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탐라, 제주(濟州)의 시작

위클리 히스토리 2026. 1. 26. 14:11

   오늘날 제주(濟州)는 한국의 내륙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비행기를 통해 방문하고 있는 제주, 연간 1천만 명이 넘는 관광객수가 말해주듯 등락은 있을지언정 제주는 꾸준히 애정과 관심을 받아오는 최고의 여행지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제주가 아닌 이보다 2천 년 전의 탐라(耽羅)는 어떠했을까?

 

   아쉽게도 여러 유물들을 제외하면 2천 년 전에는 탐라에 대한 기록조차 남아 있는 게 없다. 3세기의 한반도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인 중국 정사 <삼국지>에는 마한(馬韓) 서쪽의 바다에 주호(州胡)라는 이름의 섬나라가 있었다고 나와 있지만 그것이 오늘날의 제주와 같은 곳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장 확실하게 제주, 그 당시 탐라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백제와의 관계 속에서이다.

 

(476년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恩率)로 삼았다.

 

   이 왕은 백제의 제22대 문주왕(文周王)으로, 백제의 수도를 웅진(熊津), 곧 오늘날 충남 공주로 옮긴 인물이었다. 능력은 부족했지만 부드러운 성품 덕에 국민의 사랑은 받았던 그는 즉위 이듬해에 탐라의 방문을 받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계략에 의해 수도 한성(漢城)이 무너지고 또 형 개로왕(蓋鹵王)마저 죽음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그가 잇게 된 왕위였다. 여기서 은솔은 백제의 관등 16품 중 3품에 해당하는 높은 등급이었기에 그가 탐라를 예우한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불과 즉위 만 2년 만에 암살당함으로써 백제 정권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 때문인지 탐라는 백제와 추가적인 외교를 진행한 흔적이 한동안 발견되지 않는데, 그 다음 기록은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다.

 

(498년 8월) 왕이 탐라가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직접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었으므로 그만두었다. (탐라는 곧 탐모라(躭牟羅)이다.)

 

   문주왕 사후 그의 13세 아들인 삼근왕(三斤王)이 잠시 왕위를 이었다가, 그 역시 2년 2개월만에 요절하자 다시 왕위를 승계한 것이 문주왕의 동생이었던 곤지(昆支, ?~477)의 아들 모대(牟大), 즉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이었다. 강한 왕권을 주창하였던 동성왕은 무려 만 22년간 장기집권을 하면서 상당부분 그 꿈을 이룬 인물이다. 비록 그가 독재자적 면모가 강하긴 하였어도 바로 그 직전까지 두 명의 왕이 암살과 요절로 끝맺었던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국가를 위해서는 정권 안정이 더 필요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여하튼 그의 강한 성격답게 집권 20년차에 그는 외교 문제를 빌미 삼아 탐라 정벌을 추진하였다. 다만 이는 상당 부분 블러핑(bluffing)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정말로 정벌을 하고자 하였다면 저렇게 상대방이 다 알도록 소문을 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심지어 급습을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정보가 다 새어나가고도 또 상대방이 다시 사신을 보내올 만큼 느릿느릿하게 행군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 탐라에서도 동성왕의 이런 움직임을 다 파악하고 그의 요구사항에 맞춰 저자세를 취해줌에 따라 탐라 정벌은 없었던 일로 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내용은 동일하지만 <삼국사기>와는 시점이 다른 기사가 전해진다.

 

(508년 12월) 남해의 탐라인(耽羅人)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

 

   <삼국사기>보다 32년이나 늦은 시점인데, 혹시나 <일본서기> 특유의 기년 오류인가 싶기도 하지만, 단순히 연도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월도 차이가 크다보니 혹 출전이 다른 기초사료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참고로 508년은 곤지의 또 다른 아들인 사마(斯摩, 462~523), 곧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한 지 7년이 되는 시점인데, 고구려와 말갈의 공세를 막아내느라 여념이 었던 시기이기도 해서 시점의 정확도는 약간 의심스럽긴 하다.

 

   혹은 어쩌면 앞서의 탐라 외교가 산발적인 것이었다고 하면 이때의 통교는 좀 더 밀접한 관계, 예컨대 부속에 준하는 수준의 상하관계가 시작된 것을 기록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 추정의 이유는 기본적으로 <일본서기>의 백제 관련 기사는 백제인들이 남긴 기록에 근간하고 있는데, 백제인들이 508년을 탐라인들과의 첫 통교의 시작으로 본 데에는 그만한 사유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백제의 관점이고, 또 이웃나라 신라는 탐라가 백제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시점을 달리 바라보았다. 신라측 기록에 따르면 탐라가 백제로부터 좌평(佐平)이라는 16품 관등 중 최고위인 1품을 받는 시점은 무덕(武徳) 연간(618~626), 곧 7세기 초경으로 인식하고 있다. 탐라가 나라를 바치고 멸망을 한 것이 아니기에 백제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은 계속해서 외교관계상 그 지위를 바꿔나간 것에 대한 기록으로 이해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후 탐라에 관해서는 거의 백 년 가까이 아무런 소식도 없다. 그러다가 다시 역사에서 탐라가 등장하는 것은 한 우연한 사건 때문이다.

 

(589년) 전함 한 척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탐모라국(𨈭牟羅國)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적에 백제를 경유하니, 창(昌)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다.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진(陳)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 수서(隋書)

 

   이는 수(隋)나라가 무려 2백 년이나 지속된 남북조 시대를 끝마치고 중원을 통일한 해에 일어난 작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참고할 만한 정보는 우선 탐모라 곧 탐라가 국(國)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독립국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탐라에 불시착하였던 수나라 전함이 곧장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탐라의 도움을 받아 먼저 백제로 보내졌는데, 그렇게 백제왕 창 즉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으로 보건데, 여전히 탐라는 백제와 모종의 상하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자연스럽게 알 수가 있게 된다.

 

   참고로 위덕왕은 무령왕의 손자인데, 아버지 성왕(聖王)이 554년에 신라의 매복에 걸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즉위한 국왕이었다. 무려 45년이나 장기집권을 하였으나 백제의 중흥을 이루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뒤를 이어 동생 혜왕(惠王)과 또 그 아들 법왕(法王)이 연달아 즉위는 하지만 둘 다 즉위 이듬해에 세상을 뜬다. 그리고 무왕(武王)을 거쳐 마지막 의자왕(義慈王) 대에 백제는 그 운명이 다하게 된다. 그럼 그 사이에 탐라는 어떤 활동들을 하였을까? 이제부터는 시선을 옆으로 옮겨서 이웃나라 신라를 살펴보도록 하자.

 

   신라의 수도에 그 유명한 황룡사 9층탑이 세워진 것은 645년 3월로,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의 일이다. 그 황룡사탑의 건축을 제안한 이가 해동(海東)의 명현(名賢)이라고 불리던 안홍(安弘)인데, 그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라는 책에 기술한 내용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아홉 한(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거란,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

 

   신라 역사 내내 끊임없이 왜(倭) 즉 일본과 말갈이 침입해왔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중화와 오월은 중국을 달리 표현한 것이며, 거란이나 여진(여적)은 만주의 북방민족이고, 예맥은 보통 고구려 계열의 민족을 구분하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탁라(托羅)인데, 바로 탐라이다. 이들이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신라 입장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느낄 정도로 모종의 적대적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미루어 짐직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탐라도 상국 백제의 쇠락에 고민이 많았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도 나름 국제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을 모색했다.

 

(661년 5월 23일) 탐라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중략) 탐라가 아사쿠라(朝倉)의 조정에 들어온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다. - 일본서기()
(661년 8월) 탐라국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 책부원귀(당나라)
(662년 2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중략) 이때에 이르러 항복해서 속국이 되었다. - 삼국사기(신라)

 

   즉 탐라는 지역 맹주였던 백제가 660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곧바로 새로운 헤게모니를 찾아 방황하였다. 유리도라와 도동음률이 같은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아직 탐라는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직 백제의 잔존세력이 백제의 멸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부흥운동을 벌이면서 거기에 탐라도 동참한 동향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663년 최종적으로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의자왕의 두 아들 부여충승(夫餘忠勝)과 부여충지(夫餘忠志) 및 지원군으로 참전하였던 왜의 잔당 그리고 탐라의 사신(耽羅國使)이 항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666년에 진행된 당나라 태산(泰山)의 제사에는 신라, 백제, 탐라, 왜 이렇게 4개국의 사신들이 유인궤의 인도로 바다건너 서쪽으로 따라 간 것으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여기서 신라는 연합군의 한 축이었지만, 그외의 3국인 백제, 탐라, 왜는 패전국으로서의 참석이었음이 분명해진다.

 

   백제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면서 왜와 공조해본 경험이 탐라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661년의 첫 관계 이후 탐라는 665년을 기점으로 왜국에게 본격적으로 사신 파견을 보내기 시작했다.

 

(665년 가을 8월) 탐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66년 봄 1월 11일) 탐라가 왕자 고여(姑如) 등을 보내 공물(貢物)을 바쳤다.
(667년 가을 7월 11일) 탐라가 좌평 연마(椽磨)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669년 3월 11일) 탐라가 왕자 구마기(久麻伎)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18일에 왕자 구마기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673년 윤6월 8일) 탐라가 왕자 구마예(久麻藝)·도라(都羅)·우마(宇麻)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673년 8월 25일) 다자이후(大宰)에 명하여 탐라의 (중략) 국왕과 사신 구마예 등에게 처음으로 작위를 주었다. (중략) 그 나라의 좌평에 해당한다. 곧 쓰쿠시(筑紫)에서 귀국하였다.
(675년 8월 1일) 탐라에서 사신으로 왕자 구마기가 쓰쿠시에 이르렀다.
(675년 9월 27일) 탐라의 왕인 고여(姑如)가 나니와(難波)에 이르렀다.
(676년 2월 24일) 탐라의 사신에게 배 1척을 주었다. (가을 7월 8일에 탐라의 사신이 돌아갔다.)
(677년 8월 28일) 탐라가 왕자 도라를 보내 조공하였다.
(684년 겨울 10월 3일) 사신을 탐라에 보냈다. (이들은 이듬해 8월 20일에 돌아왔다.)
(688년 8월 25일) 탐라의 왕이 좌평 가라(加羅)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9월 23일에 가라 등에게 쓰쿠시관(筑紫館)에서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주었다.)
(693년 11월 7일) 탐라의 왕자와 좌평 등에게 (선물을) 주었다.

 

   탐라인들이 왜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비단(錦) 14필, 염색비단(纈) 19필, 붉은비단(緋) 24필, 감색베(紺布) 24단, 복숭아 염색 베(桃染布) 58단, 도끼(斧) 26개, 낫(釤) 64개, 작은칼(刀子) 62개와 같이 섬유류와 도구류가 많았다. 또 5곡의 종자(穀種)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대략 살펴보자면 왕자 급의 사신 파견이 눈에 띄는데,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나중에 탐라의 왕까지 오르게 된다. 또 좌평의 경우 백제의 관등인데 백제 멸망 이후에도 탐라는 줄곧 그 관등을 자체적으로 고위급 관료에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탐라의 사신을 맞이한 장소로는 탐라국왕이 직접 방문한 케이스인 혼슈의 나니와(오늘날 오사카) 한 차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쓰쿠시라는 오늘날 규슈 북부의 후쿠오카 부근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는 탐라뿐만 아니라 신라, 발해 등의 사절단도 마찬가지였다. 끝으로 왜국측에서도 탐라로 사신 파견을 한 흔적이 수차례 발견되는데, 이는 역시 외교란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무려 30년 간을 이어온 왜와의 친선 관계도 7세기가 끝나가면서 함께 마감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속일본기>에 전해지는 다음의 기사를 보면 8세기 들어서서는 일본인(왜국에서 국명을 변경)이라고 해도 탐라인들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778년 11월 10일) 견당사(遣唐使)의 제4선(船)이 (중략) 표류하다가 탐라도(耽羅嶋)에 도착하여 섬사람에게 노략질당하고 억류되었다. 다만 녹사(錄事) 등이 몰래 밧줄을 풀고 도망갈 것을 모의하여 남은 무리 40여 명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779년 당나라 사신에게 일본측에서 탐라의 노략질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 당시 탐라는 신라를 제외하고는 일종의 쇄국정책이 강화되었던 시점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때의 탐라는 신라에 완전히 줄을 데고 있었던 것 같다.

 

   여러 모로 신라와 왜의 양국을 타진하던 탐라가 앞으로 나아갈 길은 명확해졌다. 그것은 미래권력인 신라를 향한 화친이었다. 그리고 승자 신라는 이러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679년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둘러보게 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구체적인 상황은 전해지지 않지만 탐라측에서 내실을 다 공개할 정도라면 이미 전향적으로 친신라로 정책적 방향성을 정립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때의 신라왕은 김춘추(金春秋)의 맏아들 문무왕(文武王) 김법민(金法敏)이었다. 676년에 나당전쟁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그는 한숨 돌리고는 삼한통일 이후의 안정을 위해 힘을 쏟았는데, 예컨대 고구려 유민들로 이루어진 보덕국(報德國)의 왕 안승(安勝)을 자신의 조카와 혼인시킨 것도 이 기사 이듬해의 일이다. 반면에 마치 짠 것처럼 677년 탐라 왕자의 왜국 방문 이후로는 탐라와 왜국 사이의 외교 기록은 급감한다. 이로써 추정해보자면 탐라 입장에서도 이제 한반도에 평화를 안착시킨 신라에 미래를 걸어볼 만하다고 확실히 판단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나서부터는 백 년이 넘도록 탐라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아무런 동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국내질서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의미와 다름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사이 신라와 탐라간의 교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757년 12월 경덕왕(景德王) 때에 지역의 명칭을 일괄 변경할 때에 탐라와의 교류 창구였던 백제 시절의 동음현(冬音縣)을 탐진현(耽津縣)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즉 역사 기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신라가 본격적으로 탐라와 교류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그곳의 지역 명칭마저도 탐라로 건너가는 곳이라는 뜻의 탐진현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이름은 고려시대 말까지도 줄곧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신라와 탐라간의 교류 기록은 다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801년 겨울 10월) 탐라국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교류가 더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은 것이 이뿐인 것인지, 아니면 차츰 소원해져서 기록으로 남길 일조차 없어지게 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만약에 후자라면 9세기 이후 신라가 승자의 저주를 겪으며 혼란의 세월을 보내게 된 탓이 컸을 것이다.

 

   이상 대외관계를 통한 탐라의 역사를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탐라 내부의 모습을 한 번쯤 조망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타깝게도 국내 사서에서는 탐라의 문화를 설명한 부분이 없다. 부족하나마 <북사>, <수서>, <당회요>, <자치통감> 등의 중국측 역사서 기록을 참고해보도록 하자. 우선 탐라는 한반도의 서남쪽 바다에 위치한 커다란 섬인데, 바다 건너로 5일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고 한다. 탐라의 섬 크기는 남북 1천여 리, 동서 수백 리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옛날 기록들이 그렇듯 과장이 좀 들어가 있고 동서남북이 바뀌어서 그렇지 오늘날 실측 사이즈인 동서 73km, 남북 31km와 아주 큰 차이는 아니다. 그곳의 토산물은 노루와 사슴이었다. 참고로 탐라에서 말이 유명해지게 되는 것은 고려 후기의 일이다.

 

   또 탐라에는 성벽(城隍)이 없었는데, 주민들이 평화로워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럴 만큼 커다란 전쟁이 빈번하게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나 싶다. 탐라의 주민수는 호구(戶口) 기준으로 8천 정도 되었다고 하며, 5개 부락(部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탐라의 주민들은 활, 칼, 방패, 창 등 무기를 다룰 줄 알았지만, 피지배층 다수는 문자를 사용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주민들의 집은 둥근 담장에 초가지붕을 얹은 형태였다고 하니 오늘날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공통적으로 탐라가 백제에 부속되어 있었다고 하며, <자치통감>은 좀 더 나중의 일까지 반영하여 신라로 넘어간 사실까지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여기까지가 고대 탐라의 역사이다. 턱없이 부족한 정보를 기반으로 정리해본 결과가 대략 이 정도이다. 이 이후 중세시대의 탐라가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후삼국시대, 즉 고려가 등장한 다음이 된다. 이제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에 완전히 줄을 선 이후 탐라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 지는 나중에 다른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속일본기, 수서, 구당서, 자치통감, 당회요, 책부원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