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이야기와 그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운 사실 정도는 대개 알고 있다. 이를 실제 역사기록에서 찾아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고구려의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 기원전 58~기원전 19)은 북부여에서 예(禮)씨 부인을 얻어서 살다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부여를 떠났다. 그리고는 기원전 37년에 22세의 나이로 졸본(卒本)의 비류수(沸流水) 가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졸본부여 혹은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의 세 딸 중 둘째와 결혼하였다. 얼마 후 졸본부여의 왕이 사망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렇게 기존 세력을 흡수함으로써 고구려 건국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주몽은 그곳에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비류(沸流), 둘째는 온조(溫祚)였다. 그런데 부여에서 태어난 아들 유리(類利, 유류(孺留))가 기원전 19년에 고구려로 아버지를 찾아오자 주몽은 맞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다음 해에 유리왕은 송양의 딸(셋째)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비류와 온조는 배다른 형의 등장에 실망하여 남쪽으로 떠나갔다. 기원전 18년, 비류가 정착한 곳은 바닷가인 미추홀(彌鄒忽)이고 온조는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자리잡았었는데, 비류가 5개월 후 사망하자 그 세력은 온조에게로 모두 합쳐졌다. 이때 백제(百濟)라는 국명을 확정지었다.
이것이 고구려과 백제의 공통 건국신화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버전의 백제 건국신화가 존재한다. 이번에는 비류가 사실상의 주인공이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구태(仇台, 또는 우태(優台))이며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 기원전 66~기원전 6)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로, 처음에 구태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고 둘째는 온조였다. 구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던 중, 고주몽이 부여를 떠나 기원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고구려를 세우고 소서노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초반에 기틀을 잡은 데에는 그녀의 공이 컸다. 따라서 주몽은 아내 소서노에게 깍듯이 하였고 또한 비류 등을 친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 유리)가 찾아오자 태자로 삼았고, 자연히 그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에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어머니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 새로 건국의 터전을 마련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가족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처음 정착하였다.

이 두 가지 이야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비류와 온조 형제가 고주몽의 자식이냐 아니냐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전자는 고구려 기원설, 후자는 부여 기원설로 바꿔서 표현할 수가 있다. 정사인 <삼국사기>는 전자의 설을 채택하여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파생되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런데 정말 그게 맞을까? 과연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여기서 먼저 한 가지 힌트를 찾아보자.
고구려 왕실의 성씨는 잘 알다시피 고(高)이고,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의 세 성씨가 유명하다. 그렇다면 백제는? 의외로 이건 잘 모르는데 백제 왕가는 “부여(扶餘)”라는 복성을 쓴다. 부여? 그렇다, 만주 벌판에 존재했던 바로 그 부여이다. 뿐만 아니다. 백제의 제26대 국왕인 성왕(聖王)은 수도를 사비(泗沘)로 옮기면서 심지어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기까지 했다. 이웃나라인 신라에서도 나중에 사비를 부여군(扶餘郡)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게 정말로 어찌 된 일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백제인들 자신이 부여 기원설을 따랐다는 증거이다. 이들이 선조로 삼은 이는 저 멀리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東明)이었고, 또 이에 더하여 그의 후예로 졸본 지역에 또 다른 부여를 연 구태(仇台)도 숭배하였다. 이를 말해주는 여러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온조왕은 자신의 집권 초반에 동명의 사당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도성에는 구태의 사당도 있어서 매년 네 차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지금은 사라진 <해동고기(海東古記)>에서는 백제의 시조로 동명과 구태(우태)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어쩌다 선조가 둘이나 된 것일까? 이는 사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데, 오늘날로 치면 족보상 처음 성씨를 시작한 시조와 나중에 그 성씨를 중흥케 한 중시조의 두 단계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즉 동명은 (북)부여를 있게 한 최초의 선조이고, 구태는 동명의 후예로서 비류 세력의 직계조상으로 보면 된다. 이를 개념적으로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시조 동명의 (북)부여 → 후손 구태의 (졸본)부여
그럼 이번에는 백제인 스스로가 남긴 육성까지 들어보자. 먼저 472년에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북위(魏)의 헌문제(獻文帝)에게 보낸 국서에는 다음의 기술이 포함되어 있다.
저희는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서는 우의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후략)
고구려의 건국신화도 부여에서 주몽이 탈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쯤은 동시대의 백제인들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백제 멸망 당시 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의 묘지명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하백의 자손(河孫)
설마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이 정도면 백제인들도 스스로 부여 계통의 신화를 자랑스럽게 여겼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8세기까지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인에 대한 기록에서도 이는 반복되어 나타난다. (참고로 동명을 고대의 일본식 한자 독법으로 읽으면 ‘도모’가 되었던 것 같다.)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백제의 태조(太祖)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열었다.
게다가 중국측에 남아 있는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마치 평행이론처럼 각종 역사기록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기술이다. 이는 모두 백제인 스스로가 외국 사신들에게 그렇게 자신들을 설명해왔고 또 그렇게 상대방도 이해하였기에 가능한 기록이다.
즉 백제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이 고구려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고, 부여에서 시작하여 바다 건너 마한(馬韓)의 땅, 아마도 대방군(帶方郡)의 옛 지역에 터를 잡고 북방의 강자였던 부여의 후예로서 자신들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였다고 믿었던 게 분명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졸본부여를 비류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문맥상으로는 비류수 가에 있기 때문에 비류국이라고 부른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한편 달리 생각해보면 원래 졸본부여를 차지하고 있던 비류 집단의 나라라는 뜻에서 비류국이라고 불렀을 공산이 더 커 보인다. 실제로 국명과 인명 모두 비류(沸流)라는 똑같은 한자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보자.
그렇다면 비류 세력이 새로 이주하였다는 미추홀(彌鄒忽)은 무슨 뜻일까? 홀(忽)은 그래도 잘 알려진 고대어인데, 고구려어에서 성(城) 혹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미추 자체는 한자로 봐도 딱히 의미 있는 말은 아니다. 아마도 분명 백제어 내지 부여어였을 것이다. 다행히 고구려와 백제는 유래도 비슷할 뿐더러 종족, 문화, 언어까지 모두 다 유사했다. 이로 비추어보자면 미추라는 말도 고구려어를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구려어에서 숫자 3은 한자로는 ‘밀(密)’로 쓰는데, 받침 ‘-ㄹ’은 일본어에서는 ‘-ㅊ(つ)’로 바뀌어 미츠(みつ)라고 발음하게 된다. 백제어도 고구려어와 동일하였을 테니 이로써 보면 미추홀은 미츠홀, 곧 세 번째 성이라는 뜻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세 번째일까? 신화의 순서를 다시 한번 정리해서 보자.
북부여(#1) → 졸본부여(#2) → 비류의 부여(#3), 즉 미추홀
이것이 당대 백제인이 자신들의 기원을 이해하였던 순서였다. 즉 고리국에서 동명(東明)이 나와 처음으로 부여(제1부여)를 건설하였고, 여기서 후손 중에 구태가 또 다시 파생하여 졸본부여(제2부여)을 열었으며, 나중에 신생국 고구려에 의해 정권이 위협받자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이주하여 제3부여, 곧 미추홀을 기반으로 리뉴얼된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비류와 온조를 굳이 고주몽의 자식으로 기술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탁리(橐離), 색리(索離) 등 한자는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한 마디로 고리(槀離)국이라고 불린 북방 민족(北夷)의 나라에서 동명이 엑소더스를 벌여 새로운 나라를 개창한 신화가 (물론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백제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쳤는데, 이를 후대에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음이 비슷한 고려국, 즉 고구려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기록이 남기도 한 것이다.
<북사> 백제는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고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 그 왕이 외출 중에 시녀가 후궁에서 임신하였다. 왕은 환궁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후략)
<수서> 백제의 선대는 고려국(高麗國, 고구려)에서 나왔다. 그 나라 왕의 한 시녀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어 왕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후략)
<삼국사기>는 아마도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백제의 고구려 기원설을 채택하였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스스로 마음 속 깊이 부여인들의 후예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미추홀은 그런 그들의 세 번째 부여를 명명하였던 이름이었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후한서, 위서, 주서, 북사, 수서, 구상서, 신당서, 한원, 속일본기, 부여융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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