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을지문덕 그리고 요동전쟁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2. 12. 15:26


   598년 2월의 아직 한창 추운 겨울 어느 날, 고구려 장수가 지휘하는 말갈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수나라의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였다. 이는 갑작스런 게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고구려에서는 수나라가 마지막 남은 남진(陳)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중원을 통일한 것에 충격을 받고 무기를 정비하고 식량을 축적하면서 외침에 대비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선왕의 뒤를 이어 제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7) 고원(高元, ?~618)은 반복적인 사신 파견을 통해 수나라의 내실을 염탐하면서 이들의 역량을 확인해왔는데, 동시에 그에 대응하여 갈고닦으며 준비해온 고구려의 실력을 한번 확인해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사실 2백 년 넘게 이어진 중국의 분열 상황은 주변국들에게는 무척 유리한 환경이었다. 중원의 대국이 내부 이슈로 인해 외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이 통일되는 순간 그 응집되는 힘은 반드시 밖으로 향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고구려를 포함하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었다. 이때의 요서 공격도 그에 대한 사전 포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습을 당한 수나라에서는 영주총관(營州總管)이 고구려 침공군 격퇴에 나섰는데, 그렇다면 이때의 고구려군은 영주 곧 오늘날 랴오닝성의 서쪽 끝자락인 챠오양(朝陽) 인근까지 진격해갔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가 있겠다. 비록 고구려군은 퇴각하고 말았지만 수나라에 고구려의 이름 세 글자를 각인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당대의 초강대국 수나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 문제(文帝, 재위 581~604) 양견(楊堅, 541~604)이 같은 해 6월에 총 30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보복공격을 감행하였으니 정말 급하게 서둘렀던 모양이다. 그래서였는지 육군은 여름 장마에 전염병으로 고생을 해야 했고, 해군은 폭풍우를 만나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결국 3개월 만에 이들 원정군은 회군할 수밖에 없었는데, 충격적인 것은 사망자 비율이 무려 8~90%였다고 하는 사실이었다. 대규모 원정 치고는 양측의 전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의심한 신채호(申采浩)는 다른 기록을 찾아서 고구려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해전에서 승전한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제1차 수-고구려 전쟁(598) - Wikipedia


   어쨌거나 나중에 고구려가 자세를 낮추어 관계를 회복하기는 하였으나 한 번 박힌 미운털은 그렇게 쉽게 빠지지 않는 법이다. 사건은 엉뚱하게도 타국인 돌궐에서 일어났다. 새로 즉위한 수 양제(煬帝, 재위 604~618) 양광(楊廣, 569~618)가 607년 8월에 돌궐의 군주 계민가한(啓民可汗)을 국빈방문하였다가 그곳에서 마침 돌궐을 방문 중이던 고구려 사신과 마주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수 양제는 그 자리에서 고구려 왕에게 자신을 직접 찾아올 것을 요구하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 고구려를 무너뜨리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당연히 자존심 강한 영양왕이 굳이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수나라까지 직접 찾아갈 리가 없었다. 결국 수 양제는 참지 못하고 611년 2월에 드디어 고구려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 영양왕의 방문 여부는 사실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실패했던 고구려 원정을 자신은 분명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4월에 그는 직접 탁군(𣵠郡, 오늘날 베이징과 허베이성 일대)으로 이동하였다.


   모든 부대가 다 집결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해가 바뀌어 612년 봄 1월에야 모든 부대가 탁군에 집결할 수 있었다. 공식기록상으로는 모두 1,133,800명이나 되었다는데, 여기서 한 번 더 부풀려서 대외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 하였다. 여기에 군량수송 등 지원부대는 그 배가 되었다고 하니, 실질적으로 약 3백만 명 이상이 동원된 셈이었다. 그리고 각 군마다 지휘관인 상장(上將) 혹은 대장 1명과 부지휘관인 아장(亞將) 1명씩을 임명하였다.

좌 12군 우 12군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莬),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점제(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𦖮), 대방(蔕方), 양평(襄平)


   다만 총동원한 병력 수는 수나라측의 블러핑(bluffing)이 들어간 수치라고 봄이 맞겠다. 위의 숫자를 그대로 계산하면 1군당 전투병력만 해도 4만7천 명이 넘는다. 하지만 얼마 후 이 중 9군이 평양성 공격에 나서게 될 때 이들의 전투병력이 10만 가량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1군당 실제로는 1만 명 남짓이 되는 셈이다. 또한 1군당 기병 4천 명과 보병 8천 명으로 구성되었다는 기록도 있어서 계산해보면 1만 명 좀 넘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해군도 별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오늘날 산동반도 아래 지역인 강회(江淮) 출신 병사들을 중심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패수(浿水, 지금의 대동강)로 향하는 부대가 그것이었다.


   워낙에 숫자가 많다보니 매일 1군씩 출발하였고, 적절히 서로 간의 거리를 약 16km씩 두게 하였다. 그렇게 차례차례 출발하자 거진 한 달 만에 겨우 다 출발을 완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두부터 후미까지 총 길이만 해도 거의 4백 km에 달했다. 황제의 친위군은 6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30km는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2개 군 가까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이 어찌다 대단했던지 당시 역사서에는 이때의 장관을 다음과 같이 한 줄로 표현하였다.

근래 들어 군대의 출정이 이처럼 성대했던 적이 없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수도 평양이었다. 중간에 고구려의 요서 지역 전진기지인 무려라(武厲邏)를 함락한 후 모든 부대가 당시 고구려와의 국경선이었던 요수(遼水)에 모인 것은 한 달 만인 612년 2월의 일이었다. 수많은 부대가 모두 강에 접근해 진영을 꾸리다보니 멀리서 보아도 숨막히는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제는 그 수많은 병사들을 어떻게 도강시키느냐였다. 고구려군이 이미 철저히 요수를 방비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수 양제는 공부상서(工部尙書, 종3품) 우문개(宇文愷)에게 요수의 이쪽편 둔덕에서 미리 부교(浮橋)를 총 3개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작업이 끝나자 그것을 끌고 가서는 요수 반대편 둔덕에 대도록 하였는데, 거리를 잘못 잰 탓에 길이가 부족했다. 이를 지켜본 고구려군이 수나라군을 막아섰다. 공격하는 측에서는 용감하게 물에 뛰어들어 요수를 건너려고 하였지만, 고구려군이 유리한 위치에서 속도가 현격히 떨어진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셈이 되어서 공격측의 무수히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일반 병사들뿐만 아니라 맥철장(麥鐵杖),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 부지휘관급들도 수없이 희생당했다.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다보니 수나라군은 부교를 끌고 강 서쪽 둔덕으로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 양제가 이번에는 소부감(少府監, 종3품) 하조(何稠)에게 다리를 연결하는 작업을 지시하였고, 그는 불과 이틀 만에 이를 완성하였다. 이번에는 강 동쪽 둔덕까지 닿아 수나라군이 드디어 요수를 건널 수가 있었다. 치열하게 방어하기는 하였지만 고구려군도 저들의 물량공세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수나라군은 드디어 요동성(遼東城, 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시)까지 진군하여 집결하였고, 수 양제 역시 마지막으로 전선에 당도하였다. 그는 이를 기념하여 전국적인 사면령과 함께 형부상서(刑部尙書, 정3품) 위문승(衛文昇)을 통해 요서 지역에 대해 10년간 조세 면제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고 그곳에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 두 곳을 새롭게 설치하도록 하였다.


   한창 뜨거운 여름인 5월에 드디어 수나라군은 요동성 포위 공격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나라군을 통솔하는 황제 자신이었다. 수 양제는 지휘관들에게 이렇게 명하였다.


   “모든 작전의 실행과 중지는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의사결정 받도록 하라.”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는 장수는 전장에 나가면 왕의 명령도 듣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곳에서는 아예 황제 자신이 전장에 나와 있다보니 지휘관들에게는 작전 수행에 있어 자율권이라곤 전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동성의 고구려 수비군은 성을 나와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불리하면 다시 성 안에서의 방어로 전환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가 있었던 반면, 수나라군은 독점적인 지휘구조 때문에 매번 지연된 의사결정으로 적시적소에서의 대응이 아예 불가능한 처지였다.


   수 양제는 전군에게 요동성 공격을 명하는 한편으로 추가적인 지침도 내렸는데, 이것이 또 지휘관들의 발목을 잡았다.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받아들이고, 멋대로 병사들이 쳐들어가게 두지 말라.”


   이 명령만큼은 고구려측에서도 정보를 취득하였던 모양이다. 자칫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할 때면 고구려군은 갑자기 항복하겠다고 했고, 황제의 지침 때문에 지휘관들이 공격을 멈추고 보고를 올린 다음 의사결정을 받아 돌아오면 이미 요동성은 다시 재정비가 되어 있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모두가 이것이 문제임을 알고 있었지만, 수 양제 본인만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던 중 6월의 어느 날, 수 양제는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벽과 해자의 실태를 살펴보고는 지휘관들을 불러모아놓고 불같이 화를 냈다.


   “그대들은 스스로 높은 관직에 좋은 집안을 믿으면서 나는 상식도 부족하고 허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수도에 있을 때 다들 내가 전장에 오지 않았으면 하였던 것은 이렇게 문제점이 들통날까 두려워서였던 거였소. 내가 지금 여기에 와본 것은 바로 그대들이 하는 일을 보고 곧 그대들의 목을 베고자 함이오. 그대들이 지금껏 죽음을 두려워해 온힘을 다하지 않는 것은 내가 진정 그대들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황제의 호통에 지휘관들 모두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 순간뿐이었다. 이렇게 윽박지른 다음 수 양제는 요동성 서쪽에 설치한 행궁에 가서 머물렀고, 여전히 고구려는 요동성을 굳건히 지켜냈다.

 


   이 무렵 수나라군은 전략 방향에 체계가 없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당시 이들은 요동성 공방전 외에 크게 두 가지 작전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다. 하나는 해군을 통한 고구려의 수도 진입이었고, 또 하나는 육로로 우회하여 평양성을 직접 타격하는 안이었다. 이 둘은 원래 계획에 따르면 서로 별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실제 진행과정을 보면 서로의 욕심이 앞서서 각자 따로 움직였고, 그것은 곧 상대방인 고구려군에게는 탐스러운 먹잇감이 되어주었다.


   우선 수나라 해군부터 살펴보자. 요동성 앞에서 육군 부대가 고전하던 당시 대장군 내호아(來護兒)는 해군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우회해 패수(浿水)에 도착하였다.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서 20여 km 떨어져 있는 곳에서 고구려군과 조우하였는데, 첫 번째 전투에서부터 수나라 해군이 승전을 거두었다. 쾌재를 부른 내호아는 승세를 탔다고 믿고는 전공을 독차지할 욕심에 자신이 직접 평양성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훨씬 더 이성적이었던 부지휘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흥분해 있던 그를 만류하였다. 다른 부대가 오고 있으니 기다렸다가 함께 평양성 공격에 나서자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이미 욕심에 눈이 먼 내호아는 조언 따위는 듣지 않고 정예군사 4만 명을 대동해 곧바로 평양성 아래까지 진군해 갔다.


   이때 고구려군을 이끌고 있던 지휘관은 고건무(高建武)로, 현 국왕인 영양왕의 동생이었다. 그는 평양성 내부의 비어 있는 사찰에 군사를 매복시키고는, 따로 군사를 밖으로 내보내 수나라군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배한 척 성으로 도망쳐 오게 하였다. 내호아도 이들을 추격하여 성 안까지 진입하였고, 이제 다 이겼구나 싶었던지 금새 약탈에 빠져 대오가 흐트러졌다. 그때 매복해 있던 고구려군이 갑자기 나타나 역습에 나서자 당황한 내호아와 병사들은 모두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내호아 자신은 가까스로 포로로 붙잡히는 것만 피했을 뿐, 휘하 병사들 중에 함대까지 돌아간 것은 불과 수천 명 수준이었다. 생환률로 치면 10~20%였으니 그로서는 치욕적인 대패였다. 고구려군이 수나라 함대가 있는 곳까지 추격해 갔으나, 후방에 남아 있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맞아싸울 준비를 하자 확전은 그만두고 평양성으로 퇴각하였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내호아는 해안가에 주둔한 채 육로로 우회 중인 부대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제2차 수-고구려 전쟁(612) - Wikipedia


   그 사이 육군 부대도 압록강변에 집결하여 진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체 24군 중 7군과 수성과 증지 방향의 2군이 더해져 총 9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총병력은 무려 30만5천 명이었고, 그 중 전투병력만 해도 10만 명이나 되었다. 수나라 원정군 전체의 30%를 오롯이 평양성 공격에 투입한 셈이었다.


   이때 현실 감각이 떨어졌던 지휘관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출발 전 병사들 각자에게 100일치 군량과 온갖 무기를 지급하게 하였다. 이에 도무지 짊어지고 행군할 체력도 의지도 없던 많은 병사들은 그나마 눈에 띄지 않는 군량을 몰래 땅속에 묻어버리는 식으로 잔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이 때문에 나중에 수나라군은 전체 거리의 절반 정도 행군했을 때 이미 군량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좌 12군 소속 우 12군 소속
요동(遼東)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荊元恒) 갈석(碣石)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
현도(玄莬)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 양평(襄平) 우어위장군 장근(張瑾)
부여(扶餘)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    
옥저(沃沮) 우익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    
낙랑(樂浪) 우익위대장군 우중문(于仲文)    

   * 이외에 수성(遂城) 방면의 탁군태수(涿郡太守)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 증지(增地) 방면의 검교우어위호분랑장 위문승의 2군이 추가됨


   여하튼 당시 평양성 수비는 고건무가 전담 마크를 하고 있었다면 고구려군 전체의 총지휘는 대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맡고 있었다. 대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전의 국상(國相) 또는 당시 대대로(大對盧)라는 고구려의 최고위 관직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정보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출생년도는 물론이고 어디 출신인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심지어 이 전쟁 이후의 동향마저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신이라는 설도 있긴 하지만 후대의 기록이어서 신빙성은 높지 않다. 그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따로 다뤄볼 예정이다.


   어쨌거나 이때 을지문덕은 영양왕의 명으로 고구려의 항복 의사를 전한다는 핑계로 수나라의 9군 진영이 있던 압록강을 직접 방문하였다. 하지만 본래 의도는 수나라 원정군의 내부 상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9군의 리더격이었던 우중문은 미리 받았던 수 양제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아라.”


   그래서 당연히 우중문은 그를 포로로 붙잡으려고 하였는데, 위무사(慰撫使)로 참전 중이던 상서우승(尙書右丞, 정4품) 유사룡(劉士龍)이 극구 말렸다. 거기에 설득되어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해주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차 싶었던지라 얼른 사람을 그에게 보냈다.


   “다시 논의할 게 있으니 돌아오시오.”


   이미 눈치를 챈 을지문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가버렸다. 여담이지만 그의 생포를 막아섰던 유사룡은 종전 후에 사형을 당하게 된다.


   여하튼 행군을 개시한 수나라의 9군은 을지문덕을 놓친 게 계속해서 찜찜했다. 더욱이 부대의 군량이 점점 떨어져가는 게 눈에 보이자 우문술은 그냥 회군하는 게 어떨지 넌지시 말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우중문은 생각이 달랐다.


   “정예 병력으로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반드시 공을 세울 수 있소.”


   우문술이 재차 만류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우중문이 노발대발하며 따지듯이 달려들었다.


   “장군은 10만 병력을 거느리고도 얼마 되지 않은 적군조차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뵐 수 있겠소? (중략) 결정권이 한 명에게 있어야 제대로 공도 이룰 수가 있고 또 명성도 얻을 수가 있는 법이오. 지금 우리들끼리도 이렇게 각자 생각이 다른데 어찌 적을 상대로 일치단결하여 싸울 수 있겠소?”


   처음에 황제가 우중문에게 계획이 있다고 하여 여러 군대에게 그를 중심으로 지휘체계를 구성하도록 하였었는데, 우중문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그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니 우문술도 결국 우중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중문의 지휘 하에 9군은 본격적으로 을지문덕 추격에 나섰다.


   한편 을지문덕은 수나라군이 허기로 기력이 빠져 있음을 간파하고는, 오히려 그들을 더 피로하게 만드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즉 추격당하면서도 중간중간 반격을 하는 척을 하고 또 결국 번번이 패하고 달아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전이었다. 그렇게 하루 동안 일곱 번이나 전투에서 져주자 회군을 주장했던 우문술도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면 우리가 곧 승리하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감히 회군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수나라 원정군은 드디어 살수(薩水)까지 건너 평양성에서 10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산에 의지해 진영을 꾸렸다. 이때 우중문 앞으로 을지문덕의 서신이 하나 전달되었다. 그가 펼쳐보자 종이에는 시 한 편이 써 있었을 따름이었다.

신묘한 계책은 천상을 꿰뚫었고
기묘한 계획은 대지를 뒤덮었네
승전으로 이미 공로가 충분하니
만족하고 부디 그치길 바란다네

 

   언뜻 보면 상대방을 극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달리 보면 지금까지의 상황을 반어법으로 비꼬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따로 사자를 통해 여전히 거짓 항복의 제스처를 취하였다.


   “만약 군사를 되돌리신다면 꼭 왕을 모시고 황제를 뵈러 가겠습니다.”


   동시에 평양성에서도 계속해서 항복하겠으니 시간을 달라는 시그널이 오고 있었는데, 며칠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우중문과 우문술은 그제서야 뒤늦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한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실제로 9군의 병사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바로 앞의 평양성은 항복하겠다는 말만 할 뿐 문을 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방어태세가 잘 되어 있어서 단기간 내에 함락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고 말이다.


   결정적으로 내호아의 해군 지원병력이 함께 나서줘야 하는데 알고보니 진작에 독자행동에 나섰다가 참패를 당하고 물러난 지 오래였다. 이 상태로는 숫자만 많지 전투력이 형편없는 병사들뿐인 자신들도 내호아 꼴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자체 군량은 이미 소진된 상태였고, 그나마 기대하던 해로를 통한 군량 확보의 길조차 이젠 완전히 막혀버린 상황이었다.


   사실 이때 내호아는 해안가에서 여전히 대기중이었지만 을지문덕과 평양성에 의해 의도적으로 연락망이 끊겨 있던 상황이었기에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9군 지휘부는 철군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을지문덕이 사자를 통해 전해온 항복 메시지를 명분 삼아서 회군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을지문덕의 말은 처음부터 가짜였음이 금새 드러났다. 물러나는 수나라군을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포위하며 공격해왔기 때문이었다.


   지휘관들은 싸우면서 퇴각하는 고난이도의 작전을 펼쳐야만 했다. 당장 살수에 도착해서 강을 건널 때, 절반쯤 건넜을 무렵 을지문덕의 고구려군이 달려들어 아직 건너지 못한 나머지 부대를 급습해왔다. 9군 중 현도 방향을 담당하던 사령관인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격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동시에 9군 전체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지휘관부터 병사들까지 모두가 도망치기 바빴는데, 하루 밤낮으로 달려서 압록강에 다다르기까지 약 180km를 주파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살기 위해서였다지만 오늘날 마라톤의 4배에 달하는 거리를 달려갔다는 것은 쉬이 믿기지는 않는다. 어쨌든 최종 목적지인 요동성에 도착한 사람 수는 불과 2,700명이었다. 처음 병력 대비해서 이날 돌아온 비중은 1%가 채 안 되는 셈이었다. 신세웅 사후 다시 후군을 맡아 고구려군의 추격을 막아주었던 장군 왕인공(王仁恭) 덕분에 그나마 그 숫자도 돌아갈 수 있었다. 내호아도 9군의 패퇴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는 결국 퇴각 결정을 내렸다.


   해군의 일방적인 패전과 9군의 불명예스러운 퇴각은 수나라군 내에 내포된 온갖 문제점과 그 결과물인 총체적 난맥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아무리 황제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수 양제는 자기 탓은 쏙 빼놓은 채 눈물을 머금고 철군을 결정하였다. 중국측 역사서에서는 이번 전쟁을 통해 수나라가 얻은 것이라곤 요수 건너편 요서 지역에 있던 무려라 하나뿐이라고 꼬집고 있다. 《삼국사기》의 찬자 또한 이번 전쟁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 양제가 요동 전쟁에 출정한 군대의 규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고구려는 그저 구석의 작은 나라였을 뿐인데도 이를 능히 막아내 스스로를 지켜내고 또 적군을 거의 다 섬멸한 공은 모두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대수나라 전선에 대한 종합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1차 방어선인 요수는 어차피 뚫린다 가정하고 마련해둔 요동성에서의 2차 방어선은 기대대로 제 기능을 다해주었고, 그 사이 평양성을 직접 타격하러 올 적군의 경로를 계산하여 이들을 각개격파하는 정밀한 전술을 성사시킨 것은 물론, 대규모 원정군의 퇴로를 맹추격하여 극도로 효율적인 섬멸전을 전개함으로써 수나라 전군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린 것은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이만한 일을 벌인 을지문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다음 글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을지문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수서, 북사,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해동명장전, 조선상고사, 을지문덕전(신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