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 안승(安勝)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2. 11. 12:08

   668년 9월의 어느 가을 날,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나라 원정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날로 고구려의 700년 대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국가는 무너졌어도 그 구성원들까지 모두 고구려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의 외손이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 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은 불확실한 미래를 품고 자신을 따르는 고구려인 4천여 호와 함께 669년 2월 신라로 망명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그가 보장왕의 서자(庶子)로 고안승(高安勝)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그는 연안승(淵安勝)이 맞다. 아마도 큰아버지 연개소문이 역사에서는 쿠데타로 국왕을 시해한 역신으로 남다보니 자연스럽게 연씨임을 가리고자 그저 안승이라고만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특히 신라와 사이가 안 좋았던 독재자 연개소문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마치 선의의 피해자처럼 보이는 보장왕과의 직접적인 혈연 관계를 강조하는 게 더 나았을 테고 말이다. 실제로 보장왕의 서자라는 표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만 나타난다. 그가 보장왕의 외손이라고 한 기록은 《신당서》와 《자치통감》과 같은 중국측 역사서들이 중심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를 설명할 때 공식적으로 귀족(貴族)이라고 하지 왕족(王族)이라는 수식어가 사용된 적이 없다. 또 그를 왕자도 아니고 어색하게 상속자(嗣子)라고 호칭한다하거나, 심지어 왕손(王孫)이라고 표현한 기록도 확인된다. 결론적으로 이는 그가 보장왕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당군에 점령당한 고구려에서 피신해서 갈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신라뿐이었다. 그곳 신라는 아버지인 연정토가 3년 전에 먼저 망명을 떠난 곳이기도 했다. 다만 안승이 망명하기 바로 전 해에 어쩐 일인지 당나라로 재차 귀순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안승의 출생년도는 명확치는 않다. 다만 추정은 해볼 수가 있는데, 만일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곧바로 새로운 국왕인 보장왕의 딸과 자신의 동생을 결혼시켰다고 가정해본다면, 아마도 빠르면 643년 경에는 자식이 태어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안승이 동생 부부의 첫 번째 자식이라고 한다면 신라로 망명한 669년에는 최대 27세까지는 되었을 수 있다. 보수적으로 봐도 최소한 20대는 충분히 넘었을 것이다.


   그가 신라로 망명을 신청하긴 하였지만 수도로 곧장 들어갔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구려의 대형(정5품) 검모잠(劍牟岑)은 수림성(水臨城, 위치 미상) 출신이었는데, 670년 4월경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해서는 궁모성(窮牟城)을 출발하여 패강(浿江) 남쪽까지 남진해왔다. 그렇게 그곳에서 당나라 관리들과 작년에 사신 자격으로 신라를 방문했었던 승려 법안(法安) 등을 만나 격살하고는 한성(漢城)에 자리잡았다. 그러던 중 마침 서해의 사야도(史冶㠀)라는 곳에 안승이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였던 모양이다.


   이 당시 안승에 대해서 당나라의 원정군 지휘관(行軍總管)이었던 설인귀(薛仁貴, 614~683)가 671년에 신라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고구려의 안승은 나이가 아직 어리고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북쪽 해안을 순시할 때 그를 불쌍히 여겨 차마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마치 몽골군의 공격을 피해 고려 정부가 강화도에 피신해 있었듯이 그 역시 당나라군의 공격을 피해 서해의 북쪽 해안 어딘가에 있던 사야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검모잠이 그를 만난 건 바로 안승이 절치부심하고 있던 이 무렵이었고 말이다.

   나름 야심가였던 검모잠은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보장왕의 핏줄인 그를 고구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장은 안승으로서도 믿고 의지할 만한 원군이 생긴 셈이라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검모잠 입장에서도 고구려 왕가의 혈통이라는 강력한 카드 하나를 쥐게 된 셈이어서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할 만했다. 그는 소형(정7품) 다식(多式)을 사신으로 신라에 파견하였다. 목적은 스스로의 몸값을 불려 신라와 협상하고자 함이었다.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는 것은 세상의 정의일 것입니다. 저희가 대국에게 바라는 것은 그뿐입니다. 우리의 선왕은 능력이 부족하여 멸망당했지만, 이번에 저희가 나라의 귀족 안승을 받들어 국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부디 저희가 변방이 되어 영원토록 충성을 다하도록 해주십시오.”


   하지만 둘 사이에 문제가 곧바로 불거졌다. 안승이 고구려 국왕을 선포하였다는 소식이 퍼지자 점령군인 당나라 입장에서는 이를 위험한 시그널로 받아들여 즉각 군사적 대응에 나선 게 화근을 불러일으켰다. 고간(高偘), 이근행(李謹行) 등 당군 지휘관들의 토벌 소식이 들려오자 아마도 안승은 육상에서의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검모잠과 트러블이 생겼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애써 섬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설인귀의 말마따나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검모잠 때문에 다시 당군의 공격 가시권에 들어가게 되자 그는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안승이 택한 길은 안전이었다. 그는 방향성이 맞지 않는 검모잠을 제거하고 다급히 신라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모든 고구려인이 그를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 검모잠의 길에 동조하였던 이들도 상당수였던 듯, 이들과 신라군은 합심하여 평양성에 근거지를 마련한 4만 명의 당군과 각지에서 일진일퇴하며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양측의 치열한 싸움은 신라의 문무왕(文武王, 626~681)이 672년 하순에 당나라에 화평을 제안하면서 잠시 휴전을 하게 되지만, 이는 한시적인 평화였을 뿐이었다.

 

나당전쟁 - Wikipedia


   신라군과 함께 당나라와 싸우던 고구려 유민 중에는 태대형(정2품) 고연무(高延武)같은 이도 있었다. 그는 정예병 1만 명이나 거느릴 정도로 세력이 컸는데, 신라군과 같이 압록강 너머 옥골(屋骨, 오골성(烏骨城)인 듯)까지도 원정을 할만큼 기세도 대단했다. 그를 비롯해 평양에서 당군의 공격을 피해 빠져나온 이들이나 연합군으로 싸우다가 패한 고구려 유민들도 모두 나중에 안승에게 합류하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인간에게는 명분이라는 구심점이 필요한 법이다.


   이 해 6월 신라에 망명 요청을 한 안승에게 문무왕은 신라 서쪽 옛 백제의 땅인 금마저(金馬渚, 전라북도 익산)를 내주었다. 그리고 7월에 문무왕은 사찬(17관등 중 8등급)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을 정식으로 고구려왕으로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조금 길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70년) 가을 8월 1일에 신라왕이 고구려의 상속자(嗣子)인 안승에게 명을 내린다. 공의 태조 중모왕(中牟王, 주몽)은 덕을 산처럼 쌓고 공을 바다만큼 세웠고, 또 위엄 있는 풍모와 어진 가르침이 동방에 크게 떨쳤다. 자손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고, 땅은 1천 리(里), 햇수는 거의 800년이나 되었다. 연남건, 연남산 형제에 의해 내부에 변란이 일어나고 형제간에 틈이 생겨나는 바람에, 집안과 나라가 깨져 없어지고 종묘와 사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혼란에 휩싸여 마음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험과 곤란을 피하다가 이웃나라에 홀몸을 의탁해 왔다. 대저 백성은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세상은 반드시 돌봐야 하는 법이다. 선왕의 정당한 계승자는 오직 공뿐이며, 제사를 주관하는 것 또한 공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7등급) 금(수미)산 등을 보내서 공을 고구려왕으로 삼도록 명하니, 공은 마땅히 남은 백성을 어루만져 모아 옛 사적을 계승하고 일으켜 영원히 이웃나라가 되어 형제와 같이 지내도록 하라.


   이제야 신라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인 거처를 확보하게 된 안승은 안심을 할 수가 있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안승의 이 다음 행보이다. 그가 추진한 일은 당시 일본과의 외교관계 개설이었다. 혹 신라 하나만으로는 안전을 보장받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였을까?


   하지만 이 역시도 암암리에 신라의 견제가 있었다. 초기를 제외하고는 보덕국의 사신단을 신라측 파견자가 항상 동행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신라측에서 스스로 보덕국의 위에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본 도착 보덕국 사신 신라 사신
671년 1월 상부(上部)의 대상(정3품) 가루(可婁) -
672년 5월 전부(前部)의 부가변(富加抃) -
673년 8월 상부의 위두대형(종3품) 한자(邯子)
전부의 대형(정5품) 석간(碩干)
대나마(10등급) 김이익(金利益)
675년 3월 대형 부간(富干), 대형 다무(多武) (신원 미상)
676년 11월 후부(後部)의 주부(종2품) 아우(阿于)
전부의 대형 덕부(德富)
대나마 김양원(金楊原)
679년 2월 상부의 대상 환부(桓父)
하부(下部)의 대상 사수루(師需婁)
나마(11등급) 감물나(甘勿那)
680년 5월 남부(南部)의 대사자(정4품) 묘문(卯問)
서부(西部)의 대형 준덕(俊德)
대나마 고나(考那)
682년 6월 하부의 괘루모절(卦婁毛切)과 대고앙가(大古昻加) 대나마 김석기(金釋起)


   이들이 향하였던 곳은 일본의 수도는 아니었고 당시 일본을 대표해 외교를 담당하던 쓰쿠시(筑紫, 오늘날 규슈의 후쿠오카 일대)라는 지역이었다. 한 번 방문하면 짧아도 반 년, 길면 최대 1년까지도 체류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전에 관례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사신들에게 연회를 열어주곤 하였다.


   그렇다고 보덕국에서만 일방적으로 일본에 사신 파견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681년 가을 7월처럼 일본이 먼저 보덕국과 신라 양측에 동시에 사신을 파견한 사례도 있었다.


   이들 고구려 유민이 계속 고구려라는 이름을 쓰는 게 신라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했던 것 같다. 실제로 이 당시 당나라는 신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끌어들여 세력화하고 있는 것을 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문무왕은 674년 9월에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선포하면서 고구려라는 이름 대신 보덕국(報德國)이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보덕이라는 이름 자체의 뜻은 “베푼 은혜를 덕으로 갚는다”는 것이었는데, 신라 입장에서 이들 고구려 유민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엿보이는 작명이다. 계속해서 신라를 의삼하고 있던 당나라의 눈치를 본 것도 있겠지만 신라 내의 보덕국의 지위가 딱 그 이름과 같았다. 다만 외교에 있어서는 갑작스런 국명 변경이 혼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는지 보덕국은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고구려라는 이름을 고수했던 듯하다.


   그리고 시일이 흘러 680년 3월, 문무왕은 고급 그릇과 채색 비단 등을 보덕왕 안승에게 폐물로 선물하면서 자신의 조카딸이자 곧 잡찬(3등급) 김의관(金義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문무왕의 교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먼저이고, 왕실의 기틀은 후계를 잇는 것이 제일이다. 왕은 안에서 도와주는 법도를 오랫동안 비우고 집안을 일으킨 일을 영원히 잃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내 누이의 딸로 베필을 삼게 하니, 왕은 마땅히 마음과 뜻을 정갈히 하여 조상의 제사를 따라 받들고 자손을 무성하게 하여 영원히 반석같이 번창한다면, 어찌 성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같은 해 여름 5월에 안승은 대장군 고연무를 통해 표문을 보내왔다.

신 안승이 말씀드립니다. 대아찬(17관등 중 5등급) 김관장(金官長)이 와서 누이의 딸을 제 아내로 맞으라는 교서를 전해주었습니다. 이에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서로 마음속에 있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무리로 행동과 능력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행히 좋은 운수를 만나서 성인의 교화에 몸을 적시게 되었습니다. 매번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고자 해도 길이 없습니다. 거듭 대왕의 사랑을 입어 이렇게 인척이 되는 은총을 내려주시니, 마침내 무성한 꽃이 경사를 나타내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을 갖추어, 좋은 때에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오랜 세월 동안에도 만나기 힘든 일을 하루아침에 얻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처음에 바라지 못했던 것이고 뜻밖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그러한 은혜를 받겠습니까? 제 선조 모두가 다 기뻐할 일입니다. 대장군 태대형(정2품) 고연무를 보내 표문을 올립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안승은 신라 왕가의 일원이 되었다. 저자세의 글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실제로 안승은 신라 안에서 극도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이 결혼 역시 그가 먼저 제안하였을 공산도 크다. 왜냐하면 이보다 전에 이미 나당전쟁도 676년 말에 사실상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즉 적이 사라지면 우군끼리의 동맹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니 이가 시리게 된 것이 보덕국 그리고 안승의 솔직한 처지였다. 결혼 동맹을 통해서라도 신라 내에서 자리를 확고히 잡을 필요가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안승이었다.


   더욱이 그간 자신의 뒤를 봐준 문무왕도 어느덧 50대 중반으로 당시 사회에서는 노령층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큰아버지 연개소문이 614년생이고 문무왕은 626년생이니 자신의 아버지 연정토와 문무왕은 아마도 또래였을 것이다. 아버지와도 같았던 문무왕까지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위태로워질 것을 안승이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실제로 문무왕은 681년 7월 1일에 눈을 감았고, 그의 맏아들이 신문왕(神文王)이 새롭게 즉위하였다. 그런데 불과 한 달만인 8월 초에 신라 정부 내에서 쿠데타 모의가 발각되었다. 그 주체는 문무왕 시대에 삼한통일의 주역들이었던 소판 김흠돌(金欽突),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이었는데, 이들뿐만 아니라 전년도에 상대등까지 올랐다가 최근 면직된 이찬(伊湌) 김군관(金軍官)처럼 심정적으로 동조하였던 인물들도 상당수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발빠른 조치로 쿠데타 시도는 사전에 진압되었고 신문왕은 즉위 초 자칫 큰 혼란을 가져올 뻔했던 상황을 제때에 수습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8월 8일에 쿠데타 주동자들을 처형하고 불과 5일 만에 보덕왕 안승이 곧바로 소형(정7품) 수덕개(首德皆)를 사신으로 파견해 쿠데타 진압을 축하하였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으로 신라 정부가 국민들에게 쿠데타 사실을 공표하는 게 이로부터 3일 후이니, 얼마나 안승이 신라 국내의 상황을 주의 깊게 모니터링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아마 안승과 신문왕도 또래였을 텐데, 신문왕 입장에서는 아버지 때와 달리 따로 안승을 챙겨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안승의 노력과 상관없이 보덕국의 운명은 그 시효가 다해가고 있었다.


   신문왕도 곧 결정을 내렸다. 683년 겨울 10월에 보덕왕 안승을 신라의 수도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래도 신문왕은 나름 최대한 안승을 배려해준다고 노력은 하였던 것 같다. 이제 안승은 소판(17관등 중 3등급)이 되었고, 왕족의 성씨인 김씨를 사성해주면서 결정적으로 왕족의 골품인 진골로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수도에 머물게 하고는 저택과 토지까지 내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안승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더 이상 기록이 없기에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를 따르던 이들이 가졌던 것은 억하심정이었다.

 

전북 익산 오금산성(보덕성 추정) - 국가유산청


   1년 후인 684년 11월, 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大文)이 보덕국의 본거지였던 금마저 땅에서 반란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이 들통나서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마찬가지로 금마저에 머물고 있던 옛 보덕국 유민들은 대문의 죽음에 경악하고는 금마저의 보덕성(報德城)을 차지하여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을 이끈 이는 실복(悉伏)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안승과의 관계는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어쨌거나 신문왕도 급히 정예병사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파병하였다. 확인되는 것만 해도 정규군 부대인 6정(停) 중 귀당(貴幢), 6개 서당(誓幢) 중 작년에 고구려 유민들로 새롭게 편성된 황금서당(黃衿誓幢)이 동원되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대략 신라의 주력 병력 1/6이 투입된 것이니 얼마나 당시 보덕국민들의 저항이 거셌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실제로 황금서당의 네 명의 보기감(步騎監) 중 김영윤(金令胤)이, 귀당 소속의 다섯 명의 제감(弟監) 중 핍실(逼實)이 전사한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보덕국 잔당은 단순히 보덕성 수비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나아가 신라 본토로의 진공까지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당시 진출해 있던 가잠성(椵岑城)은 한때 백제와 신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대는 그들 편이 아니었다. 황금서당의 장수들이 이미 간파하였듯이 보덕국 잔당의 기세가 떨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반격에 나서는 전략이 곧 물량공세와 지구전 양면에서 모두 유리한 정부군측의 최선의 카드였다. 예측대로 물리적인 한계로 항전을 장기적으로 끌고갈 수 없었던 보덕성은 얼마 안가 결국 신라의 진압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리고 남은 주민들은 나라 남쪽 지역으로 재배치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이후 금마저는 보덕국의 색채를 완전히 지우고 그저 금마군(金馬郡)이라는 평범한 지역명으로 불리게 된다.

 

   저 멀리 신라의 수도에서 보덕국의 소식을 접해 듣고 있었을 안승의 심정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게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였던 보덕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져갔다. 다만 그럼에도 사람은 남는다. 이들 중 일부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첫 번째 풍경. 이런 제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일본 정부는 684년 5월에 보덕국으로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이들도 현지에 와서야 보덕국이 최종 폐지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은 1년여 후인 685년 9월의 일이다. 그 긴 기간을 신라에서 보냈으니 보덕국 잔당의 봉기부터 진압까지 오롯이 목격하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말해주듯 이들의 귀국과 함께 보덕국 출신의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해왔다. 별다른 정보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 정부에서 나중에 고구려 귀화인 56명을 히타치(常陸, 도쿄의 동북쪽) 지역에 정착시키고 농사를 짓게 해주었다는 기록만이 전해진다.


   두 번째 풍경. 신라 정부는 686년에 기존 군사조직인 6개 서당에 추가로 벽금서당(碧衿誓幢)과 적금서당(赤衿誓幢) 2개를 신설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구성원이 보덕성의 주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때까지도 여전히 고구려식의 직급체계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신라식 관등으로 치환해서 부여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제서야 보덕국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떼어지고 신라 국민이라는 정식 시민권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과연 이를 기분좋게 받겼을지 씁쓸하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고구려 관등 (총 9품) 신라 관등 (총 17관등)
주부(主簿, 종2품) 일길찬(一吉飡, 7등급)
대상(大相, 정3품) 사찬(沙飡, 8등급)
위두대형(位頭大兄, 종3품), 종대상(從大相, 정4품) 급찬(級飡, 9등급)
대형(大兄, 정5품) 대나마(大奈麻, 10등급)
소상(小相, 종5품), 적상(狄相, 정6품) 나마(奈麻, 11등급)
소형(小兄, 정7품) 대사(大舍, 12등급)
제형(諸兄, 종7품) 사지(舍知, 13등급)
선인(先人, 정9품) 길차(吉次, 14등급)
자위(自位) 오지(烏知, 15~16등급)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당서, 자치통감, 일본서기, 문무왕릉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