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연개소문의 아내

위클리 히스토리 2026. 1. 12. 23:11

679년 1월 29일, 옛 고구려의 격전지 중 하나였던 요동의 신성(新城). 그곳의 요동 전역을 담당하는 안동도후부 관사에서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淵男生, 634~679)이 숨을 거두었다. 이때 겨우 46세였으니 한창 때 나이였는데, 사인은 모종의 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구려 멸망 후 9년 만에 다시 요동 땅으로 돌아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통치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나름 열심히 옛 고향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불과 2년 만에 눈에 띄게 악화된 건강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의 뜻을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연남생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당 황제는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큰 공로로 상을 넘치게 받았으니, 은혜로운 임명은 생전에 흡족했으며, 후한 예우로 죽은 뒤에 추증을 하니, 사망한 뒤에 받은 영예가 크다. 충성과 절의를 드러내고 밝히는데 어찌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가 있겠는가. 특진 행우위대장군 상주국 변국공 연남생은 5부의 우두머리였고, 삼한의 영걸이었다. 자질은 총명했고, 지식은 깊고 원대했으며, 군사 관련 모의에서 은밀히 마음속의 계책을 내었고, 무예에서 크게 실력을 발휘하였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궁벽하게 거하면서도 진심과 정성을 다했다. 위태로운 곳을 떠나 안정된 곳으로 나아갔으니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도리에 맞았고, 따름으로써 거스름을 이겼으니 능히 요수(遼水)와 패수(浿水)의 물가를 깨끗이 하였다. 아름다운 공적은 멀리서 드러냈고 높은 관직이 거듭 주어졌으니, 안으로는 북군(北軍)을 관장하여 황제가 거처하는 궁전을 평안히 받들었고, 밖으로는 동쪽의 물가에 임하여 청구를 밝게 안정시켰다. 고구려의 땅에 머물며 교화하다가 갑자기 빨리 먼저 떠났으니, 죽음을 고함에 놀람과 슬퍼함이 너무도 깊다. 마땅히 직책을 올려주고 추숭하는 전례를 따라, 사지절대도독(使持節大都督, 종2품) 병주·분주·기주·풍주 4주 제군사,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추증하고, 나머지는 예전과 같이 한다.

 

그리고는 담당관청이 예를 갖춰서 책봉을 이행하였고 부의도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장례 비용은 모두 관에서 지급하였고 장례용품까지 모두 지원하였다. 수도에서 4품의 관직자를 의례를 담당하는 홍려소경(鴻臚少卿)으로 임시 파견하여 제반 처리를 감독하게 했으며, 의장 및 악대를 무덤까지 다녀오도록 했다. 또 5품의 관리에게는 황제의 조서를 전하면서 애도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당나라 조정도 애도하는 의미로 3일 동안 정사를 쉬었으며, 시신을 담은 관이 도착한 날에는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조문을 다녀오도록 하였다. 그만큼 고인에 대한 당나라 조정의 대우는 남달랐다. 그간의 공로와 행적을 생각하여 시호를 양공(襄公)이라 하였고, 거의 1년이 다 되어 그 해 연말인 12월 26일에 관례에 따라 낙양(洛陽)의 망산(邙山) 들판에서 하관하였다.

 

장례식의 상주는 연남생의 아들 위위사경(衛尉寺卿, 종3품) 연헌성(淵獻誠)이 맡았다. 원래는 그 말고도 형제가 더 있었는데, 13년 전인 666년에 벌어진 고구려 내전 당시 둘째 아버지 연남건에 의해 아마도 형이었을 연헌충(淵獻忠)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까닭에 이번의 장례는 연헌성 혼자 치르게 되었다. 아마도 온갖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연개소문의 겨우 쉰을 넘긴 나이게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 여파로 작은아버지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구려를 내란의 한복판에 던져넣었던 것도 떠올랐을 테고, 또 그 때문에 급박하게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아버지에게 이렇게 제안하였던 것도 기억났을 것이다.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적극적으로 설득한다면 그들도 든든한 우군이 생겼다는 생각에 저희를 환대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지원군을 요청하여 전력을 합쳐 반란군을 치는 것이 우리가 제일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일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의 생각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면서 동조하였다. 그의 제안대로 사신 파견을 통해 당나라를 고구려 내전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고, 연헌성은 이후에 자신이 직접 당나라를 찾아가 황제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하였다.

 

결국 아들의 제안은 2년 후 결정적으로 고구려의 파멸로 이어졌으나, 대신 그들 연씨 가문은 반역자를 제거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멀리 있는 적보다 가까운 원수가 훨씬 더 밉기 마련이고, 또 누구나 나와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법인데, 이들도 그런 인간적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다만 역사의 죄인이라는 인식은 후대의 우리들이 사후에 붙이는 평가일 뿐이다.

 

여하튼 연남생의 장례식에는 궁궐의 조문단은 물론 사자와 인연이 있는 이들부터 남은 가족들과 지인인 이들까지 조문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아들 연헌성은 진정 효자였던 듯,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매우 고통스러워하였고,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면서 너무도 가슴 아파하였다.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주변에서 보기에도 극히 애달파 보였다고 한다.

 

연헌성이 아예 곡기도 끊고 몸이 상할 정도로 피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하자, 그의 할머니가 나서서 손자에게 건강을 챙길 것을 힘써 권하였다. 하지만 마음이 이미 무너져 있었던 연헌성이 그녀의 말도 듣지 않자, 그녀는 결국 손자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곡기를 끊었다. 할머니의 헌신적인 모습에 놀란 그는 그제서야 이성을 되찾았고 다시 조금씩 식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할머니를 달래서 같이 식사를 하셔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이로써 겨우 할머니와 손자는 함께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의 연개소문 탈 - 국립민속박물관

 

그녀가 바로 연개소문의 아내였다. 역사에는 이름도 남아 있지 않은 그녀는 언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언제 연개소문과 결혼하였는지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첫째아들을 634년에 출산한 것을 보면 가임연령을 감안했을 때 최소한 620년 이전에는 태어났을 것이다. 614년생 남편과는 그럼 몇 년 차이가 나지 않는 10대 중후반에 혼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결혼했다고 해서 단번에 임신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으니 임의로 한번 추정해보자면, 617~8년경 전후에는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634년부터 639년까지 총 남자아이 셋을 낳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걱정 없이 나름 행복한 삶을 즐기지 않았었을까 싶다. 하지만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불안과 공포 속에 빠져들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시아버지, 곧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대로(1품)에 고구려의 군사를 총괄하는 막리지(2품)를 역임한 연태조(淵太祚)가 일찍 세상을 뜨자 아직 20대에 불과했던 남편은 주위의 반대로 아버지의 자리를 승계받지 못하였다. 사유는 그가 너무 강성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시절에 이미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하였던 전례가 있었던 지라 국왕부터 대신들까지 누구 하나 그 아들까지 권력을 오롯이 하는 점에 있어서 반대가 심하였다. 이에 남편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이며 자리만 계승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언제든 다시 박탈해가도 감수하겠다는 말도 안되는 저자세로 읍소하며 귀족들을 찾아다녔다. 초상을 치르느라 바쁜 와중에서도 가문을 위해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체면 불구하고 허리를 굽히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의 성격을 잘 아는 그녀 입장에서도 보기 딱했을 것이다.

 

어쨌든 다행히 조건부로나마 겨우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게는 되었으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남편은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641년 늦가을 혹은 초겨울에 대신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부병(部兵)들의 사열식을 함께 참관하자고 하였다. 별 의심없이 모여든 180여 명은 준비된 연회를 즐겼는데, 잠시 후 그의 신호에 부병들이 달려들어 모두 처단하였다.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쿠데타였다. 당시 국왕이었던 영류왕도 궁궐에서 붙잡혀 시해당하였다. 자신을 머리 숙이게 만들었던 이들에 대한 피의 복수를 보여준 것이다.

 

아내도 이 위험천만한 일에 깜짝 놀랐을 텐데, 이후의 남편의 행동은 거칠것이 없었다. 직접 막리지에 오른 그는 병권을 쥐고 국정을 총괄하였다. 새로 국왕을 세우고, 신라를 공격하여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백제 등 주변국들을 외교의 장으로 끌어들였으며, 강대국 당나라의 예상되는 공세에 사전 대응하는 등 그는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예상대로 당나라는 645년 고구려를 전격 침공해왔다. 일진일퇴의 격전 끝에 결국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는 침략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지난한 장기전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당나라는 이후에도 거의 매년 크고작은 전쟁을 걸어왔고 고구려는 매번 그 침공을 이겨냈다. 심지어 당 태종 사후 아들 고종이 즉위한 다음에도 당나라의 대고구려전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661년 초까지 이어진 줄기찬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가 최종 승리하자 당나라도 드디어 공격을 멈추었기에 그 오랜 야심을 접는 줄로 다들 생각하였다. 아마도 연개소문 자신도 이제 다 되었다고 믿고 이 해에 큰아들을 자신의 후계자인 막리지로 임명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상황이 돌변했다. 연개소문이 51세의 나이로 너무 빨리 사망한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기에는 이후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도 극단적이었기에 그 슬픔을 오롯이 느낄 여유도 없었을 지 모르겠다. 664년 10월, 고구려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던 그가 사라지자 고구려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죽기 전 걱정이 되었던지 세 아들에게 화합을 강조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주위에는 형제를 이간질하는 모략꾼들이 득실거렸다. 장남 연남생이 공식적으로 막리지의 자리를 잇긴 하였지만 둘째와 셋째 동생이 형을 완전히 마음 속으로 따르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이들의 모략은 이 둘의 마음 속에 불만을 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결국 연남생이 지방 순행을 나간 사이에 둘째 연남건이 주도하여 평양에서 국왕을 볼모로 삼아 스스로 막리지에 오르더니 평양에 남아 있는 형의 아들 연헌충을 죽이고 곧바로 형까지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 다음은 저 위에서 미리 보았듯이 또 다른 아들 연헌성의 제안대로 형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함으로써 결국 고구려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어머니인 그녀의 역할은 기록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분명 나서서 아들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을 터이나 이미 굴러가기 시작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되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그녀의 최종 위치가 평양성 안이었는지 아니면 장자인 연남생의 진영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추정컨대 큰아들쪽에 있었지 않았었을까 싶은데, 그렇게 보는 이유는 나중에도 줄곧 큰아들 및 손자와 함께 하는 것이 제일 크지만, 또 다른 근거는 평양성 함락 후 둘째 연남건이 당나라로 끌려가 처분을 기다릴 때에 첫째 연남생이 동생을 살려줄 것을 간청하여 사형 대신 유배형으로 낮춰준 데에 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동생을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하였다는 건 그가 대인배여서일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가능성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게 죽은 자기 자식보다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동생을 더 애틋하게 생각하였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딱 하나뿐이다. 이 형제의 엄마인 그녀의 간곡한 부탁, 그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동생을 제발 살려달라고 첫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눈에는 평양성에서 자살 시도까지 한 둘째 아들이 아무리 그 동안 잘못을 저질렀어도 결국 자식은 자식이었기에 그대로 비참하게 죽게 놔둘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 외에는 연남생이 자기 자식까지 죽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동생을 살려줄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어머니의 힘은 그만큼 위대했다. 그녀는 둘째 아들만 살린 것이 아니라 앞서 보았다시피 손자도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힘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679년 9월에 당 황제는 아직 상중이던 연헌성에게 탈상(脫喪)을 명하고는 정양군토반대사(定襄軍討叛大使)에 임명하여 전쟁에 나서게 하였다. 아무리 효가 중시되는 유교사회였어도 상중임에도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상을 중단하고 참전하였고 전후에 공적을 세워 귀환하였다. 이로부터 3년 후인 682년에는 아버지 연남생의 작위였던 변국공(卞國公)을 이어받도록 하였으니 당 정부의 그에 대한 인정은 꽤나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해에 연개소문의 아내도 결국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대략 추산해보면 60대 초중반의 나이였을 테니 당시로서는 짧은 인생은 아니었다. 그래도 3년 전 손자 연헌성을 살렸던 그녀의 노력도 자신을 향해서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평생토록 독재자의 배우자이자 고구려를 멸망케 한 아들들을 둔 죄 많은 어머니의 인생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가족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였던 강인한 한 인간의 삶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을 조건없이 아껴준 할머니의 상을 치르기 위해 직계손자였던 연헌성은 자진해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그는 2년여의 시간을 오롯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보냈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연남산(淵男産) 묘지명, 연남생(淵男生) 묘지명, 연헌성(淵獻誠) 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