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주장들이 있다. 한번 그 근거가 되는 것들부터 살펴보고 넘어가보자.
가탐(賈耽)의 지리 기록
가탐은 8세기 후반에 활동한 당나라의 관료였다. 고구려 유민인 왕사례(王思禮)와도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것은 관료로서의 업적보다는 개인적으로 지리학을 무척 좋아해서 관련된 지리책과 지도까지 편찬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저작은 없지만 다행히 <신당서>의 지리지에 그의 글이 다수 남아 있다. 그렇게 우연찮게 발해에 대한 지리 정보도 그의 글을 통해 일부가 전해진다.
등주(登州, 산동반도 동북쪽 끝)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배를 타고 1백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고 30리를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勺口)에 도착하니 발해의 경계(渤海之境)이다. 다시 5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성(丸都城)에 도착하는데 옛 고구려의 수도이다. 또 동북쪽으로 2백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도착한다. 다시 육로로 4백 리를 가면 현주(顯州)인데, 천보 때(742~756 사이) 도읍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6백 리를 더 가면 발해왕성이 나온다.
이 압록강을 따라가는 루트는 <신당서>에 따르면 일명 압록-조공도(朝貢道)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기록된 시점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800년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동반도는커녕 압록강 하구도 아니고 심지어 그보다 더 들어가서야 발해의 경계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래에서 따로 설명하겠다.
최흔(崔忻)의 석각(石刻)
홍려정비(鴻臚井碑)라고도 부르는 이 비석은 714년 5월 18일에 당나라에서 파견한 최흔이라는 사신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돌아가던 길에 자신의 성과를 기록하고자 그곳에 우물 2개를 만들고 그 옆에 세워둔 기념비였다. 오늘날까지도 이 비석은 남아 있는데, 다만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전 기념품으로 가져가서 현재는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석이 원래 있던 자리가 바로 “뤼순(旅顺)”, 곧 요동반도 끝자락이다.
이 비석의 내용보다는 그 위치가 중요한데, 오늘날은 고도로 발전된 산업도시 다롄(大连)으로 유명한 이곳은 요동반도의 끝에 자리잡고 있다보니, 당나라 사신이 최흔이 떠나면서 임의로 기념비를 남겼던 바로 그 시절에는 그곳이 발해의 영토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보만으로 충분히 요동반도는 발해의 것이 아니었다고 입증이 될까? 우선 최흔의 석비는 발해의 양해를 구하고 기념비를 세웠든, 아니면 임의로 설치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반드시 발해 땅이 아니었다고 하기에는 약하니 넘어가자.
가탐의 기록은 그에 비해서 그 주장의 근거가 꽤 강하다. 왜냐하면 발해의 경계를 아예 못박아 적고 있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라면 압록강 하구로부터 130리니까 대략 50km 더 들어간 위치부터 발해의 영토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그 경계(境)라는 표현이 국경을 의미하는지 그곳에 일종의 검문소 내지 세관같은 게 있어서 경계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인지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아니면 800년 즈음에는 모종의 사유로 발해가 그 국경선을 좀 더 뒤로 물려서 그곳이 국경이 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가능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가능성은 무엇이 있을까?
원래 당나라와 발해 간에는 육로로 이어지는 일명 장령(長嶺)-영주도(營州道)라는 길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발해의 장령부과 당나라의 영주(오늘날 랴오닝성 서북쪽의 차오양)를 잇는 길이다. 이곳 영주는 발해의 건국이라는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던 695년 거란족의 반란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한데, 오랫동안 당나라의 동북방 최전방 기지같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안록산(安祿山)이 755년에 일으킨 반란이 763년까지 장기간 이어지면서 그 여파로 이곳 영주는 해(奚)족과 거란 등 북방민족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 이후 더 이상 장령-영주도의 육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면서 그 영향으로 당나라와 발해는 대신 해로로 압록-조공도를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가탐의 기록 이후인 834년에 발해의 수도를 직접 방문하고 발해국기(渤海國記)라는 책을 남긴 장건장(張建章)도 오늘날 베이징 일대인 유주부(幽州府) 소속이었기에 육로가 훨씬 빠르고 편리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해로를 이용해 무려 총 1년이나 들여 멀찍이 요동반도를 돌아서 가야만 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요동반도 역시 일정 부분 거란에게 침탈당하였을 확률이 높고, 그로 인해 발해는 부득이 안전을 위해 기존의 국경선을 후방으로 물렸을 개연성이 있다. 이 추론이 맞다면 당초 요동반도는 발해의 영토였으나 거란 등의 적대세력에 의해 치고받고 하면서 그 땅을 뺏고 빼앗기며 일진일퇴를 반복하였을 공산이 크다. 이로써 보자면 가탐의 기록처럼 특정 순간의 모습만으로 그 전후의 상황도 계속 그러하였을 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요동반도가 처음에 발해의 영토였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발해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않고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결정적 증거가 있다. 때는 732년, 발해가 건국한 지 아직 3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대조영 사후 차기 국왕인 대무예(大武藝) 재위 14년차 때의 일이다.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海賊, 해군)을 거느리고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공격하였다.
대무예는 이보다 앞서 흑수말갈 공격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를 반대하던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당나라로 망명해버리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당나라에 대한 직접 공격을 추진한 것이었다. 그 1차 타격 대상이 육로가 아닌 등주, 곧 산동반도인 것을 주목해서 봐야 하는데, 이때 파병한 것도 해군이었다. 즉 바다를 건너서 공격하였다는 말이다. 이 당시 요동반도가 당나라 영토였다면 가능이나 했을 기록이겠는가.
더욱이 한두 명도 아니고 대규모 함선을 동원하여 당대 최강국과 전쟁을 벌인 것이기에 그만큼의 대비가 필요했을 테니, 한가롭게 압록강에서 소규모 배들이나 만들며 전쟁 준비를 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바다에 면한 대규모 선착장과 조선시설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러한 정보가 세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해당 지역을 광범위하게 확보하고 있어야 말이 될 테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가탐의 기록처럼 압록강으로 들어와서는 작은 배로 갈아타야 했는데, 그런 곳에서 대형 전함들을 대규모로 만들 수 있지도 못했을 게 너무도 분명하다. 이를 통해 보면 최소한 이 당시 요동반도의 해안가는 결국 발해의 관할이었음이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근거는 또 있다. <요사>에 열전이 남아 있는 야율우지(耶律羽之)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기미국가인 동란국(東丹國)에서 우차상(右次相)을 지낸 고위관료인데, 그가 발해인들에 대해 했던 의미심장한 발언도 이를 지지해준다.
양수(梁水)의 땅은 발해인들의 고향입니다.

여기서 양수는 오늘날 타이즈허(太子河)라고 불리는데, 요서와 요동을 나누는 요하(遼河, 랴오허)와 함께 흐르는 수계이다. 이를 보면 발해는 서쪽으로는 요하 근방까지 닿아 있었다는 말인데, 어찌 그 아래인 요동반도가 자국 영토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요하 동남쪽의 요동반도 역시 언젠가 발해에 귀속되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요동반도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이는 각국의 역사 기록으로 쉽게 확인된다.
841년에 발해 중대성(中臺省)에서 일본 태정관(太政官)에게 보낸 국서에서도 “해뜨는 곳은 동쪽으로 멀고 요양(遼陽)은 서쪽에 막혀 있어 두 나라 사이의 거리가 1만 리가 넘습니다.(日域東遙 遼陽西阻 兩邦相去 萬里有餘)”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발해가 스스로를 서쪽으로 막혀 있는 요양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요양 땅이 발해의 주요 영토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양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의 랴오양시이다. 정확히는 요동반도의 끝이 아니라 내륙쪽에 위치해 있지만 이곳이 결코 발해의 최전방 도시가 아니라 오히려 발해의 주요 도시였던 만큼, 여기까지가 발해의 경계가 아닌 이를 포함한 너른 지역까지가 발해의 영토였음을 자연스레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거란과 발해가 최후의 대결을 펼치던 10세기 초반까지도 요동반도를 중심에 둔 양국간의 분쟁은 여전했다. 발해를 멸망시키는 주역인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활동이 일부이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다.
(918년 12월) 요양의 옛 성(遼陽故城)에 행차하였다.
(919년 2월) 요양의 옛 성을 수리하여 한인과 발해인들로 채우고는, 동평군(東平郡)으로 개칭하고 방어사를 두었다.
이 당시는 발해가 쇠락을 거듭하던 시기였는데, 반대로 야율아보기는 요동 땅에서 수년에 걸쳐 옛 발해의 영토를 잠식해 가면서 발해 공략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는 직접 압록강을 다녀오기도 하고 그해 5월에야 요양의 옛 성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이후 924년 5월에 발해의 마지막 국왕 대인선(大諲譔)이 거란을 공격하여 자국 주민들을 되찾아온 일도 있었다. 이곳 요양은 발해가 비록 물러나긴 했어도 원래 고향이라고 부르던 오랜 영토였다. 그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았기에 야율아보기도 발해 침공 전 이곳부터 차지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당나라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데, 왜냐하면 당나라 기록상 스스로 요동반도를 되찾았다는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을 보면 840년경 당나라 등주에 신라관(新羅館)과 함께 발해관(渤海館)이 나란히 있는 것이 목격된다. 장보고(張保皐) 덕분에 유명한 신라관처럼 발해관도 발해인들의 재외공관같은 곳이었는데, 당나라가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발해관이 굳이 바다 건너 등주에 있을 필요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거칠게나마 정리해보자면, 안쪽으로 요양이 자리 잡고 있던 그 당시 요동반도는 건국 초 언젠가부터 발해가 차지하였던 것은 분명하고, 이후 점차 이웃한 적대국가인 거란과 끊임없는 갈등 끝에 점진적으로 잠식되어 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면서 “발해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라고 말했던 것은 요동반도를 사이에 둔 두 세력간의 오랜 다툼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리라.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조선의 옛 땅을 전쟁도 하지 않고 줄어들게 만드는 격”이라면서 시야가 좁은 조선의 학자들을 비꼰 적이 있는데, 지금도 역사계를 보면 간혹 그런 문화적 풍토의 잔재를 느끼곤 한다. 실증이라는 미명 하에 지엽에만 매몰되어 전체 맥락을 읽지 못하는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중국의 역사학자로 진위푸(金毓黻, 김육불)를 꼽기는 하지만, 아래와 같은 글들은 참으로 보기 민망하다.
발해의 왕 무예가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하였다. 또 별도로 영주를 공격하여 마도산에 이르렀다. 요동의 남부를 마치 무인지경처럼 종횡으로 말을 내달렸다. 또한 안동도호부가 요서로 물러난 것은 요동 남부가 불안했던 것을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 가령 이 지역이 발해의 점령지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분명 불시에 출몰할 수 있는 지역은 되었을 것이다.
빙 돌려서 말했지만 핵심은 요동반도를 당나라가 차지하지 못하였음을 말한다. 그와 동시에 발해가 그곳을 차지하지 못하였음을 바라는 개인적인 희망까지 느껴진다. 마음만 먹으면 불시에 출몰할 수 있는 지역이라면 최소한 그 정도의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었다고 봄이 더 타당한 해석이 아니겠는가. 그의 바람은 다른 글에서 다시 확인이 가능하다.
현재로써는 비록 요 초기에 당인의 수중에서 요동 남부를 차지하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발해로부터 취했다는 것은 요사 지리지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실제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요동 남부를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것을 거란의 요나라가 빼앗았다는 내용인데, 이게 말인지 막걸리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록의 부분적 잘못만 찾을 뿐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부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요동 남부가 마치 여전히 당나라의 소유였던 양 뉘앙스만 풍기고 있다. 이를 한때 유행한 표현으로는 정신승리라고 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당시 요동 남부 지역은 구탁(점령은 하였으나 포기한 지역)과 같아서 당나라 사람이 소유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다. 발해가 침략하여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감히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중략) 거란이 요동 남부를 차지한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버려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된다.
초기 중화민족주의자였던 이의 자기위안일 따름이다. 당나라가 물러났는데 발해는 왜 감히 차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고, 나의 적이 차지한 것은 내가 그저 버려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참으로 근거 없는 자기최면의 결과일 따름이다.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이런저런 가정들을 동원하여 복잡하게 이해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불필요한 조건들을 걷어내고 그 상황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게 더 이해가 쉽고 합리적이라는 논법이다. 발해의 요동반도도 이리저리 복잡하게 조건을 들이대가며 가정해서 볼 것이 아니라, 그저 간단하게 발해가 요동반도를 한동안 실질적으로 점유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자료를 해석하는 게 오히려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논리적으로 어려움이 없다. 진위푸가 보여준 동북지역 태생 역사학자로서의 과거 경험과 지식에 기반한 복잡한 가정법을 걷어내고 보면 오히려 역사적 실체는 훨씬 단순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굳이 국수주의적으로 요동반도는 발해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오롯이 발해의 영토였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짐작컨대 2대 무왕 때에는 차지하였던 것이 확인되지만, 대략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초까지는 발해의 사신 기록이 당나라에 제대로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는데, 이는 역으로 말해 발해 사신이 당나라까지 가지 못하게 된 물리적 환경이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873년에 당나라로 파견된 발해 사신단이 뜬금 없이 일본 규슈 서남단에 표착한 일이었다.
우연찮게도 이들을 발견한 일본측에서 심문을 하자 이들은 답변도 정확히 하지 않은 채 몰래 도망을 쳐버리는데, 다음 해에 이들이 귀국하면서 또 다시 서해를 이용하지 않고 동해로 멀리 돌아서 발해로 돌아가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이는 즉 기존의 육로도 끊기고 또한 어쩌다 요동반도를 상실하여 해로마저 이용할 수 없게 되자 부득이 멀지만 한반도를 우회하여 당나라로 향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더 이상 기록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거란이 이 당시에는 발해의 서남부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었다고 보면 크게 틀림이 없을 듯하다.
이처럼 하나의 사실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 수시로 변해가는 것이다. 요동반도는 발해의 것일 수도 있고 어느 때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 전체 기간을 퉁쳐서 처음부터 차지한 적이 없다거나 혹은 내내 우리 땅이었다고 단정짓고 우길 필요는 없다. 사회나 정치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혹여나 내가 스스로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언제나 유의하고 또 유의하여야 할 일이다.
# 참고자료 : 발해고(류득공), 신당서, 요사, 만주원류고, 동북통사(김육불), 발해국지장편(김육불), 입당구법순례행기(엔닌), 최흔 석각, 장건장 묘지명, 연혁도칠폭(영남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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