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신라인 석우로, 역사의 희생양이 되다

위클리 히스토리 2026. 1. 5. 12:09

신라의 제10대 국왕인 석나해(昔奈解, ?~230)가 196년에 즉위하였다. 그가 즉위하게 된 이유는 운명의 장난같은 것이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의 석씨 왕조의 유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그의 할아버지인 제9대 벌휴(伐休)이사금은 전임자인 제8대 아달라(阿達羅)이사금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국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석(昔)씨 왕가는 그렇게 석벌휴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역사는 평화롭게 즉위가 이루어진 것처럼 나와 있으나 아달라이사금의 말년 10년간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말 아무 문제 없이 왕위가 이어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벌휴이사금은 184년에 즉위하여 196년에 사망하였다. 문제는 그의 두 아들인 태자 석골정(昔骨正)과 둘째 석이매(昔伊買)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원래는 태자의 아들, 곧 벌휴이사금의 장손자가 왕위를 이어야 했을 텐데, 첫째의 두 아들 석조분(助賁)과 석첨해(沾解)가 너무 어리다보니 그래도 둘째의 아들이 그 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차기 국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석나해였다. 다만 큰아버지의 아들들이 멀쩡히 성장중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나중에 큰 걸림돌이 된다.

 

여하튼 신라는 마치 후대의 고려를 보는 듯 왕실 내에서는 거의 족내혼 혹은 근친혼이 일상적이었다. 석나해는 어린 사촌여동생과 결혼을 하는데, 곧 큰아버지 석골정의 딸이었다. 또 사촌간인 석조분은 나중에 석나해의 딸과 결혼하였다.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함부로 재단하면 안되는데, 여하튼 이는 왕실의 순수혈통을 보존한다는 의미가 있었다는 점만 이해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나해이사금(재위 196~230) 치세의 신라는 건국 2백 년 가량 된, 아직은 성장하고 있던 지역의 강소국이었다. 서기 2세기까지의 역사를 다룬 정사 <삼국지>에서 진한(辰韓) 12국 중 하나인 사로국(斯盧國, Sīlú)이라고 부른 나라가 바로 신라였다. 나중의 삼한통일의 주역이 되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이 당시의 신라는 백제, 왜, 말갈 등 이웃 세력들의 잦은 침략을 받을 만큼 동네북 신세였다. 그나마 가야에 대해서만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점이 다행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석리음(昔利音, ?~220)석우로(昔于老, 207(?)~253)가 그들이다.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석리음이 그냥 왕자인 데데 반해 동생인 석우로가 오히려 태자로 나오는 것을 보면 혹 배다른 형제지간이 아닐지 싶다. 특히 석리음은 207년 일찍부터 성인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반면 석우로가 단독으로 활약상을 보이는 것은 231년으로 시간차가 상당히 크다. 신라 왕실이 혈통을 중시 여겼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자면 석리음과 달리 석우로는 석조분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중간층인 아버지 둘이 동시에 부재한 상황에서 석씨 왕조의 혈통을 잇기 위해 부득이 나해이사금은 어린 아내를 맞아들이는 조혼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 때문에 석우로의 활약은 그가 뒤늦게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형 석리음의 경우 날음(捺音), 내음(㮈音) 등으로도 이름이 표기되는데. 리(利)자가 이롭다는 뜻도 있지만 원래의 기본 의미는 예리(銳利)하다고 할 때와 같은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신라인들이 거칠부(居柒夫)를 한자식으로 황종(荒宗)이라고도 쓰듯, 석리음은 한자식 표현이고 발음할 때에는 석날음으로 하지 않았었을까 싶다.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한자식 이름을 사용하겠지만 참고로 알아두면 좋겠다.

 

그리고 나해이사금은 왕자 석리음을 207년 봄 1월에 이벌찬(1등급)으로 임명한다. 왜였을까? 나의 추론은 이 무렵에 석우로가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정식으로 왕위를 이을 부계, 모계 모두 석씨 왕조의 피를 이은 태자가 태어났기에, 첫째긴 해도 이제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장성한 아들은 다른 쓰임새를 가져야 하였던 것은 아닐지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버지 나해이사금은 사랑하는 아들 석리음을 최대한 배려해주었다. 이벌찬은 왕족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등급이었다. 거기다 그에게는 전국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나해이사금이 즉위 시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긴 했어도 즉위 전에는 이미 아들 석리음이 태어났을 테니, 그렇다면 이 당시엔 잘 해야 10대 후반이지 않았을까 싶다.

 

젊은 석리음은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했다. 당장 다음 해인 208년 여름 4월에 왜(倭)인들이 국경을 침범해 왔는데, 이벌찬 석리음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그들을 막아낸 것이다. 전투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침략을 막아낸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이 그리 부족하지는 않았었음에 틀림없다.

 

이 당시 신라는 이웃한 가야(加耶)와의 관계 설정이 핫이슈였다. 물론 ‘가야’라고 하면 단일한 한 나라가 아니었다. 오늘날로 치면 여러 크고작은 도시국가들의 연합체같은 모습이 가야였는데, 그래서 그 중 하나를 지칭할 때에도 가야라고 하기도 하고 전체를 통칭할 때에도 가야라고 하기에 각 경우마다 기록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난해한 일이다. 이때 신라에 다가온 것은 가야의 여러 도시국가들 중에서도 주변국의 압박 때문에 독자생존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아라국(阿羅國, 경상남도 함안)이었다. 그들은 212년 봄 3월에 왕자를 사신 겸 볼모로 신라에 보내왔다. 이미 앞서 신라측에 화친을 청해오긴 했었지만 이 정도면 앞으로 신라에 의지하겠다는 강한 의사표현이었다.

 

그들이 그래야 했던 이유는 당면한 현실 때문이었다. 그 무렵 일명 포상(浦上) 8국, 즉 해안가 및 물가를 끼고 있는 8개의 도시국가들이 포위하듯이 아라가야를 공동 공격할 것을 모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야의 왕자가 신라까지 찾아와서 구원을 요청한 이유였다. (포상 8국의 이름이 전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보라국(保羅國, 위치 미상), 고자국(古自國, 경상남도 고성) 혹은 고사포(古史浦, 경상남도 고성), 사물국(史勿國, 경상남도 사천), 골포(骨浦, 경남 창원 마산합포), 칠포(柒浦, 경상남도 함안) 정도는 알려져 있다.)

 

그해 가을 7월에 실제로 포상 8국은 실력 행사에 돌입하였고, 신라측에서도 아라가야의 요청에 따라 이벌찬 석리음 장군이 신라 6부의 중앙군은 물론 지방군까지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결과는 신라군의 압승이었다. 8개 도시국가 연합군은 심지어 장군들이 전사할 정도로 완패하였고, 석리음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아라가야인 6천 명을 되찾아왔다. (기록에 따라서는 이 전쟁에 국왕이 태자 석우로도 함께 보낸 것으로 나오는 것도 있는데, 만약 맞다 해도 212년 무렵이면 아직 어린아이였을 거라서 정식으로 사령관으로서 출진한 것은 아니고 국왕이 형 석리음에게 동행시켰던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포상 8국도 당장은 항복하였지만 그들 모두가 첫 패배에 순순히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3년 후인 215년에 그 중 골포, 칠포, 고사포의 3국 연합군이 우회하여 갈화성(竭火城, 경상남도 울산)을 공격해왔다. 지리상으로 보건대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마도 신라의 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나해이사금이 직접 나섰다. 갈화성에서 3국의 공격을 잘 막아낸 것은 물론 신라군의 거센 반격에 3국은 또 다시 대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포상 8국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신라를 노리는 외침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수백 년을 더 이어나갈 백제의 공격은 참으로 집요했다. 포상 8국 전쟁의 와중인 214년 가을 7월에 백제도 신라를 공격해왔다. 신라 서부의 요거성(腰車城)이 공격을 받았고 성주인 설부(薛夫)가 전사할 정도로 타격이 컸다. 이에 포상 8국과의 1차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이벌찬 석리음이 재출격하였다. 그는 정예군 6천 명을 지휘하여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하였다. 시간은 흘러 218년 가을 7월에 또 다시 백제군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 경상북도 경산)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번에는 나해이사금이 진두지휘하여 백제군을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나해이사금에게 가슴 아픈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220년 봄 3월, 아들 석리음의 때 이른 죽음이 그것이었다. 국왕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는 역사는 침묵한다. 그저 새로운 인물인 충훤(忠萱)을 이벌찬으로 승진시킨 다음 석리음이 담당하던 군사 총괄을 맡겼다는 기록만 전해진다.

 

백제군은 222년 겨울 10월에 이번에는 신라의 우두주(牛頭州, 강원도 춘천?)로 밀고 들어왔다. 이벌찬 충훤이 과거 석리음이 그러했듯 직접 방어에 나섰다. 그는 웅곡(熊谷, 위치 미상)에서 백제군과 대결하였는데 전투에서 패하자 군대는 내팽개치고 혼자서 말을 달려 도망왔다. 이에 나해이사금은 그를 강등시켜버리고 대신 연진(連珍)을 이벌찬에 임명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다행히 이벌찬 연진은 총훤과 달랐다. 그는 또 다시 2년 후인 224년 가을 7월에 봉산(烽山, 위치 미상) 아래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군이 1천 명의 사상자를 냈을 만큼 대승을 거두었다. 그 직후에 신라는 그곳 봉산에 새로 산성을 축성하였다. 이렇게 방어진지로 마련한 봉산성은 이후에도 백제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장소가 된다.

 

어느덧 나해이사금도 왕위에 있은 지 무려 35년이 되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지방순행을 할 정도의 체력과 건강이었지만 그도 세월의 힘은 이길 수가 없었다. 230년 봄 3월, 나해이사금이 세상을 뜨자 그의 사위이자 원래 큰아버지의 장남이었던 석조분이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신라의 제11대 국왕인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이다. 나해이사금에게는 정식으로 태어난 아들이 있었지만, 왕위는 할아버지 벌휴이사금이 당초 설계했던 대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들을 태자로까지 삼았던 것을 보면 아마도 나해이사금은 자신의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고 싶었던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신라의 국왕이라는 자리가 결코 절대군주가 아니었다는 점, 즉 할아버지 벌휴이사금 본인도 사실 국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을 만큼 범사회적 추인이 필요한 문화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새로 등극한 조분이사금이 처음에는 자신이 즉위한 해에는 연충(連忠)을 이찬(2등급)에 임명하여 군사와 국정을 모두 담당하게 하였다가, 바로 다음 해인 231년 7월에 전왕의 아들인 석우로를 등용하여 마찬가지로 이찬으로 삼고 군사 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면 20대 중반쯤 되는 조카 석우로가 국왕에게는 다행히 정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권력다툼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면 결코 병권을 내줄 리도 없고, 심지어 목숨을 붙여둘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실제로 석우로는 이찬 등급에 대장군 자격으로 곧바로 이웃나라인 감문국(甘文國, 경상북도 김천) 토벌에 나서서 성공적으로 그 나라를 격파하고, 그 땅을 완전히 신라의 영토로 복속시켰다. 첫 출정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젊은 나이임에도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던 형 석리음을 잇는 차세대 군 리더으로서의 첫 관문을 잘 통과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신라는 강소국이긴 해도 아직 군사 대국은 못되었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왜인들의 빈번한 신라 침공이었다. 그것도 국경지대도 아닌 신라의 수도가 포위당할 정도로 왜인들의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232년 여름 4월에 왜인들의 급습에 수도 왕성인 금성(金城)이 포위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분이사금이 직접 전선에 나가 싸워서 적군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경무장 기병대에게 추격전에 나서게 하였고, 왜군은 1천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도망가버렸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또 다음 해인 233년 5월에 또 다시 왜병들이 신라의 동쪽 국경지대를 공격해왔다. 두 달 후인 7월에 왜인들이 재차 침략해오자, 이번에는 이찬 석우로가 사도(沙道)에서 반격에 나섰다. 구체적인 전장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양측의 해상전이 벌어졌고, 석우로의 기지로 바람 방향을 따라 화공을 가해서 적군의 전함을 불태워버리니 타고 있던 왜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석우로 덕분에 이때 대승을 거둠으로써 한동안은 왜군의 신라 침입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244년 1월에 이찬 석우로는 승진하여 서불한(1등급)이 되었다. 이제 어느덧 마흔에 가까워져 원숙한 장년에 접어든 그는 신라 정부에서 국정과 군사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하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236년의 골벌국(骨伐國, 경상북도 영천) 복속이나 240년 백제의 서부 침공에 역할을 하였을 테고, 그런 제반 활동의 결과물이 이번 최고위직 승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는 조분이사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다. <삼국사기>의 찬자가 정확히 평가하였듯 그는 전쟁에서 이기거나 혹은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 않는 법을 잘 알았다. 245년 10월에 고구려가 북부 국경을 침범해오자 석우로가 직접 출정하였다. 하지만 북방의 강자 고구려도 어지간한 실력자들이 아니었기에 석우로도 승전은 고사하고 밀려나서 마두책(馬頭柵, 위치 미상)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미 겨울이었던지라 밤이 되자 병사들이 추위로 고통스러워 하자, 총지휘관인 석우로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병사들을 위문하였고, 직접 장작에 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있을 수 있게 해주었다.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원래같으면 자기 안위에만 신경쓰기에도 바쁠 총지휘관이 그 시대에 이런 솔선수범을 보이자 병사들이 너도나도 감격하였음은 물론이다. 그 덕분에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강공을 결국 버텨낼 수 있었다.

 

재위 18년 만인 247년에 여름 5월에 조분이사금도 사망하고 그의 친동생인 석첨해가 왕위를 이었다. 그가 곧 신라의 제12대 국왕인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 247~261)이다. 그런데 어느덧 석우로의 시대도 저물어 가는 것이 보였다. 첨해이사금은 즉위 다음 해인 248년 봄 1월에 이찬(2등급) 장훤(長萱)을 서불한(1등급)으로 승진시키고는 국정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동급이 된 서불한 석우로의 국정 지분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또 첨해이사금은 2월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해 평화조약을 맺었다. 군사 분야의 또 다른 지분 역시 그만큼 또 줄어든 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렇게 그냥 앉아서 죽으란 법은 없었다. 해가 바뀌어 249년 봄 1월, 옛날부터 신라에 복속되어 있던 사량벌국(沙梁伐國, 경상북도 상주)이 갑자기 배신해서 백제에 귀순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이에 석우로가 모처럼 출정하여 토벌전에 나섰고, 성공적으로 사량벌국을 멸망시키고는 아예 신라의 직할영토로 만들어버렸다. 아직 군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은 꽤 쓸만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결국 잡아먹히게 마련인 법이다. 첨해이사금은 정부 운영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249년 가을 7월에 궁궐 남쪽에 도당(都堂), 즉 남당(南堂)을 건립하였다. 단순히 건물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목적은 서불한을 임명해 국정 운영을 개인에게 위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남당이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국왕부터 재신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새로운 정치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새 술에 맞춰 새 부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새 부대가 준비되었으면 새 술을 부을 때였다. 우선 신진인사인 양부(良夫)를 이찬(2등급)에 임명하는데, 그는 나중에 서불한까지 승진하게 되는 인물이다. 또 당시 부도(夫道)라는 가난하지만 능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인재를 영입하여 아찬(6등급)에 임명하고 당시 재무부에 해당하는 물장고(物藏庫)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소위 자금줄을 움켜쥐었다. 이처럼 첨해이사금은 자신의 친위 체제를 차근차근 갖춰나갔다.

 

문제는 새로운 국왕 하에서 점차 자신의 지분을 잃고 있던 석우로였다. 그의 기분이 어떠했을 지는 기록은 없지만 안 봐도 비디오일 것이다. 231년 20대 중반의 나이에 국가적 영웅이 된 다음 마은 전에 이미 신라 사회의 최고위직까지 올랐던 그가 어느덧 세 번째 국왕을 맞은 지금은 졸지에 찬밥 신세로 전락하였으니 속으로든 겉으로든 신세한탄을 할 만하지 않았었을까 싶다. 다만 그것이 개인 차원이면 그나마 문제가 그렇게 크게 비화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53년에 왜국에서 사신으로 갈나고(葛那古)가 신라에 와서 객관(客館)에 머물렀는데, 서불한 석우로가 사신 접대를 맡았다. 나중에 영객부(領客府)라는 이름으로 개칭되기 전에는 왜전(倭典)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담당하였었는데, 이 역할의 수장으로는 나중의 직제를 참고하자면 대아찬(5등급)부터에서 각간(1등급)까지 임명 가능했다. 그런데 왜국 사신인 갈나고의 직급이 얼마나 높은지는 알 수 없으나 동시대 일본측 기록에 전혀 그런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1급 인사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서불한 석우로가 접대를 맡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만큼 입지가 좁아지고 위상이 추락한 그였기에 국왕도 이제 그를 이 정도 일이나 맡기는 데 활용하게 된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석우로도 그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던지, 사신인 갈나고와 말장난이나 치면서 시간을 떼웠다. 그런데 그의 시덥잖은 농담 한 마디가 한순간 외교적 문제로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당신에 왕을 소금 만드는 노비로 만들고 왕비는 밥 짓는 여자로 삼아야겠소이다.”

 

분명 그가 한 말은 도가 지나쳐도 많이 지나친 것이었다. 정보는 없지만 사신에게 술 대접을 하다가 본인이 거나하게 취해서 크게 말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나 짐작된다. 어쨌든 갈나고도 왜국의 신하 입장이었기에 아무리 농담이어도 선을 너무도 많이 넘은 그의 발언을 본국에 보고하여야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왜왕이 격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신라를 공격해왔다. 어찌나 그 공격이 격렬했던지 첨해이사금이 우유촌(于柚村, 위치 미상)으로 피신해야 했을 지경이었다. 모든 게 다 자신의 세 치 혀 때문이었으니 죽을 마음으로 석우로가 자진해서 나섰다.

 

“지금의 이 상황은 제가 말을 조심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니, 마땅히 제가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는 왜군 진영을 찾아가 말하였다.

 

“예전의 말은 그저 장난이었을 뿐인데, 어찌 여기까지 군대를 보내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소?”

 

왜인들은 대꾸는 하지 않고 그저 그를 사로잡아 장작을 쌓은 곳 위에 묶어두고는 불태워 죽이고 돌아갔다. 253년 4월 어느 여름 날의 일이었다. 이때 신라에는 용이 궁궐의 동쪽 연못에 나타났고, 또 신라의 왕성 남쪽에 쓰러져 있던 버드나무가 저절로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는 기상이변도 이어졌다. 모든 것이 이때의 석우로의 비극적인 몰락을 상징하는 듯했다.

 

시간은 더 흘러, 조분왕의 사위였던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 때였다. 왜국의 대신이 예물을 지참해서 신라를 국빈 방문하였다. 이때 조분왕의 딸이자 석우로의 아내였던 명원부인(命元夫人)이 국왕에게 자신이 왜국 사신을 접대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전례에는 없던 일이지만 명원부인의 누이가 곧 자신의 아내였기에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던 미추왕 입장에서도 굳이 못하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한 명원부인은 왜국 사신을 잔뜩 취하게 만들었다. 인사불성이 된 것을 확인한 그녀는 힘센 장사를 시켜서 그를 마당으로 끌어내게 한 다음 불에 태워 죽이는 것으로 옛날 자기 남편에 대한 원한을 갚았다. 이를 알게 된 왜인들이 또 다시 복수를 하겠다고 신라의 왕성인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번에도 이기지는 못하고 돌아갔다. 그렇게 그녀의 복수는 잔혹하게 완수되었다.

 

그런데 석우로 아내의 보복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본기나 <삼국유사>에는 없고 <삼국사기> 열전에만 전해진다. 심지어 미추왕대의 본기에는 왜의 침공 기록 자체가 없다. 그저 백제의 반복된 침략 기사만이 다음과 같이 한가득 남아 있을 뿐이다.

 

266년 가을 8월에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하자, 성주 직선(直宣)이 용맹한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우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272년 겨울 11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략하였다.
278년 겨울 10월에 백제군이 쳐들어와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자, 왕이 파진찬 정원(正源)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283년 가을 9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략해 왔다.
겨울 10월에 (백제군이) 괴곡성을 포위하자, 일길찬 양질(良質)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혹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가 왜와 백제를 혼동하여 기재한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있는 글자를 임의로 바꿔서 읽는 것도 문제일 것이다. 그나저나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는 일본에까지 전해져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神功皇后) 신화에도 녹아들게 된다. 그 신화에서는 (석)우로 서불한이 우류(宇流, 우로) 조부리지간(助富利智干, 서불한)으로 발음만 비슷하게 바뀌어 전해진다. 허황된 이야기이긴 하나 그나마 신화 속에서는 석우로가 신라의 왕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가 만약 알았더라면 작게 미소 정도는 지었을 지도 모르겠다.

 

일본서기 속 신공황후 전설

 

참고로 왜인들이 석우로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당시 석우로의 아들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기여서 다른 사람이 안아서 말을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 살아생전에 아들의 미래를 내다본 석우로가 주위에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건 분명 이 아이일 것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아이는 커서 나중에 신라의 국왕까지 오르게 된다. 그의 이름은 석흘해(昔訖解, 252(?)~356)로, 제16대 국왕인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 310~356)이 그이다. 그렇게 그는 후대에 자신의 핏줄을 남겨 아쉽게도 자신은 차마 갖지 못했던 국왕의 꿈을 그의 자식 대에서는 이루게 된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