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에는 전후 사정과 무관하게 뜬금없이 한 줄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광종(光宗) 25년차의 다음 기록이 그렇다.
(974년) 이 해에 서경(西京)의 거사(居士) 연가(緣可)가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이 기사 전에는 과거 합격 기록이, 다음해에는 광종의 사망 기사가 전부이다. 도대체 전후 문맥 상관없이 나와 있는 이 기사에는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너무 바로 앞의 상황에 매몰되어서 전체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아예 저 멀리서 현재를 조망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약간 시야를 넓혀서 동시대를 바라보자.
이 무렵 재밌는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미리 약간만 스포하자면 발생 장소는 당시 거란의 요나라 영토로 귀속되어 있던 옛 발해의 부여부(扶餘府)가 있던 곳이다.
(975년 7월) 황룡부(黃龍府)의 위장(衛將) 연파(燕頗)가 반란을 일으켰다. - 요사
이게 무슨 일일까? 연파는 또 누구일까?
(975년 9월) 연파가 올야성(兀惹城)으로 달아나서 지키니… 그 잔당 1천여 호… - 요사
불과 두 달 만에 그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처음 들어보겠지만 올야라는 곳으로 퇴각하였다는 내용이다. 생포된 잔당만 해도 1천여 호가 넘는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사이 발생한 전사자 등을 감안했을 때 봉기 당시만 해도 수천 여 호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이후 그럼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재밌는 것은 그가 이로부터 6년 후에도 멀쩡히 살아 있음이 확인된다.
(981년 7월) 오사성(烏舍城) 부유부(浮渝府)의 발해 염부(琰府)왕… - 송사
염부(琰府)라고 하니 이게 또 누군가 싶겠지만, 연파는 중국어 발음으로 얜포(Yānpō), 염부는 또 얜푸(Yǎnfǔ)로 거의 차이가 없다. 즉 두 이름은 사실 같은 사람의 것이다. 발음만 비슷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니, 크로스체킹을 위해 그의 활동 지역도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연파의 황룡부는 발해 시절 부여부, 즉 중국식 발음으로 푸위(Fúyú)라는 곳이었다. 그리고 염부의 부유부도 마찬가지로 푸위(Fúyú)라는 발음이다. 말 그대로 일치한다. 심지어 연파가 패배 후 몸을 의탁한 올야성(兀惹城)도 오사성(烏舍城)과 동일한 장소이다. 각각 우러(Wùrě), 우셔(Wūshě)로 한끝 차이에 불과하다. 그저 당시 중국인들이 연파측 인사의 발음을 듣고 자기식대로 기록하다보니 발생한 한자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끝으로, 연파 그는 “발해 염부왕”이라는 표현 그대로 스스로 발해인이라고 불렀거나 최소한 주위로부터 그렇게 불린 것이 확인된다. 왜 이것이 중요한지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볼 것이다.
자 이제 이상의 내용을 이번에는 올야성 혹은 오사성으로 표현된 상대방측, 즉 발해유민들의 국가인 정안국(定安國)의 시각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자. 다음은 당시 북방의 강자였던 거란의 요나라와 경쟁관계이 있던 송나라측에 보낸 그들의 국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981년 10월) “정안국왕 오현명(烏玄明)이 말씀드립니다. 저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 발해의 유민으로 (중략) 예전에 거란이 국토를 침입하여 성을 부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피신해 다른 지역으로 가서 겨우 백성들을 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또 부여부(扶餘府)가 앞서 거란을 배반하고 모두 저희한테 귀부하였으니… (후략) 원흥(元興) 6년 10월” - 송사
부여부가 거란에서 발해 유민의 나라인 정안국으로 망명해왔다는 내용인데, 981년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던 곳은 바로 975년 부여부의 연파 딱 그 한 사례뿐이다. 즉 연파는 이로부터 6년 전에 거란에서 부여부(황룡부)를 기반으로 봉기를 일으킨 다음 거란측 정부군에 밀려 올야성 혹은 오사성으로 표현된 정안국으로 망명을 떠나왔고, 정안국에 와서도 여전히 부여부라는 일종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왔던 것이다. 정안국도 발해유민의 국가였고, 연파의 부여부 역시 발해인들이 주축이었던 만큼 언어부터 문화까지 공통점이 많았음은 물론 강대국 거란에 저항하는 약자들이라는 공감대까지도 있지 않았었을까 싶다.
참고로 이 국서의 내용을 참고해서 역산해보면 정안국 국왕 오현명은 아마도 976년에 원흥(元興)이라는 연호를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연찮게도 모든 게 순서에 맞게 된다.
- 975년 7월, 황룡부(부여부)의 연파 봉기
- 975년 9월, 연파의 올야성(오사성) 망명
- 976년, 부여부의 망명정부를 끌어안은 정안국에서 새로운 연호 선포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부여부 세력을 동맹으로 받아들인 정안국은 다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고 인식하고 새로 연호까지 선포한 것이다. 물론 이질적인 존재가 들어옴으로써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약간의 시간차는 있지만 그 여파로 추정되는 기록이 고려측에 남아 있다.
(979년) 이해에 발해인 수만 명이 내투해왔다. - 고려사, 고려사절요
발해인이라고 표현된 것은 부여부 소속 발해인들의 또 다른 일파라는 뜻인지, 혹은 정안국에서의 정권교체와 같은 혼란 속에 발생한 유민들인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수만 명이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일개 집단의 우발적 망명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아마도 시간 흐름상 후자일 확률이 좀 더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정안국에 합류한 이후 연파는 어떻게 지냈을까? 보통은 작은 집에 세들어 사는 순간 그 집 주인과 여러 모로 감정적으로 다투기 마련일 텐데, 의외로 연파의 망명정부는 정안국과 잘 지냈음이 확인된다.
(995년 7월) 올야(兀惹)의 오소도(烏昭度)와 발해의 연파(燕頗) 등이 철려(鐵驪)를 침략… - 요사
여기서의 올야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안국을 말하고 또 오소도는 아마도 오현명의 후계자였던 모양인데, 여하튼 981년에 부여부가 정안국 품에 안겨 있음이 확인된 다음 무려 14년이 더 흘렀음에도 여전히 연파는 정안국 안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지분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2인3각으로 공조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물론 역사는 여기까지이다. 이후의 역사는 발해의 유민으로서가 아닌 올야의 잔존세력으로서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럼 지금까지 살펴본 975년 이후의 연파와 974년에 있었던 서경 연가의 반역 사건은 무슨 연관관계가 있을까?
그 사이에는 또 다른 사건 하나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고려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자.
고려의 신주(信州) 영녕(永寧) 사람인 강전(康戩)은 자(字)는 목우(休祐)이고, 아버지 강윤(康允)은 3대에 걸쳐 병부시랑(兵部侍郎)이 되었다. 강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마침 흘승(紇升)이 거란과 전쟁을 하자 강전은 강윤을 따라 목엽산(木葉山) 아래에서 싸우다가 연달아 화살 2대를 맞았으나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뒤에 거란이 함락시키자 묵두령(墨斗嶺)으로 도망쳐 살다가 다시 황룡부(黃龍府)에 이르러서는 지름길로 고려로 돌아갔는데, 그때까지도 강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개보(開寶) 연간에 강윤이 강전을 빈공(賓貢)으로 따라 보내 국학(國學)에서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후략) - 송사
몇 가지 포인트를 빠르게 살펴보자. 우선 여기서 아버지까지 3대에 걸쳐 병부시랑을 역임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개경이 아니라 서경 거주자였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이 당시 개경 정부는 전통적인 병부(兵部)의 조직명을 병관(兵官)이라고 하였었고, 이것이 다시 (상서)병부로 돌아가는 것은 좀 더 나중인 성종 14년 즉 995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경은 이때까지도 병부가 존속되고 있었으니, 만약 아버지 강윤이 병부시랑이 맞다고 한다면 서경의 직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3대가 같은 직책을 마치 세습하듯이 연임한 것을 보면 관료들간의 자리 경쟁이 치열하였던 개경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하다.
그럼 다음으로 위 기사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어디일까? 흘승(紇升)부터 살펴보자면, 역사를 좀 아는 이라면 곧바로 흘승골성(訖升骨城)이 떠오를 것이다. 맞다, 바로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된 그곳 흘승골성, 다른 표현으로는 졸본(卒本) 또는 홀본(忽本)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거란과 전쟁을 벌인 이들이라면 아들 강전이 함께 한 세력은 곧 명분상 고구려의 계승자들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렀다는 황룡부(黃龍府)는 저 앞부분에서 발해의 부여부라고 불린 곳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럼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언제였을까? 여기서 개보(開寶) 연간은 968년부터 976년까지인데, 이 당시 고려에서 빈공(賓貢) 즉 송나라에서 열리는 외국인 전용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인물을 찾으면 이는 쉽게 풀린다.
(976년) 김행성(金行成)을 송나라에 보내 국자감(國子監)에 입학시켰다.
(977년) 김행성이 송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 고려사
즉 이 무렵 고려에서 빈공으로 떠난 것은 김행성이었고, 그가 떠난 시점은 정확히 976년이다. 개보 연간의 마지막 해에 강윤도 그를 따라서 송나라로 유학을 간 것이 확실하다.
이상의 정보를 바탕으로 내용을 정리해보면, 강윤과 강전 부자는 976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발해유민들이 거란과 전쟁을 벌일 때 참전하여 이들을 지원해주었고, 결국 패하자 옛 발해 부여부를 거쳐 고려로 돌아왔고, 976년에 아들 강윤은 송나라로 유학을 떠났다는 시간 흐름이다.
그럼 이 당시 발해유민이 거란과 벌인 전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딱 하나가 있다. 심지어 부여부가 배경이 되었던 바로 975년 발해인 연파의 봉기가 그것이다. 돌고돌아서 모든 일은 연결된다.
여기서 앞서 정리했던 사건의 흐름들에 다시 연가의 기사까지 덧붙여보자.
- 974년, 서경의 거사 연가가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였다.
- 975년 7월, 황룡부(부여부)의 연파 봉기 / 이때 고려 서경 출신의 강윤과 강전 부자도 참전
- 975년 9월, 연파의 올야성(오사성) 망명 / 패전 후 강전은 고려로 귀국
- 976년, 부여부의 망명정부를 끌어안은 정안국에서 새로운 연호 선포 / 강전은 송나라로 유학
서경의 거사라고 표현된 ‘연가’는 한자만 다를 뿐 ‘연파’와 거의 같은 발음이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추정일 수밖에 없지만 이 둘 사이에는 발해유민이라는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지 않았었을까 짐작된다.
거사(居士)라는 용어 자체도 주목해볼 만한데, 이를테면 궁예에 대한 쿠데타도 어떤 거사가 비밀 글이 쓰인 거울을 왕창근(王昌瑾)이란 당나라 상인에게 넘기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거사에는 종교적 의미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아마도 이 당시 거사라고 하면 일종의 사회운동가의 성격도 있지 않았었을까 싶다.
짐작컨대 연가라는 거사는 연파의 일족 혹은 일파로서 고려의 서경에 와서 발해유민의 대거란 봉기에 가담할 자들을 모으고자 하였던 인물이었는데, 당시 광종은 중앙집권화된 고려왕조를 만들기 위해 막판까지 내치에 집중하던 와중이었기에, 불필요하게 분란을 조장하는 그와 같은 외부인은 과감히 제거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명목이 반역죄였던 것을 보면 국내의 이익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일, 심지어 외국과 관련된 사건에 내국인들을 동원하려고 하였던 상황을 그렇게 표현하였던 것은 아닐까 싶다.
여하튼 고려 우선주의를 천명하던 광종이 975년 5월에 사망함으로써 이제 서경도 외부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그 덕분에 강윤과 강전 부자도 975년 7월에 황룡부에서 발발한 발해유민들의 봉기에 뛰어들 수 있었으리라. 왜 이들이 과감히 외국의 전쟁에 참전할 작정을 하였는지 조금만 열어놓고 생각해보면, 고려의 서경인들 사이에서는 발해유민들과 교류가 이어지는 어떤 루트가 있었거나, 혹은 옛 발해의 지역이었다보니 스스로 발해유민들과 공감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았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는 역사의 미스터리이다.
길게 돌아왔지만 작은 역사기록 하나에도 거시적인 관계 속에서 그 전후 맥락을 읽다보면 무언가 연결고리를 찾을 때가 있다. 결국 핵심적인 부분은 심증뿐이고 이를 입증해줄 유물같은 결정적 증거는 찾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역사는 가능성의 학문이기에 작은 실마리 하나에서 시작하여 역사의 비어 있는 틈새를 조금씩 메꿔나감으로써 좀 더 그 실체에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참고자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요사, 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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