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을지문덕에 대해 그나마 들어서 아는 것이라고는 살수대첩 하나뿐이다. 워낙에 탁월한 전략운용이 돋보이는 작전이어서 그런지 기록들을 차분히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직접 느껴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그가 정말로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신인지도 불분명하다.
심지어 그의 성씨가 을(乙)인지, 을지(乙支)인지도 명확치 않다. 그가 을씨라고 보는 쪽은 고구려 역사 초기에 등장하는 을씨 재상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 - 제9대 고국천왕(179~197) 때
- 좌보 을두지(乙豆智) - 제3대 대무신왕(18~44) 때
- 대보 을소(乙素) - 제2대 유리왕(B.C.19~A.D.18) 때
하지만 3세기를 마지막으로 을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7세기 인물인 을지문덕이 이들의 후손이라는 증거도 사실 없는 셈이다. 고대어로 지(支)는 굳이 따지자면 오늘날로 치면 “~님”과 같은 존칭어라 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성+존칭+이름”으로 한 사람을 계속 호칭하는 것도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오히려 새로운 성씨로서 을지씨라고 보는 게 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 참고해볼 수 있는 것은 동시대의 인물들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한 글자 성씨와 두 글자 성씨가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한 글자로 통일되어 갔고, 여전히 두 글자를 쓰는 집단은 대개는 한족 혈통이 아닌 이민족 출신들이 많았다. 한반도의 경우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한 글자 성씨로 상당수 전환된 게 맞지만 그럼에도 그 전까지는 기록상 두 글자 성씨도 상당수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 명림답부(明臨荅夫, 67~113)처럼 말이다. (참고로 연개소문은 연(淵)씨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럼 동시대에 다른 나라에서는 을지씨가 없었을까? 안타깝게도 없다. 대신 매우 비슷한 성씨가 하나 있다. 발음에 따라서는 울지로도 발음할 수도 있는 위지(尉遲)씨이다. 심지어 시대도 거의 을지문덕과 겹쳐서 존재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곧 위지공(尉遲恭, 585~658)인데, 흥미롭게도 그의 자가 경덕(敬德)이었기에 흔히 “위지경덕”이라고 역사에서는 등장한다. 묘한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는 성씨로 보아 대개 선비족 계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을지문덕이 수나라와 일생일대의 대결을 펼쳤던 612년 당시에는 28세였는데, 그 무렵 혹은 약간 뒤에 수나라 군대에서 복무하였던 사실이 확인된다. 그가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은 617년에 있었던 지역 반란 사건 때였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620년에 나중에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에게 투항하였고, 626년 황실 내 권력다툼 와중에 이세민의 쿠데타에서 공을 세움으로써 본격적으로 활약을 보이게 된다.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떠날 당시에는 전쟁 자체를 반대하였지만 정작 참전하여서는 주필산 전투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약을 이어나간다.

혹 그와 을지문덕 간에는 모종의 연관성은 없었을까? 신기하게도 을지문덕의 이름으로 보이는 문덕(文德)은 고구려 고유어가 아니라 전형적인 한자식 표현이다. 창조리니, 개소문이니, 온달이니 하는 전통 고구려식 이름과는 확연히 다른 게 눈에 띈다. 위지공이 자를 경덕(敬德)으로 썼기에 위지경덕으로 흔히들 부르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일 확률이 매우 높다.
실제로 을지문덕 개인을 묘사한 표현에는 이런 부분이 남아 있다.
성격이 침착하고 용감하였으며, 지략과 능력 또한 뛰어났다.
글을 읽을 줄 알고 또 문장을 잘 지었다.
분명 그 자신의 자인 문덕(文德)과 일치하는 설명이다. 그것은 스스로 문장에 자신감이 있을 때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다시 한번 표로 이 둘을 직접 비교해보자.
| 성씨 | 을지(乙支) | 위지/울지(尉遲) |
| 이름(자) | 문덕(文德) | 경덕(敬德) |
| 중국어 발음 | 이즈 원더 (Yǐzhī Wéndé) | 위츠 징더 (Yùchí Jìngdé) |
고대 사회에서는 고유어를 표시할 때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그냥 가져다 쓰는 게 태반이었기에 지(支)든 지(遲)든 그것은 크게 차이가 없다. 을(乙) 역시 尉라는 한자가 ‘울’과 ‘위’ 둘 다 발음되기 때문에 딱히 차이가 없는 셈이다. 여담이지만 중국의 병법 모음집인 무경필서 중 하나인 울요자(尉繚子)의 경우에도 중국어로는 ‘위’가 아닌 ‘웨이’로 발음해서 웨이랴오즈(Wèiliáozǐ)가 되는데, 고로 尉는 ‘울’로도 ‘위’로도 발음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을지와 위지(혹은 울지)의 발음은 현대 중국어에서는 이즈(Yǐzhī)와 위츠(Yùchí)로 거의 같다. 발음기호만으로도 이미 비슷한 게 눈에 보일 것이다.
물론 이름의 유사성만으로 같은 집안임을 짐작하는 것은 분명 논리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하나의 개연성을 검토할 따름이다. 다만 그 개연성을 높일 수 있을지 여부가 상대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표현을 빌자면 다문화사회였다. 고구려의 기원 자체가 부여에서의 이주민들이 주축이 되었다지만 사실 기존 현지인들의 사회인 비류국(沸流國)을 흡수하면서 그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옥저, 숙신(말갈), 나중에는 부여까지 주변의 세력들을 합병하는 것은 물론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한나라로부터 무수히 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더욱이 현도군, 요동군, 낙랑군 같은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도 지속적으로 탈취하였고, 또 북연(燕)의 백성 1만 명의 망명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백제나 신라는 흉년이나 전쟁 등으로 여러 차례 고구려로 흡수되기도 했다.
을지문덕의 시대 이전까지 《삼국사기》에서 확인 가능한 외국인의 유입 기록만 해도 이 정도가 된다.
| 연도 | 대상국 | 내용 |
| 19 | 백제 |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흉년이 들어, 1천여 호가 도망옴 |
| 26 | 개마국, 구다국 | 개마국은 정벌, 구다국은 투항 |
| 32 | 낙랑국 | 습격 후 항복 받음 |
| 56 | 동옥저 |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음 |
| 68 | 갈사국 |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 |
| 197 | 한나라 | 중국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한인(漢人)들이 난리를 피하여 투항해 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
| 217 | 한나라 |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데리고 투항 |
| 280 | 숙신 | 숙신의 단로성(檀盧城)을 빼앗고, 6백여 가(家)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으로 옮김 |
| 302 | 현도군 | 현도군을 침략 8천 명을 포로로 잡아 평양으로 옮김 |
| 313 | 낙랑군 | 낙랑군을 침략, 주민 2천 명을 포로로 잡음 |
| 385 | 요동군, 현도군 | 요동을 습격, 요동과 현도를 점령하고, 주민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 |
| 395 | 백제 | 패수(浿水) 가에서 백제에게 승리, 8천 명을 사로잡음 |
| 436 | 북연(燕) | 북연왕 풍홍(馮弘) 및 화룡성민(和龍城民) 약 1만 명 |
| 475 | 백제 | 한성(漢城) 함락, 주민 8천 명을 사로잡아 귀환 |
| 494 | 부여 | 왕, 왕비, 왕자 등 나라 전체가 항복 |
| 499 | 백제 | 가뭄으로 한산(漢山) 주민 2천 명 유입 |
| 512 | 백제 | 가불(加弗), 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 명을 사로잡음 |
| 608 | 신라 |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 8천 명을 사로잡음 |
좀 더 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에는 말갈도 중요한 사회구성원이었기에 나중에 고구려 멸망 후 발해가 들어설 때에도 고구려유민과 말갈인들이 합심하여 건국하는 일도 가능했다. 거란이나 돌궐과 같은 북방계통과도 고구려는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했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순수 고구려인이라고 짐작하고 있는 다수가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는 추론도 가능해진다. 오늘날 미국의 기원이 다수의 유럽계 이주민들로부터 시작하였듯 고구려의 왕가 자체도 외지인들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고로 을지문덕이 순수 고구려 혈통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충격받거나 혹 놀랄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짚어보자. 을지문덕은 612년에 있었던 제2차 수-고구려 전쟁 때에만 등장하고 그 앞뒤로는 행적이 묘연하다.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첫째, 사망, 둘째, 정적 제거. 물론 수명이 다했다거나 병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거나, 혹 아니면 퇴각하는 수나라군의 추격전 당시 마치 이순신처럼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였거나 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설명하기는 편하다. 소크라테스가 됐든 을지문덕이 됐든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런데 둘째의 상정이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우선 입증 자체가 까다롭다. 가뜩이나 역사기록이 부족하기로 악명 높은 고대 역사서에서 이를 암시하는 기록조차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나마 접근 가능한 것이 제반 환경을 되짚어보는 것 뿐일 것이다. 과연 전쟁영웅 을지문덕을 고구려 정부는 제거할 의사가 있었을까? 가능했다. 전통 왕권사회에서 왕위를 넘볼 수 있는 모든 2인자는 구조적으로 견제의 대상이 아니 될 수가 없었다. 특히나 우수한 지략과 철두철미한 전쟁수행능력으로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이는 왕권을 쥐고 있는, 혹은 다음 왕권을 쥐고자 하는 이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 사회에서도 그러한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명림답부 ] 신대왕 때인 166년에 국상이 된 그는 172년에 한나라 현도군에서 고구려를 침공해오자 소위 청야전술(淸野戰術)로 적군을 몰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불과 2년 후에 고령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당시 신대왕은 극진한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사망한 전쟁영웅은 정권에 위험도가 제로이기 때문에 아무리 추앙해줘도 손해볼 것은 없기 마련이다.
[ 을파소 ] 고국천왕 때인 191년에 추천을 받아 국상에 오른 그는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고구려를 동북아의 선진국으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당시 어느 국가도 시도해본 적 없던 진대법(賑貸法)이라는 창의적인 사회복지제도를 빠르게 안착시킨 것도 그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다음 국왕인 산상왕 때 그는 그저 찬물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203년에 그가 사망하자 전국민이 애도할 때에도 국왕의 존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만큼 권력자를 넘어서는 정치인은 견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순리이다.
[ 창조리 ] 봉상왕 때인 294년 국상에 오른 그는 국왕을 보필해 국정 안정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봉상왕이 자신의 충언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자 300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국왕을 앉혔다. 아마도 절대 권력자라면 가장 두려운 케이스가 바로 창조리와 같은 권위와 권력을 모두 갖춘 2인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상과 같이 셋 다 국상이라는 국왕 다음 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으면서 결말이 서로 다 다른 케이스를 보자면, 국왕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게 명림답부처럼 공은 세우되 권력은 나눠줄 필요가 없는 경우일 것이다. 그 다음 불편한 관계가 을파소처럼 내 사람도 아닌데 국민적인 인기가 있어서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케이스이다. 자칫 더 키워줄 수도 있다보니 마음껏 활용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반발을 살까 우려되어 마음대로 내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게 창조리의 사례이다. 충분히 권력을 나눠가진 탓에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워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은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명림답부와 같은 전쟁 영웅에, 을파소처럼 전폭적인 사회적 지지세를 갖춘 데다가, 심지어 종전 후에도 창조리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무력 동원까지 가능했다면, 어떤 권력자가 과연 그를 순순히 놔두었을까 싶어진다.
이때 영양왕은 565년에 왕자 시절에 태자가 된 기록을 참고하자면 612년 당시에는 50대는 당연히 넘었을 것이고 최소한 60세 내외는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미 23년간 국왕으로 재임하며 국내정치에도 빠삭했을 그에게는 전쟁영웅 을지문덕이 과연 부담스럽지 않았었을까.
설혹 그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더라도 바로 다음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던 이복동생 고건무(高建武)는 어땠을까? 심지어 고건무는 내호아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결정적 전공을 세웠음에도 논공행상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것이 을지문덕의 견제 때문이었든 아니면 그저 그가 총지휘관으로서 모든 전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든 간에 당시에 가장 억울했을 인물을 꼽자면 일순위는 고건무가 아니었을까 싶다.
역사에서 상상은 위험하다지만 한편 잘 생각해보면 을지문덕의 퇴장으로 가장 이득을 보게 되는 인물은 단 한 명 바로 고건무였다. 실제로 종전 후 불과 6년 후에 그가 차기 국왕으로 등극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612년의 대전으로 수나라의 대군이 섬멸당했기에 한동안 외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면 더욱이 전쟁영웅은 필요 없어지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사냥이 끝나면 이제는 사냥개 차례가 아니겠는가.

# 참고자료 :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울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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