변경(樂浪邊)이라고 한 것을 보면 낙랑의 본거지가 아니라 당시 낙랑의 전진기지쯤 되던 대방을 의미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겠다. 당시의 대방이라면 백제와 거리상 무척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래도 아직 고구려의 저력은 살아 있었다. 반격의 기회를 포착한 고구려군이 지리적 이점을 살려 게릴라전을 펼쳤고 대대적인 역공을 당한 위나라군은 결국 부득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물러난 경로가 흥미롭게도 낙랑이었다. 이 낙랑은 한반도 내의 옛 낙랑 지역이 아니었음은 당시 전황만 살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고구려군의 반격에 시달리던 위나라군이 위험천만하게 백제나 한(韓)의 세력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던 적지로 달아난다는 게 우선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위나라군이 만약 지금의 평양쪽으로 후퇴하였다면 이는 곧 고구려군 입장에서는 적군이 스스로 알아서 덫에 걸어들어간 셈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껏 대방은 대방이라고 명시적으로 다뤄졌던 것을 참고해본다면 위나라군이 달아났다고 한 낙랑은 아마도 당시의 낙랑 본토였던 요동반도의 어딘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처럼 3세기로 접어들면서 공손씨 세력이 재차 옛 낙랑의 남부지역에 대방군을 설치하며 해외원정기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시도는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위나라의 고구려 원정 실패와 함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모든 정황이 불분명하고 흐릿할 따름이지만 그 부정확한 동향 속에서 손에 잡히는 정보들을 새롭게 모아서 정리해보면 이상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후한서, 삼국지, 자치통감, 신증동국여지승람, 관구검기공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