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발해는 고구려인가 말갈인가?

위클리 히스토리 2026. 1. 2. 10:14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국가인가, 아니면 말갈족 최초의 국가일까?

 

사실 이는 학문적인 질문으로 봐야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정치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 발해에 대해서는 남과 북이 거의 한 목소리로 고구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하며, 러시아에서는 고민 없이 말갈인들의 나라라고 말할 것이다. 이 중에 일본은 유일하게 발해와 영토적으로는 겹치지 않지만, 만주국 시절의 깊은 연관성 때문에 이들도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후대에서 과거로 시간흐름을 역으로 밟아나가는 순간 일종의 경향성, 혹은 고정관념 내지 편견이 생긴다는 점이다. 소위 ‘답정너’처럼 마음 속으로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거슬러 올라가봤자 내가 보고 싶어하는 결론밖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다 내려놓고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여, 오히려 “동시대인”, 그리고 특히 “발해인” 스스로는 발해를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았는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동시대인 1번 타자로 신라인을 소환해보자. 바로 그 유명한 최치원(崔致遠, 857~?)이다. 그는 한 번은 드라이하게, 또 한 번은 격정적으로 발해를 언급한 바 있는 인물이다.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습니다. -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는 본래 말갈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성하여 무리가 이루어지자 이에 속말(粟末)이라는 작은 나라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고구려 유민을 따라 강제로 내지로 옮겨졌는데 (중략) 당시 고구려의 잔당과 물길(勿吉)의 잡다한 무리가 있었는데, 백산(白山)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강도짓을 하는가 하면 흑수(黑水)에서 사납게 굴며 기승을 부리고는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란과 합쳐 악행을 조장하다가 이어 돌궐과 공모하는 등 10년 동안 반기를 들고서야 뒤늦게 중국에 항복하는 깃발을 들었습니다. (후략) -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최치원 - 국립중앙박물관

 

재밌게도 신라인인 최치원은 이성적일 때는 발해를 고구려 유민의 나라라고 불렀고, 소위 열폭(?)할 때에는 말갈의 족속이라고 깔보는 이중 잣대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당대의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할 지라도 어찌 되었든 그도 사람이었던 지라 분명 인간적인 한계는 있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여기서 문제는 어느 게 더 역사적 실체에 가깝느냐이다.

 

둘 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편지의 한 구절인데, 전자는 당나라에 신라 사신단에게 현지에서의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의 한 구절이고, 후자는 발해측에서 발해인과 신라인의 과거합격자 순서를 바꿔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한 신라인으로서 짜증이 한 가득 담긴 감사 의견서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엔 상대국 발해를 한껏 깔아뭉개고 업신여기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자의 내용이 이성에 기반한 것이니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본 발해의 현실이었을 확률이 높다.

 

더욱이 신라는 북국 발해와 사이가 안 좋았다. 아무리 ‘북국(北國)’이라고 부른다 해도 그것이 결코 사이가 가깝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로 위의 후자의 글의 제목 자체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로, 발해를 북국이라고 호칭은 하면서도 사실은 열심히 흉을 보는 내용이라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국경을 맞댄 두 나라가 역대 절친이었던 사례는 역사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이번엔 또 다른 신라인 한 명을 호출해보자. 다음은 726년에 당나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오랫동안 숙위(宿衛)를 하였던 김충신(金忠信)이 734년에 당나라 황제에게 쓴 글의 일부분이다.

 

제가 받은 지시는 폐하의 문서를 가지고 본국에서 군사와 말을 징발하여 말갈을 쳐서 없애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보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후략)

 

참고로 당나라는 이보다 앞서 713년에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인정해주면서 발해와 정식 외교관계를 개설한 상태였지만, 732년에 대조영의 아들 무왕 대무예가 당나라의 등주(登州) 곧 오늘날 산둥반도 지역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양국간의 사이는 극도로 멀어진 상태였다. 따라서 당나라에서는 발해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들을 발해말갈로 다시 낮춰 부르며 이를 갈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신라인인 김충신도 당나라의 혐-발해 분위기에 맞춰서 그들을 말갈이라는 비칭으로 부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라인들의 혐-발해 정서는 꽤 깊었던 모양인데, <삼국사기>가 비록 고려시대에 쓰인 책이긴 해도 그 원천은 신라 기록들을 많이 참고하였던 점을 착안해서 보면, 신라가 733년 당나라의 요청으로 ‘말갈’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하려고 하였다든지, 고구려 멸망 후 그 지역 대다수를 ‘발해말갈’이 차지하였다는 등의 기록은 신라인들이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886년에 국경 수비를 담당하던 북진(北鎭)에서 신라 정부에 보고를 해온 내용에서도 발해의 지방민을 가리켜 ‘적국인(狄國人)’이라고 호칭한 내용도 전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신라의 옛 기록에서는 또 정반대되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의 성은 대(大)씨이고,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 <신라고기(新羅古記)>

 

이처럼 최치원이 이성적일 때 하였던 발언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반-발해 정서가 강할 때에는 말갈의 후예로, 머리가 차분한 상태일 때에는 고구려의 후예로 기록하는 패턴으로 정리해볼 수가 있겠다.

 

그렇다면 혹 신라 사회의 상층부 말고 일반 신라인들은 발해를 어떻게 여겼을까? 재밌게도 이를 우연히 목격한 일본측 기록이 하나 있다.

 

839년. 8월 보름 명절(중추절)을 지냈다. 이 명절은 여러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신라국에만 유독 이 명절이 있다. 노승 등이 말하기를 “신라국이 발해국과 서로 싸웠을 때 이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 날을 명절로 삼아 음악과 춤을 추며 즐겼다. 이 행사는 오래도록 이어져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온갖 음식을 마련하고 가무와 음악을 연주하며 밤낮으로 이어져 3일 만에 끝이 난다. 지금 이 산원에서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오늘 명절을 지냈다. 그 발해는 신라에 토벌되어 겨우 1천 명이 북쪽으로 도망갔다가 후에 되돌아와 옛날대로 나라를 세웠다. 지금 발해국이라 부르는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 <입당구법순례행기>

 

엔닌 동상 - Wikipedia

 

이를 기록한 것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인데, 신라의 장보고(張保皐)와 동시대인으로 중국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던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을 직접 목격했던 그 인물이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던 그는 재당 신라인들이 해준 말을 기억에 의존해 받아적었던 모양인데, 신라와 전쟁을 벌였던 것은 고구려였으니 그 부분만 제대로 바꿔서 읽어보면, 결론적으로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발해를 세웠다고 당시 일반 신라인들은 이해하고 있었다는 기록인 것이다.

 

그럼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는 어떠했을까? 특히나 발해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인 당사자였던 고려의 입장에서는 이웃나라 발해를 혹 다르게 바라보았을 여지는 없을지 한 번 보자.

 

옛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의 성을 근거지로 … 개국하여 발해라고 이름지었다. - <제왕운기>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었다. 고구려 사람인 대조영이 요동으로 달아나 차지하였다. 당에서 발해군왕으로 봉하니 이로써 스스로 발해국이라 불렀다. - <고려사>, <고려사절요>

 

여기에 더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도 개인의견으로서 발해는 말갈의 별종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같은 고려인들의 기록임에도 이들 자체도 혼선이 적지 않았음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이 <발해고(渤海考)>에서 어째서 고려사람들은 발해역사를 기술하지 않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한 바 있는데, 발해유민들에게 물어만 봤어도 쉽게 정리할 수 있었던 일을 정말로 왜 안했느냐고 따져묻고 싶을 정도이다.

 

그럼 이번에는 관점을 달리해서 당시의 당나라인들은 발해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한 번 살펴보자. 우선 가장 유명한 금석문인 최흔의 석각을 보도록 하겠다.

 

칙명을 받은 지절(持節)이자 말갈을 선로(宣勞)하는 사명을 받은 홍려경(鴻臚卿) 최흔(崔忻)이 우물 2개를 파서 영구히 기념물로 삼는다.

 

이것은 714년에 새겨진 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당대의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기록이다. 여기에 따르면 당시 발해는 정식으로 발해로 국제적 인정을 받던 시점까지는 확실히 당나라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 말갈의 일파로 여겨졌음이 확인된다. 더욱이 중국측 역사서들에 남아 있는 기록들도 하나같이 거의 동일하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그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창건하고… - <통전>
말갈발해가 밖으로는 번국이라 하면서도 안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품고 있다. 지금 군사를 내어 그 죄를 묻고자 하니… - 733년 7월 신라로 보낸 당나라측 외교문서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중략) 말갈의 무리 및 고구려의 잔당이 점점 모여 들었다. - <구당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었으며, 성은 대(大)씨이다. (중략) 고구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모여 들었다.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중략) 그 아들 조영이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후략) - <신당서>
발해는 본시 말갈이라고 불렀는데 고구려의 별종이다. (중략)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후략) - <신오대사>
발해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중략) 고구려의 별종인 대조영이 요동으로 달아나 웅거하니… (후략) - <송사>

 

사실상 <송사>를 제외하면 모든 기록이 발해를 말갈의 일부로 치부하는 공통된 경향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표현조차도 암묵적으로 고구려에 부속된 말갈 계통임을 암시하는 측면도 있어서 방심하기는 아직 이르다. 또한 발해의 문화를 다루면서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다”는 표현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 역시 발해가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중간자적인 포지션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접한 영토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당나라가 아닌,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적은 바다 건너 일본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우선 두 기록을 먼저 살펴보자.

 

<속일본기> 720년 봄 1월. 말갈국에 보내어 그 풍속을 관찰하게 했다.
<다하성비(762)> 다하성(多賀城)은 (중략) 말갈국 경계로부터 3,000리 떨어진 곳에 있다. …

 

동시대의 그 누구보다도 객관적일 수 있는 당시 일본인들의 눈에는 발해가 말갈로 보였다는 기록이다. 물론 여기서의 말갈국이 발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개연성도 존재한다. 예컨대 발해보다 북쪽에는 흑수말갈이 버젓이 존재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만주 지역에서 가장 중심적인 세력은 발해뿐이었다. 흑수조차도 발해를 거쳐 외교를 하는 관행이 있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일본에서도 최소한의 정보만 확인해봐도 이 당시 만주쪽에 컨택해야 할 국가는 당연히 발해였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곧 반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계기는 727년에 발해의 제2대 무왕이 일본으로 처음 사신단을 파견하면서였다.

 

발해군(渤海郡)은 옛날의 고구려이다. (중략) 발해군왕이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인의(高仁義) 등 24명을 보내왔다. - <속일본기>

 

이 이후부터는 놀랍게도 일본측 외교기록에는 발해와 고구려가 동급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일부만 발췌해봐도 이 정도나 된다.

 

759년. 발해 사신 고남신(高南申) … 고구려 사신 고남신
762년. 발해 사신 왕신복(王新福) … 고구려 사신 왕신복
763년. 앞서 고구려(高麗國)에 배를 보냈는데 능등(能登)이라 이름하였다.
772년. “천황이 삼가 고구려 국왕(高麗國王)에게 문안합니다. (중략) 그러다가 발해군왕(渤海郡王, 발해 무왕)께서 사신을 보내와 … (후략)” - 일본에서 발해로 보내는 국서
773년 10월. 발해 사신 일만복(壹萬福)을 환송하러 간 사신이 고구려(高麗)로부터 돌아왔다.
776년. 고구려(高麗) 사신 30명이 물에 빠져 죽은 채 표류하다가 …

 

속일본기 - 국립중앙박물관

 

뿐만 아니라 일본에 남아 있는 758년도 목간에도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정식 명칭이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발해가 스스로를 고구려로 포지셔닝한 것이 일본에서는 말 그대로 먹혔던 셈이다. 그렇다면 중국 당나라와는 달리  발해는 일본측에 끊임없이 자신을 고구려의 후예라고 밝히고 설명하고 그렇게 이해하도록 노력하였다는 것이 된다. 왜였을까? 그것은 이 글의 끝에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화된 다음부터는 발해도 굳이 고구려를 강조하지 않고 발해라는 이름 그대로 외교를 지속하게 된다. 상기의 발해를 고구려로 병기한 기록들이 8세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발해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출신을 밝힌 기록은 없을까? 물론 있다. 국왕과 왕족의 육성 두 가지를 직접 들어보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옛날 풍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
“지난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강병 30만으로 당과 맞섰는데 (중략) 오늘날 우리의 군사는 고구려에 비하면 3분의 1에 지나지 않으니…”
- 무왕의 동생 대문예의 발언

 

글자 그대로 보자면 스스로를 고구려에 직접 빗대어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약간 아쉬운 것은 지리적으로 영토가 겹친다는 점에서, 즉 현대적 표현으로는 속지주의적 접근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발언만으로는 정확히 속인주의적 관점에서 자신들을 고구려인으로 보았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닌 셈이다.

 

이런 현상은 발해 멸망 후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981년 10월에 발해의 후예인 정안국의 국왕이 송나라로 보낸 국서를 읽어보자.

 

저희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 발해의 유민으로… (高麗舊壤, 渤海遺黎)

 

마치 무왕이 고구려의 옛 땅을 언급하였던 것과 마찬가지 패턴이다. 심지어 정안국은 발해의 유민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다행히 이는 고려의 서희(徐熙)가 거란의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에서 좋은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직접 살펴보자.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렇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오.
(我國卽高勾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그 옛 땅이라는 표현은 결국 그곳에 사는 이들이 곧 후손이라는 용법인 셈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심지어 직계자손이 아닐 지라도 그곳에 살고 있으면 곧 그곳 선조들의 후예로서 자격을 갖춘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 서희이든 정안국의 국왕 오현명이든 아니면 발해의 무왕 대무예이든 마찬가지 사고방식이었다.

 

왜 1천 년도 더 지난 후대인들은 우리는 굳이 인종을 찾고 민족을 찾고 종족을 찾는 것일까? 과거 역사속 인물들은 일일이 핏줄을 찾아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굳이 그럴 필요성 자체도 못느꼈는데 말이다. 그곳에 살고 있으면 곧 내가 주인이 되는 그런 사고방식과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발해인들이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고왕 대조영이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것도 고구려 소속이었던 속말말갈 출신인 것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그곳에 살고 있고 정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발해인이라는 정체성은 이처럼 자신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지 선조로부터 주어지거나 남이 인정해주어야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발해인 스스로 내가 발해인이라고 여기면 그것이 곧 발해인이었다.

 

끝으로, 통계 하나만 보고 글을 마무리하겠다. 그렇다면 왜 발해인들은 일본에는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또 중국에는 굳이 그런 부분을 철저히 감추면서 오히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갈로 인식하도록 방치를 하였던 것일까?

 

<발해고>에 나오는 국왕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성씨를 각국에 파견된 사람들끼리 묶어셔 통계를 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당나라 사행 일본 사행 ※ 고구려 망명
대씨 55.6% 고씨 32.6% 대씨 40.0%
고씨 11.1% 왕씨 8.7%    
오씨 11.1% 양씨 8.7%    


실제 발해 내의 인구구성을 알 길은 전무하지만, 당나라와 일본 각각에 서로 다른 접근을 하였다는 것을 이처럼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당나라 외교는 대씨 왕족들이 주로 담당하였고, 일본측에는 고구려 계통인 고씨 집단이 주로 활동하였음을 한 눈에 봐도 알 수가 있다. 이것만 보아도 중국 당나라는 발해를 속말말갈 출신으로 고구려 내에서 무신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대씨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발해는 곧 말갈이라고 받아들였을 여지가 크다. 또한 일본에서는 자신들을 방문해오는 발해인들, 특히 옛날 고구려 고씨들의 활약을 보면서 당연히 발해는 곧 고구려라고 인지하였을 공산이 크다. 이는 분명 발해가 의도적으로 노린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참고로 고려로 망명을 떠나온 이들의 비중을 볼 때 왕족인 대씨가 40%로 높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기준점으로 삼아서 보아도 당나라에 대씨가 훨씬 많이 사신 파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이는 확실히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높은 확률로 발해는 이웃한 강대국 당나라에는 자신들을 고구려가 아닌 말갈로 포지셔닝함으로써 수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줄곧 남아 있던 고구려 트라우마(trauma)를 자극하지 않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역으로 일본에는 과거 역사에서 친밀하게 지내왔던 고구려를 일부러 연상시킴으로써 원활한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게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발해가 철저하게 외교 상대방을 분석하고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발해고, 고려사, 고려사절요, 구상서, 신당서, 신오대사, 송사, 입당구법순례행기, 속일본기

 

# 금석문 : 최흔 석각(714), 일본 목간(758), 일본 다하성비(762), 장건장 묘지명(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