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보장왕, 고구려와 발해 그 사이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2. 16. 09:23

   668년 가을 9월, 드디어 당나라의 원정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포위한 지 한 달도 넘게 걸려 가까스로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정군의 실력이라기보다는 고구려의 내부 분열이 더 큰 원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666년에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 맏이 연남생(淵男生, 634~679)에 대항해 둘째와 셋째 아들이 평양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이번 전쟁을 야기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둘째와 셋째가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인 보장왕(寶藏王) 고장(高臧, ?~682)을 붙잡고 평양성에 틀어박혀 최후의 저항을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평양성 포위가 한 달이 넘었을 때 이제는 패전이 확실해졌다고 판단한 보장왕이 셋째 연남산(淵男産, 639~701)을 설득해 수령 98명과 함께 백기 투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둘째 연남건(淵男建, ?~?)은 보장왕의 항복 선언에 반대하며 끝까지 결사항전을 고수했다. 당시 연남건은 승려 신성(信誠)을 대장으로 임명해 총지휘를 맡기고 있었는데, 그 역시 이미 내심 보장왕과 마찬가지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는 권력자 연남건의 눈치를 보면서 소장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을 비밀리에 원정군측에 보내 투항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5일 후 신성이 결국 성문을 열어주자 원정군은 성내로 난입하여 저항 중이던 고구려군을 일괄 제압하였다. 연남건은 다급한 나머지 자살 시도를 하였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렇게 성은 함락되었고 보장왕과 연남건 등은 모두 생포되었다.


   이상의 사태를 정리하고 본국으로 금의환향한 원정군 지휘부는 12월에 포로들을 이끌고 황제에게 승전 보고를 하였다. 이 당시 당나라 황제였던 고종(高宗) 이치(李治, 628~683)의 전후 처분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갑작스레 즉위한 탓에 국정을 직접 책임지지 않았던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였고, 연남산은 막판에 항복을 한 것이 정상 참작되었으며, 승려 신성은 마지막에 원정군에 적극 협조한 것을 공로로 인정받았다. 연남생과 그의 아들 연헌성(淵獻誠, 651~692)은 아예 처음부터 당나라 원정군에 종군한 것이 커다란 공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끝까지 저항한 연남건만큼은 전범으로 확정되어 검주(黔州, 지금의 쓰촨성 지역)로의 유배형에 처해졌다.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 그의 묘지명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7백 년 역사는 이렇게 668년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전후의 공식 집계로 고구려의 총 가구수는 69만7천 호였다고 하니 대략 350만 명의 백성들은 이로써 조국을 잃은 난민이 되고 말았다. 정복자인 당나라측은 고구려의 영토와 남은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역마다 고구려 출신을 관리자로 배치하였다. 물론 그냥은 아니었고 감시자 격으로 당나라 사람들이 함께 파견되었다. 그렇게 고구려라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제 평양에 새롭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설치되면서 당나라의 식민지배 시대가 열렸다. 첫 번째 안동도호로는 대장군 설인귀(薛仁貴, 614~683)가 임명되었다. 그는 2만 명의 병력을 휘하에 거느리고 옛 고구려 지역의 안정을 위한 통치를 시작하였다.

안동도호부(빨간색 점이 요동성) - Wikipedia

 

   하지만 식민통치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7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자존심 강한 고구려인들이 결코 쉽게 정복군에게 마음을 열 리 없었다. 당장 보장왕의 외손이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安勝)이 바로 다음 해인 669년 2월에 4천 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아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달 후인 4월에 당나라는 고구려의 전체 인구 중 약 5% 남짓한 3만8천 가구를 중국 각지로 분산 배치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당연히 식민지의 힘을 빼고 본국의 국력은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지켜보던 고구려인들은 이제 각자 칼을 빼어들었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과 최전방 지역들이 당나라에 무너진 것일 뿐 고구려 전역이 점령군에 의해 무장해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대표격인 인물 두 명을 꼽자면 태대형(정2품) 고연무(高延武)와 대형(정5품) 검모잠(劍牟岑)이 있다. 전자는 1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신라와 연합군을 구축하여 당나라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또 후자는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안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새 국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당나라 정부는 토벌군을 편성을 결정하고는, 대장군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을 각각 지휘관(行軍總管)으로 임명하여 즉각 파병하였다. 이에 겁먹은 안승은 자신을 추대해준 검모잠을 버리고 신라로 달아나버렸다.


   고간은 671년 가을 7월에 안시성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였다. 또 다음 해 12월에는 백수산(白水山)의 성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패배시켰다. 이때 신라에서도 이들을 돕기 위해 지원병력을 파견하였지만, 역시 고간에게 패하여 2천 명이 생포되기도 하였다.


   속말말갈 출신으로 유명한 이근행도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673년 여름 무렵에 그도 호로하(瓠濾河)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다수의 포로를 잡아들였다. 이에 패잔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신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고구려 부흥운동은 공식적으로는 4년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이 고구려 재건이라는 당초 목표에는 실패하였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부흥군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까닭에 당나라 정부는 크게 두 가지 조치를 취하게 된다. 첫 번째는 식민지배의 거점이었던 안동도호부를 평양이 아니라 더 북쪽인 요동 지역으로 옮겨야 했던 것, 두 번째는 강압적 통치를 접고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덕분에 신라는 당나라와 척을 지고 나당전쟁을 벌일 때 고구려 유민들을 우대하며 하나로 합심하게 만드는 부수적 효과까지도 있었다.


   여하튼 당나라는 골치아픈 옛 고구려 지역의 통치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저항적인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같은 고구려인 지배자가 필요하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렇게 첫 번째 타자로 선택된 이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 보장왕이었다. 평양성이 함락될 때 연남산과 함께 먼저 항복해온 바로 그 인물이다. 677년 2월의 어느 봄날, 그는 그렇게 해서 고구려 국왕이라는 기존 타이틀은 떼어내고 새롭게 요동주의 도독 겸 조선군의 군왕으로서 요동 땅을 다시 밟았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추가적인 선물이 주어졌는데 다름 아닌 8년 전 중국 각지로 강제 이주당했던 고구려 유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준 것이었다.


   그가 새 터전으로 자리잡은 곳이 직전까지 안동도호부가 있던 요동성이었다. 그리고 안동도호부는 자연스럽게 그보다 동북쪽에 있던 신성(新城)으로 옮겨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동시에 연개소문의 첫째 아들인 연남생도 안동도호로서 안동도호부, 즉 신성으로 부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둘이 옛 고구려 영토인 요동 지역에 동시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물론 그럴 만한 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당나라 정부에서 이 둘을 한 팀으로 힘을 합쳐 고구려 땅을 잘 다스려보라고 보내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둘을 서로 경쟁을 붙임으로써 지역 통치를 꾀한다는 아주 얄팍한 술수가 작동한 것이었다.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좋든 싫든 한동안은 당나라 정부의 생각대로 되었던 것 같다. 다만 이 둘 사이의 상호 견제에 따른 긴장 관계가 깨지는 것은 그 중 한 명이 자연스럽게 경쟁에서 이탈하게 됨으로써였다. 바로 연남생이 679년 1월 29일에 신성에 있던 안동도호부 관사에서 46세의 나이로 병들어 사망한 것이다.


   그러자 일종의 감시가 풀리게 된 보장왕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은 그에게 그렇게 부추긴 이들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와 접촉한 자들은 의외로 말갈인들이었다. 기록이 소략한 까닭에 구체적으로 특정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단순히 그냥 말갈이 아니라 아마도 고구려의 구성원이었던 이들이었을 것이고 이들의 목표 역시 당연히 고구려의 재건이었을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하지만 동족의 감시는 풀렸을지 몰라도 보장왕은 주변 한족의 감시까지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갈인들과 모종의 반란을 꾀한다는 첩보가 당나라 정부에 들어간 것은 681년의 일이다. 그는 즉각 본국으로 소환되어 저 멀리 지금의 쓰촨성 지역인 공주(邛州)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유주도독 혹은 조선군에 소속되었던 주민들 역시 다시 중국 각지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다. 그나마 가난하고 허약한 사람들은 안동성(安東城, 이 당시 신성) 부근에 잔류할 수 있게 해준 걸 감사히 여겨야 했을 것이다. 물론 이 와중에 신라나 돌궐, 그리고 말갈까지 달아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서의 말갈은 아마도 보장왕이 컨택하고 있던 고구려 재건 세력이었지 않았었을까 싶다.


   이들의 존재는 의외로 《삼국유사》에 간접적으로 또 남아 있다. 시간은 좀 더 흘러 693년 3월에 1천 명이나 되는 신라 화랑들이 강원도 언저리에서 출발하여 북명(北溟) 지역까지 유랑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함경도 남부의 원산만 부근쯤에서 화랑의 리더인 국선(國仙)이 말갈인(狄賊)들에게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5월에 탈출에 성공하여 신라로 돌아와서 진술한 내용이 상당히 흥미롭다. 짧게 말하면 그 나라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다는 것인데, 말갈인 사회를 나라(國)라고 표현한 것도 그렇고 하필 그들의 리더가 발해 왕족과 마찬가지인 대(大)씨로 표현된 것도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1천 명이나 되는 화랑 집단이 자신들의 리더를 빼앗길 정도였으면 상대방의 규모는 그 이상 훨씬 컸으리라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때가 발해 건국 5년 전이었으니 아직은 여전히 고구려 부활을 준비하던 시점으로 보아야 할 텐데, 보장왕과 적극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세력이라면 규모도 어느 정도 되었을 게 분명하니 혹 그 대상이 된 것이 이들은 아니었을지 추정해볼 수 있을 듯하다. 나중에 발해 건국이 시작되는 곳은 보장왕의 통치지역 서쪽인 영주(營州, 랴오닝성 서쪽의 차오양)이고, 그곳의 주축 세력은 다름 아닌 고구려 유민 그리고 대(大)씨를 성씨로 한 (속말)말갈인들이었다. 보장왕이 컨택하던 말갈 세력과 한반도 북부까지 뻗어 있던 대씨 집단이 만나는 지점이다.


   어쨌거나 유배 중이던 682년에 보장왕은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곧장 당나라 수도로 옮겨져 동돌궐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힐리 가한의 무덤 왼쪽에 묻혔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장왕 역시 한 국가의 마지막 통치자였다는 점을 감안한 조치였다.


   그의 빈 자리는 곧 다시 메꿔졌다. 이번에는 그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이 686년에 조선군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698년에 대장군으로 진급하면서 다시 명칭이 변경되어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임명되었지만, 그에게 안동도독부를 통치하게 한다는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대신 이듬해인 699년에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안동도독이 되었다. 그런데 똑같이 보장왕의 아들로 고련(高連)이라는 인물이 조선군왕 혹은 안동도호를 역임하였다는 복수의 금석문 기록으로 비추어보면 고덕무와 고련은 사실 동일인물이지 않았을까 싶다. 덕무(德武)가 한자 스타일의 이름인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자(字)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쨌거나 역사상 고구려인으로서 당나라의 식민 지배를 대리하였던 것은 그가 마지막이었다. 이제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옛 안동도호부가 다스리던 지역은 바로 전해에 건국된 발해가 차츰 잠식해나가게 된다. 역사는 이렇듯 언제나 돌고 돈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당서, 구당서, 연남생(634~679) 묘지명, 연남산(639~701) 묘지명, 연헌성(651~692) 묘지명, 고씨부인(731~772) 묘지명, 고진(701~773) 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