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24

발해와 요동반도

발해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들이 있다. 한번 그 근거가 되는 것들부터 살펴보고 넘어가보자. 가탐(賈耽)의 지리 기록가탐은 8세기 후반에 활동한 당나라의 관료였다. 고구려 유민인 왕사례(王思禮)와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것은 관료로서의 업적보다는 개인적으로 지리학을 무척 좋아해서 관련된 지리책과 지도까지 편찬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저작은 없지만 다행히 의 지리지에 그의 글이 다수 남아 있다. 그렇게 우연찮게 발해에 대한 지리 정보도 그의 글을 통해 일부가 전해진다. 등주(登州, 산동반도 동북쪽 끝)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勺口)에 도착하니 발해의..

탐라, 제주(濟州)의 시작

오늘날 제주(濟州)는 한국의 내륙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비행기를 통해 방문하고 있는 제주, 연간 1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수가 말해주듯 등락은 있을지언정 제주는 꾸준히 애정과 관심을 받아오는 최고의 여행지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제주가 아닌 이보다 2천 년 전의 탐라(耽羅)는 어떠했을까? 아쉽게도 여러 유물들을 제외하면 2천 년 전에는 탐라에 대한 기록조차 남아 있는 게 없다. 3세기의 한반도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인 중국 정사 에는 마한(馬韓) 서쪽의 바다에 주호(州胡)라는 이름의 섬나라가 있었다고 나와 있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제주와 같은 곳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장 확실하게 제주, 그 당시 탐라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와의 ..

연개소문의 아내

679년 1월 29일, 옛 고구려의 격전지 중 하나였던 요동의 신성(新城). 그곳의 요동 전역을 담당하는 안동도후부 관사에서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淵男生, 634~679)이 숨을 거두었다. 이때 겨우 46세였으니 한창 때 나이였는데, 사인은 모종의 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후 9년 만에 다시 요동 땅으로 돌아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통치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나름 열심히 옛 고향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불과 2년 만에 눈에 띄게 악화된 건강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의 뜻을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연남생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당 황제는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큰 공로로 상을 넘치게 받았으니, 은혜로운 임명은 생전에 흡족했으며, 후한 예우로 죽은 뒤에 추증을 하니,..

신라인 석우로, 역사의 희생양이 되다

신라의 제10대 국왕인 석나해(昔奈解, ?~230)가 196년에 즉위하였다. 그가 즉위하게 된 이유는 운명의 장난같은 것이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의 석씨 왕조의 유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그의 할아버지인 제9대 벌휴(伐休)이사금은 전임자인 제8대 아달라(阿達羅)이사금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국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석(昔)씨 왕가는 그렇게 석벌휴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역사는 평화롭게 즉위가 이루어진 것처럼 나와 있으나 아달라이사금의 말년 10년간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왕위가 이어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벌휴이사금은 184년에 즉위하여 196년에 사망하였다. 문제는 그의 두 아들인 태자 석골정(昔骨正)과 둘째 석이매(昔伊買)가 ..

발해는 고구려인가 말갈인가?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국가인가, 아니면 말갈족 최초의 국가일까? 사실 이는 학문적인 질문으로 봐야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정치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 발해에 대해서는 남과 북이 거의 한 목소리로 고구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하며, 러시아에서는 고민 없이 말갈인들의 나라라고 말할 것이다. 이 중에 일본은 유일하게 발해와 영토적으로는 겹치지 않지만, 만주국 시절의 깊은 연관성 때문에 이들도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후대에서 과거로 시간흐름을 역으로 밟아나가는 순간 일종의 경향성, 혹은 고정관념 내지 편견이 생긴다는 점이다. 소위 ‘답정너’처럼 마음 속으로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거슬러 올라가봤자 내가 보고 싶어하..

발해의 후예, 정안국 혹은 올야 이야기

발해는 거란군의 고도의 기동작전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926년 2월 19일에 멸망하였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그렇듯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각지에서 펼쳐졌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의 무수한 활동이 있었겠지만 (거란에 의해 세워진 기미국(羈縻國)인 동거란국(東丹國)을 제외하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발해의 계승국가는 정안국(定安國)이다. 발해 역사를 좋아하는 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구체적인 정보는 놀라우리만치 거의 없다. 심지어 언제 건국되었는지, 역대 국왕들의 계보는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언제 멸망하였는지조차 아무런 정보가 없다. 마치 발해의 역사를 찾아나갈 때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더듬더듬 만져가며 그림을 그려나가야 하듯이, 그 후예인 정안국 역..

후삼국, 발해, 고려... 그 사이의 경계인들

오늘날의 국경선은 상당히 엄격하고 철저하게 관리된다. 국가를 이루는 3대 요소로 통상적으로 영토, 국민, 주권 이렇게 세 가지를 드는데, 실제로 그 중 하나인 영토가 곧 현대 국가들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기에 세계의 온갖 곳에서 땅(혹은 바다까지)을 가지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 고대와 중세 국가들은 어떠했을까? 재밌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선, 즉 선으로서의 국경 구분은 정말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사실 과거에는 선이 아니라 면으로서의 국경지대가 존재했을 뿐 오늘날처럼 국경 검문소같은 두 국가가 딱 마주서서 선을 긋고 관리하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DMZ처럼 너른 중간영토가 일종의 국경선 역할을 하였는데, 이 또한 정확하진 않은 것이 왜냐하면 서로 ..

고려의 서경과 발해유민 이야기

역사서에는 전후 사정과 무관하게 뜬금없이 한 줄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광종(光宗) 25년차의 다음 기록이 그렇다. (974년) 이 해에 서경(西京)의 거사(居士) 연가(緣可)가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이 기사 전에는 과거 합격 기록이, 다음해에는 광종의 사망 기사가 전부이다. 도대체 전후 문맥 상관없이 나와 있는 이 기사에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너무 바로 앞의 상황에 매몰되어서 전체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아예 저 멀리서 현재를 조망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약간 시야를 넓혀서 동시대를 바라보자. 이 무렵 재밌는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미리 약간만 스포하자면 발생 장소는 당시 거란의 요나라 영토로 귀속되어 있던 옛 발해의 부여부(扶餘府)가 있던 곳이다. ..

동방의 베네치아, 백제의 해외 진출

백제의 시작은 부여였다. 처음에는 저 멀리 북부여 출신의 구태(仇台)라는 이가 이끄는 한 일파가 졸본 지역에 정착하였다. 후에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 세력의 남하로 기존 세력인 비류와 온조가 재차 더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삼한 중 가장 강력했던 마한(馬韓) 영토에서도 옛 대방의 땅이라고 불린 북쪽 지역에 처음 정착하였던 것이 백제 역사의 시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초기 역사는 조선시대의 실록같은 자료가 있을 리 없이 때문에 불확실과 혼돈 그 자체이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는 비류의 미추홀과 온조의 위례성의 생존 경쟁에서 좀 더 환경에 잘 적응한 온조 측이 비류의 세력을 흡수함으로써 백제의 역사가 시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도 처음에는 마한의 54개 국 중 하나(이때만 해..

주몽의 진짜 이름은?

의 고구려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高)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여기뿐만 아니라 , 같은 우리쪽 역사서는 물론이고, , , 등 중국측 역사서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또한 그의 이름의 유래 역시 그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하는 까닭에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이 순서는 참으로 이상하다. 태어날 때의 이름이 주몽이었는데, 그 이름이 그가 활을 잘 쏴서 주어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순서가 바뀐 듯한 느낌이다. 그의 이름은 원래 다른 것이었는데, 성장하여 명사수의 자질을 보이자 별칭으로 주몽이 된 것이라는 해석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이름이 주몽으로 정해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