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거란군의 고도의 기동작전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926년 2월 19일에 멸망하였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그렇듯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각지에서 펼쳐졌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들의 무수한 활동이 있었겠지만 (거란에 의해 세워진 기미국(羈縻國)인 동거란국(東丹國)을 제외하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발해의 계승국가는 정안국(定安國)이다. 발해 역사를 좋아하는 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 유명세에 비해 구체적인 정보는 놀라우리만치 거의 없다. 심지어 언제 건국되었는지, 역대 국왕들의 계보는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언제 멸망하였는지조차 아무런 정보가 없다. 마치 발해의 역사를 찾아나갈 때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더듬더듬 만져가며 그림을 그려나가야 하듯이, 그 후예인 정안국 역시 그저 드문드문 조각나 있는 기록의 편린만 가지고 그 실체를 추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발해는 그래도 조선 후기의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이 <발해고(渤海考)>에서 발해의 역사를 남기지 않은 후대인의 잘못을 탓하면서 자신이 남은 기록들이라도 모아보려고 노력하였다지만, 정안국은 그러한 시도 자체가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찾을 수 있는 정보가 훨씬 더 적다. 오늘은 그 어려운 작업을 한번 해보도록 하자.
정안국의 시작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역사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족인데, 거란에게 격파당하자 그 장수(酋帥)가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서쪽 지역에 자리잡고 나라를 세우고는 개원(改元)하면서 자칭 정안국(定安國)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한은 간혹 역사기록에 따라서 고구려를 마한으로 부른 적이 있기에 고구려 및 발해와 같은 계통이라고 이해하였다고 보면 된다. 발해가 거란에게 격파당한 다음에 정안국이 세워지면서 그 위치가 서쪽 어딘가로 나와 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아마도 발해 멸망 즉시는 아니었고 928년 동거란국이 본거지를 발해의 상경성에서 훨씬 서쪽인 요양(지금의 랴오양)으로 옮긴 이후 언젠가, 그렇다면 초대 국왕인 야율배(耶律倍)가 930년에 후당으로 몰래 망명을 떠나면서 동거란국 전체가 혼란을 겪었던 930년대 초반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그 즈음에 어떤 기록이 있을까 한번 찾아보면, ‘정안국’이라는 국명은 아니지만 ‘발해’를 표방한 기록이 전해진다.
(935년 11~12월) 발해에서 사신 열주도 등을 (후당(唐)에) 보내왔다.
이들은 그 다음 해인 936년 2월까지 후당에 머물렀는데, 사신단의 전체 구성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표격인 두 명의 소속과 이름은 남아 있다.
- 남해부(南海府)의 도독(都督) 열주도(列周道)
- 정당성(政堂省) 공부경(工部卿) 오제현(烏濟顯)
이들이 혹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 ‘발해’라는 이름을 쓰던 동거란국의 사신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가능한데, 이 당시는 그 국왕 야율배가 후당으로 망명을 가서 멀쩡히 살아 있던 시점이기에 굳이 적대국으로 화친 사절단을 보낸다는 게 아무래도 분위기상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사신단의 대표 두 명의 성씨가 각각 열(列)씨와 오(烏)씨인데 둘 다 나중에 정안국의 역대 국왕들의 성씨라는 점에서 단순히 동거란국의 일개 사신일 확률보다는 정안국의 고위급 외교관들로 봄이 더 적합할 듯하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이들 이후로 정안국이 34년간이나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간에 하나 눈에 띄는 기록이 있긴 하나 이것이야말로 정안국에 대한 기록인지가 명확치 않다.
(954년 7월) 발해국 추장 최오사다(崔烏斯多) 등 30명이 (후주(周)로) 망명해왔다.
전후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에 해석이 어려우니 부득이 넘어가고, 본격적으로 정안국이 역사에 등장하는 시점은 다음의 기록이 처음이다.
(970년) 정안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여진이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송나라로) 국서와 선물을 보내왔다.
사실 정안국이 처음부터 정안국이라고 하였는지도 불분명하지만, 여하튼 정안국이 본인들의 이름으로 공식 외교관계를 개설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국왕 열만화는 아무런 정보가 없으나 아마도 남해부 도독이었던 열주도의 후예가 아닐까 싶은데 이 또한 추정에 불과하다.
그럼 그는 왜 이때 송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였을까? 이 당시 송나라는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10국이라고 불리는 혼란의 시대 끝무렵인 960년에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건국한 나라였다. 그리고 정안국이 사신을 파견한 970년은 송이 건국 후 10년이 경과한 상태였기에 이쯤이면 북방의 요나라와 전재 준비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일 아직 송나라는 중원 통일을 완수하기 전 시점이었기에 본격적인 북벌 협의는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사이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는데, 975년 7월에 거란의 요나라 한복판에서 또 다른 발해유민 세력이 집단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연파(燕頗)로, 한때 발해의 부여부라고 불렸던 황룡부(黃龍府)에서 유민들을 이끌고 대규모 반란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불과 2개월 만인 9월에 요나라 정부군에 밀려 결국 멀리 올야성(兀惹城)으로 달아나야만 했다.
이 올야성은 오사성(烏舍城)이라고도 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안국의 수도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발해가 국명이고 수도가 홀한성이었던 것처럼, 정안국은 국명이고 올야성이 수도의 이름이 되는 셈이다. 거란의 경우 발해는 자신들이 멸망시켰고 식민지배를 위한 기미국으로서의 동거란국으로 그것을 대체하였던 것이기에 정식으로 정안국을 이웃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거란의 역사기록에서는 정안국라는 이름 대신 모두 그곳의 수도 이름인 올야(兀惹)로만 기재하고 있다. 반면 요나라와 경쟁관계인 송나라에서는 굳이 올야라고 돌려서 부를 필요가 없었기에 정안국이 원하는 호칭대로 기록하였음은 물론이다.
여담이지만 발해가 스스로를 부를 때 홀한(忽汗)이라는 자신들의 언어로 된 고유명사를 사용하였는데, 아마도 발해인들의 ‘홀한’이라는 발음을 듣고 거란인들은 자기들 귀에 들리는 식으로 ‘올야’라고 기록하였던 것이 정착하였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비근한 예로 1010년 고려의 발해유민 대도수(大道秀)가 거란군에 항복하였을 때 거란인들은 ‘도수’라는 이름을 듣고 발해타실(渤海陀失), 즉 발해인 ‘퉈슈(Tuóshī)’라고 기재하였던 것을 참고할 수 있겠다.
976년은 이제 부유부까지 품게 된 정안국이 국정쇄신을 위해서 연호를 새롭게 원흥(元興)으로 선포한 해였다. 이때의 정안국 국왕은 오현명(烏玄明)이었는데, 불과 6년 전에는 국왕이 열만화였으니 어쩐 일인지 성씨가 다른 국왕이 등극해 있는 셈이었다. 모종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있었든 아니면 하다못해 표면적으로라도 평화로운 권력이양이었든 무엇이든 간에 커다란 변화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여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979년에는 이웃나라 고려로 발해인들이 무려 수만 명이나 투항해왔다. 이 당시는 거란과 송나라가 한창 전쟁 중이었기에 거란에서 발해유민들이 집단 망명을 해왔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수만 명이나 되는 수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던 발해의 후예국가는 정안국밖에 없었기에 이들은 정안국 출신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어쨌거나 송나라가 본격적으로 북벌을 검토하는 것은 태조 사후 친동생인 태종(太宗)이 완수하게 되는 979년 중원의 최종 통일 이후가 된다. 송나라 입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군사강국 요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 해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실제로 태종이 979년 그해에 오랜 숙원이었던 연운(燕雲) 지역의 16주 탈환을 위해 추진하였던 북벌은 대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주목한 곳이 요나라의 배후에 있던 발해의 후예 정안국과 그 안에 망명정부로 존속해 있던 부여부였다.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고, 그렇다면 그 후예 국가가 거란의 요나라와는 철천지 원수일 것임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연파의 부여부는 거란의 공세에 쫓겨 죽기살기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악연 때문에 반거란 정서가 드높았던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이에 송나라의 협공 제안을 받은 부여부, 특히 정안국은 이를 대단히 반겼다. 정안국측에서 부여부를 대신하여 981년 10월에 자국 영토를 지나가는 여진의 사신 편으로 송나라에 답신을 보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안국왕 오현명이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본래 고구려의 옛땅인 발해의 유민으로… (중략) 그런데 몇 해 전에 거란이 무단으로 국토를 침입하여 성과 요새를 쳐부수고 백성들을 잡아 갔습니다. 그러나 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여 겨우 백성들을 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또 부여부가 일전에 거란을 배반하고 모두 저희 본국으로 망명해 왔으니 앞으로 닥칠 재앙이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천조(天朝)의 은밀한 계획을 받아 승병(勝兵)을 거느리고 가 그들의 토벌을 도와 기필코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안국 그리고 아마도 부여부의 희망과는 다르게 송나라의 2차 북벌은 결국 뒤로 미뤄졌다. 그래도 계속 송나라와의 관계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정안국은 그 이후에 두 차례 더 송나라에 사신 파견을 하였다.
(989년) 정안국의 왕자가 여진의 사신을 통하여 말과 새깃으로 장식된 화살 등을 선물하였다.
(991년) 정안국 왕자 태원(太元)이 여진의 사신을 통하여 국서를 보내왔다.
송나라측 기록에 따르면 이 이후로는 정안국의 사신 방문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바로 다음 해부터 거란의 요나라에 올야의 기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992년 2월에는 올야라는 이름으로 거란에 사신 파견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년 후인 994년 12월에 여진족이 올야가 배반하였음을 거란측에 알려왔다. 실제로 얼마 후 올야 그리고 부여부 연파의 합동작전 기록이 나타난다.
(995년 7월) 올야의 오소도(烏昭度)와 발해의 연파(燕頗) 등이 철려(鐵驪)를 침략하여… (후략)
이에 요나라는 올야 토벌을 결정하였다. 여기서 오소도는 별다른 기록은 없으나 오현명의 왕자 태원을 잇는 후계자였던 모양이다. 이 해 10월에 오소도는 위협을 느끼고는 거란측에 항복을 선언하였지만, 토벌군 지휘부는 전리품에 눈이 멀어 이를 무시하고 올야성 공성전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올야군측이 오히려 죽기살기로 나오는 바람에 올야성 함락은 실패하였고, 토벌군은 괜스레 애꿎은 올야의 동남부 지역만 약탈하고 돌아다니다가 고려와의 국경까지 다다라 회군을 하였다. 그러나 너무 멀리까지 원정을 나가는 바람에 군량미가 떨어져 죽도록 고생하고 겨우 귀환할 수 있었다. 996년 4월에 이들 무능한 지휘부는 강등당하는 등 처벌을 면치 못하였다.
그해 겨울 10월에 올야의 오소도는 다시 한번 요나라에 항복을 청하였다. 997년 3월에도 또 다시 사신을 파견해왔는데, 이번에는 조공을 줄여달라는 부탁이었다. 요나라에서도 그 사정을 이해하였는지 이를 받아들였다.
999년 6월에는 올야의 오소경(烏昭慶)이 등장하는데, 아마도 이름으로 봐서는 오소도의 동생뻘이지 않을까 싶다. 그가 새로운 올야의 지도자가 된 모양인데 전후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발해의 말기와 마찬가지로 정안국 곧 올야의 최후의 순간도 거의 정보가 남아 있지 않다. 몇 차례의 올야측 사신 파견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나 예전과는 달리 다른 부족들과 함께이고, 마치 여러 부족 중 하나일 뿐인 것처럼 다뤄지는 게 전부이다.
그러다가 1004년 9월에 여진에서 오소경의 처자식을 거란에 바치는 일이 발생한다. 그 전부터 요나라에서는 빈주(賓州)라는 옛 발해성이 있는 지역에 올야인들을 이주시키고 있었는데, 1012년에도 빈주로 올야인들을 붙잡아가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처럼 올야의 지도자 가족도 그럴진대 나머지 일반 민중들은 어떠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이제는 정말 올야 즉 정안국도 그 끝이 다가왔다.
1018년 1월 2일. 정안국 사람 골수(骨須)가 도망쳐왔다.
이 역시 전후맥락 없이 불현듯 나타나는 기사이지만, 사실 이 전후로 수많은 외국인들, 특히 다수의 거란인들이 고려로 쏟아져 들어오듯 망명해온다. 이 당시는 요나라도 성종(成宗)이라는 성군이 다스리던 시기였기에 다수의 국민들이 외국으로 망명을 떠날 이유가 딱히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서 참고할 만한 기사로는 다음의 기록이 하나 있다.
야율고욱(耶律古昱)은 (중략) 황제가 친히 발해를 정벌할 때 황피실군(黃皮室軍)을 이끌고 적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구체적인 시점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당시 발해는 곧 올야였기에 집단적으로 올야를 압박하던 시기에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여 이웃나라인 고려로 몰려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이들은 국적상 거란인들이었기에 거란 망명객 대우를 받았는데, 단 한 사람 골수만은 고집스럽게 정안국이라는 이제는 없어진 국명을 사용하였을 뿐이리라.
그렇다고 올야의 유민들이 고려로만 도망을 친 것은 아니었다. 요나라의 동쪽, 고려의 북쪽에는 독자적인 여진 사회가 존재했다.
대강예(大康乂). 발해 사람이다. 개태(開泰) 연간(1012~1020)에 여러 관직을 거쳐서 남부재상(南府宰相)이 되었고… (중략) 포로모타(蒲盧毛朵) 영역에 발해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취하자고 요청하자, 조서를 내려 그 요청을 따랐다. 대강예는 군대를 거느리고 대석하(大石河)의 타준성(駝準城)에 이르러 수백 호(戶)를 빼앗아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포로모타는 여진의 한 부족이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발해 사람들은 또 다른 기사에서는 올야 사람이라고 나오는 이들이다. 즉 발해유민 출신인 정안국의 올야인들은 이 무렵 또 다시 그들도 유민 출신으로 전락하여 이웃인 여진으로도 흘러들어가고 혹은 골수처럼 남쪽으로 고려로 넘어가기도 하였던 것이다.
정안국은 불확실한 건국시점만큼이나 패망시점 역시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나마 추정해본다면 대량의 난민들이 발생하였던 1016~1018년 사이가 실질적인 멸망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을 뿐이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몰락하였듯 그 후예인 정안국 역시 이름조차 올야라고 축소되어 불리더니 결국 이 무렵 언제인가에 본진이 혁파되어 최종적으로 요나라에 부속된 일개 부족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물론 이들은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발해유민들이 띄엄띄엄 역사에 등장하듯 정안국 사람들도 올야라는 작은 사회로 존속하며 드물게 역사에 기록을 남기곤 한다. 더 이상 독립국가가 아니라 그저 이름뿐인 유민집단이긴 하지만 말이다.
# 참고자료 : 책부원귀, 구오대사, 송사, 요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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