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주몽의 진짜 이름은?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2. 19. 11:39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高)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여기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제왕운기>같은 우리쪽 역사서는 물론이고, <위서>, <주서>, <북사> 등 중국측 역사서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또한 그의 이름의 유래 역시 그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하는 까닭에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이 순서는 참으로 이상하다. 태어날 때의 이름이 주몽이었는데, 그 이름이 그가 활을 잘 쏴서 주어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순서가 바뀐 듯한 느낌이다. 그의 이름은 원래 다른 것이었는데, 성장하여 명사수의 자질을 보이자 별칭으로 주몽이 된 것이라는 해석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이름이 주몽으로 정해진 것은 나중이었음을 <위서>, <북사> 등의 기록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는 성장하여 자(字)를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즉 그의 이름 주몽은 나중에 커서 붙인 이름일 뿐이다. 실제로 그의 이름은 수많은 출처에서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일종의 공통점은 있다. 그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추모(鄒牟)이다. 특히 고구려 당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금석문에서는 추모가 압도적으로 등장한다.

 

<광개토왕릉비> 시조 추모(鄒牟)왕이 나라를 개창하였다. 북부여에서 태어났는데, 천제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모두루 묘지> 하백(河泊)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鄒牟)성왕은 본래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
<지안 고구려비> 시조 추모(鄒牟)왕이 나라를 개창하였다. ○○의 아들이고 하백(河伯)의 자손으로 …

 

광개토대왕비(replica) - 독립기념관

 

여기까지만 보면 고구려의 시조는 사실 본명이 추모가 맞고, 나중에 명사수의 별칭으로서 주몽이 붙게 된 것으로 쉬이 짐작할 수가 있다. 즉 이때까지 우리가 그를 고주몽이라고 부른 것은, 비유하자면 퇴계 이황을 이퇴계라고 부른 것과 비슷할 것이다. 따라서 고주몽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크게 틀리진 않지만 사실 그의 본명은 추모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되겠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는 고구려 계통의 기록을 비롯해 후대의 우리들까지 모두 고주몽으로 알게 된 것일까? 여기서의 힌트는 중국측 기록일 듯하다.

 

<위서>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라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로 …
<주서> 고구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갈라져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시조는 주몽(朱蒙)인데, 하백(河伯)의 딸이 햇빛에 감응되어 잉태하였다’고 한다.

 

즉 이를 보면 고구려인들이 대중국 외교과정에서 자신들의 선조 이야기를 할 때 주몽(朱蒙)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을 고유명사로서 감히 그의 본명으로 부르지 않고 고구려어로 보통명사인 주몽으로 대신하여 호칭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저 비유하자면 이황을 존경하기에 그를 함부로 본명인 이황이라고 부르지 않고, 대신에 존경의 의미로 그의 자(字)인 퇴계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 <제왕운기>에서는 그의 시호를 동명(東明)이라고 하였고, 또 <삼국사기>에서도 그의 사후에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불렀다는 기사가 전해진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인용된 옛 기록인 <고전기(古典記)>에서도 그를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지칭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문제는 시호가 정말로 동명으로 정해졌다면 후대의 고구려 자체 기록에서 그를 주몽이든 추모든 이름이 아니라 동명이라고 부른 게 확인이 되어야 하는데, 앞서 당시 금석문 기록들을 미리 보았지만 그는 어느 곳에서도 동명왕으로 불리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글에서 미리 살펴보았지만, 사실 동명은 부여의 시조 이름이었다. 나중에 고구려 자체적으로 왕가의 역사를 재정비하면서 부여의 신화를 많이 참고하였던 점이 밝혀져 있는데, 아마도 그 과정에서 동명을 추모의 시호로 일종의 기록 조작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앞서의 고구려 금석문들의 시대는 모두 5세기 초로 역사 재정비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것들이라는 점도 참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부여의 건국신화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비교해보면 고유명사 일부를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판박이임을 알 수가 있다.

 

부여 고구려
처음에 북이(北夷)의 고리국 왕이 외출 중에 시녀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이 돌아와서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였다.
“지난번 하늘에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있어 저에게로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리고는 임신이 되었습니다.”
왕이 그녀를 가두었는데, 후에 아들을 낳았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로 부여왕에 의해 방에 갇혀 있던 중, 햇빛이 비치는 것을 몸을 돌려 피하였으나 햇빛이 다시 따라와 비추었다. 얼마 후 임신하여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굿간에 옮겼으나 말도 역시 그와 같이 해주었다. 왕이 그 아이를 신비롭게 여겨 그 어머니가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왕이 그 알을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나 말들이 피해 다녔다. 뒤에 들판에 버려 두었더니 뭇새가 깃털로 그 알을 감쌌다. 왕은 그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 없게 되자, 결국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그 어머니가 다른 물건으로 이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그의 용맹함을 꺼리어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그가 성장하여 이름(字)을 주몽(朱蒙)이라고 하니, 그 나라 말로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그를 없애 버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에게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주몽은 좋은 말은 먹이를 줄여 마르게 하고 굼뜬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 사냥할 때 주몽에게는 활을 잘 쏜다고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지만, 주몽이 비록 화살은 적어도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그를 죽이려 모의를 꾸미자, 주몽의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주몽에게 말해주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동명은 그걸 밟고 물을 건너서 부여(夫餘)에 도착하여 왕이 되었다. 주몽은 이에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 고하였다.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길에 추격하는 군사가 바짝 쫓아오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그러자 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 올라와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써 성을 고(高)씨라 하였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광개토대왕비, 모두루 묘지, 지안 고구려비, 위서, 주서, 북사, 일본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