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후삼국, 발해, 고려... 그 사이의 경계인들

위클리 히스토리 2025. 12. 29. 21:01

오늘날의 국경선은 상당히 엄격하고 철저하게 관리된다. 국가를 이루는 3대 요소로 통상적으로 영토, 국민, 주권 이렇게 세 가지를 드는데, 실제로 그 중 하나인 영토가 곧 현대 국가들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기에 세계의 온갖 곳에서 땅(혹은 바다까지)을 가지고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 고대와 중세 국가들은 어떠했을까? 재밌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선, 즉 선으로서의 국경 구분은 정말 근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사실 과거에는 선이 아니라 면으로서의 국경지대가 존재했을 뿐 오늘날처럼 국경 검문소같은 두 국가가 딱 마주서서 선을 긋고 관리하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DMZ처럼 너른 중간영토가 일종의 국경선 역할을 하였는데, 이 또한 정확하진 않은 것이 왜냐하면 서로 각자의 빈틈없는 선을 관리하는 방식은 그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경지대에 성(城)이나 진(鎭)같은 군사시설이 점점이 배치되어 있던 게 중세 이전의 국경 개념이라고 보면 대략 맞다.

 

그리고 국경선이라는 게 꽤 광대한 지역이어서 그 점들조차 결코 빼곡히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듬성듬성 드문드문 널찍하게 포진되어 있었다보니 사실 그 사이로는 서로 넘나드는 민간인들도 꽤 많았을 것이다. 특히나 서로 맞닿아 있는 양국이 내부사정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 와중이라면 더욱이 국경 방어가 허술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국경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양쪽을 오고가는 더 많은 중간자들이 생겨났을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 역사에서 그런 경우를 찾아보자면 북방의 원나라가 명나라로 교체되던 시기와 겹치는 고려말 조선초가 있고, 또 그 전에는 북국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던 당시 남국 신라도 극도의 혼란기를 맞아 후삼국으로 분열을 하여 나중에 고려로 재통일되던 시기가 있었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시대가 가깝기도 하여 관련 자료들이 꽤 풍부하게 남아 있는데, 그렇다면 후자는 어떠했을까? 오늘은 한번 이 후삼국시대에 한반도 북부에서 활동한 중간자적 존재들, 소위 경계인(marginal man)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북쪽에서 남쪽으로 온 케이스부터 살펴보자.

 

905년. 평양의 성주이자 장군인 검용(黔用)이 궁예에게 투항해왔다.
또한 평양 바로 서쪽에 위치한 증성(甑城)에서도 적황색 복장의 도적단을 이끌고 있던 명귀(明貴) 세력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이는 상당히 놀라운 기록인데, 905년이면 물론 발해가 많이 쇠락한 시기이긴 해도 아직 멸망까지는 21년이나 남아 있던 시점이다. 즉 이 당시 평양은 공식적으로 발해의 영토였기에 한 마디로 평양성의 발해인 성주가 후고구려로 망명해온 것은 큰 사건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를 믿지 못하는 학자들은 검용을 신라인인데 북쪽으로 이동한 호족이 아닐까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바로 연이어 등장하는 명귀 세력의 경우 도적단으로 묘사한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논리가 무너지게 된다. 후자 역시 궁예에게 자진하여 항복해왔는데 단순히 도적단이라고 표현된 것을 보면 전자는 이들과 달리 정식으로 장군 직책을 수행하던 고위 인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위직은 아니어도 능력만으로 인생의 경로를 스스로 개척한 이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행파(金行波)라는 인물을 꼽을 수 있다.

 

922년. 이해에 대승(3품) 질영(質榮)과 행파(行波) 등의 가족 전부와 여러 지역의 양가 자제들을 서경으로 이주시켰다. / 김행파는 통주(洞州) 사람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해 태조 왕건이 그의 성씨를 김(金)으로 정해주었다. 태조가 서경을 방문하였을 때 김행파는 사냥꾼들을 거느리고 길에서 알현하고서는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기를 요청하였고, 이틀 동안 두 딸을 각각 하룻밤씩 모시게 하였다. 그 둘은 나중에 비구니가 되었는데 태조 왕건이 서경에 명하여 성 안에 대서원(大西院), 소서원(小西院) 두 절을 지어주고 각각 그곳에 거주토록 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왜 그가 후삼국시대의 경계인이라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힌트는 사냥꾼이라는 키워드에 있다. 이 당시 사냥은 일개 취미가 아니가 생계를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 즉 아무나 사냥을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사냥을 통해 먹고살아야만 하는 이들이 하는 생존 기술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당시 사냥을 하였던 이들은 거의 다 북방 계통이었다. 단적인 사례로 태조 왕건의 발언을 들 수가 있다.

 

평양의 옛 도읍이 황폐화된 지 이미 오래여서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원주민(蕃人)들이 그곳에서 사냥하며 돌아다니고 또 변경을 침략하기도 하니, 우리 주민들을 이주시켜서 변경의 방비를 굳건히 하라. (918년)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2백 년 후까지도 후삼국시대부터 이어지는 양수척(楊水尺)이라고 불린 이들이 생계로 사냥을 하면서 고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했는데, 이처럼 사냥은 전통적인 신라인 혹은 본래 고려인들이 하였던 것이 아니라 이들 입장에서는 외지인에 해당하는 북방 계열의 집단이 하던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김행파가 거느렸다는 사냥꾼들은 곧 발해의 지방민이었던 말갈 계열의 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김행파 역시 성씨도 나중에 태조 왕건에게 사성받았던 것을 보면 이들의 리더였을 확률이 높기에, 즉 그 역시 전통적인 신라인이 아니라 최소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방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통주라는 그의 출신지도 엄밀히 말하면 후삼국의 인물들이 그러하였듯이(예컨대 신숭겸처럼) 사후에 본관으로 정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외에도 약간 시차는 있지만 발해의 지방세력들이 태봉, 즉 후고구려를 이은 신생국 고려로 여럿 이주해온 기록이 발견된다.

 

921년 2월. 달고(達姑) 부족 171명이 신라를 공격하러 가는데, 고려의 장군 견권(堅權)이 중간에 기습하여 격파하였다.
(같은 달) 흑수말갈의 추장 고자라(高子羅)가 170명을 거느리고 내투하였다.
(같은 해 4월) 흑수말갈의 아어간(阿於間)이 200명을 이끌고 내투하였다.

 

여기서는 발해 멸망 후 발해유민들의 대규모 망명까지는 다루지 않겠지만, 여하튼 발해는 10세기 초에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었음은 물론 당시 거란이라는 강력한 위세의 침공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에 발해의 지방민이었던 이들이 생존을 위해 이웃나라 고려로 넘어온 기록들이 이렇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성주급 고위인사부터 일반 지방민들까지 다양한 집단들이 여러 가지 사유로 국경을 넘어온 사례들이 확인된다.

 

물론 역사에는 일방향의 이주만 있으리라는 법칙은 없다. 실제로 동시대에 남북 사이를 오고간 이들도 존재한다.

 

918년 8월. 삭방(朔方)의 골암성(鶻巖城) 장수 윤선(尹瑄)이 고려로 내부하였다. 윤선은 염주(塩州, 황해도 연안) 출신이었는데, 침착하고 용맹하였으며 군사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궁예 말년에 화를 피하여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북쪽 변방으로 달아났다. 2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골암성에 주둔하면서 흑수말갈인들을 불러 들여 변방의 마을들에 피해를 끼쳤다. 태조 왕건이 즉위한 후 사신을 보내어 돌아올 것을 설득하니 이에 따랐다.

 

그는 출신도 명확하고 처음부터 궁예의 각료로 있었음이 확인되기에, 정확히 북쪽 국경을 넘어갔다가 다시 귀순한 케이스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의 골암성은 발해의 동부 최남단이자 신라/고려의 최북단 사이의 중간 위치쯤 되었는데, 윤선이 고려로 귀순하고 나니 비어 있는 그 공간을 흑수말갈 세력이 다시 침투해 들어왔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그곳의 위상을 알 수가 있다.

 

윤선 개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집단도 신라와 발해 국경 사이를 오고간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존재한다.

 

박씨의 선조는 계림 사람으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신라가 쇠미할 때에 북원경의 도위(北京都尉)였던 박적고(朴積古, 혹은 박적오(朴赤烏))가 죽주(竹州, 경기도 안성)로 와서 찰산후(察山侯)가 되었고, 그의 아들 박직윤(朴直胤) 대모달(大毛達)이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로 옮겨와 거주하면서 십곡성(十谷城) 등 13개의 성을 건설하고 팔심호(八心戶)를 다스리며 읍장(邑長, 즉 호족)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 이래로 평주 사람이 되었다. 그는 궁예에게 귀의하였는데, 아들은 고려의 삼한공신 삼중대광(1품) 박지윤(朴遲胤)이다.

 

박경산 묘지명(고려) - 국립중앙박물관

 

원래 신라 출신인 박씨 가문은 신라 말에 경기도 안성(죽주)을 거쳐 황해도 평산(평주)에 정착하였고, 궁예에게 투항하였다가 신생국 고려에 합류하여 영달하게 되는 집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직윤이 대모달을 자임하였다는 부분인데, 그것은 고구려어로 장군이라는 뜻이다. 즉 그는 평주를 기반으로 세력을 펼칠 때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강조한 것인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 당시 신라 서북부 지역이 옛 고구려인들의 후예들이 많이 거주하던 것에 착안하여 본인 집단을 고구려 계열로 홍보하고자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원래 고구려의 후예 세력이었는데, 발해에도 박씨가 고위층에 있었던 점을 참고해보면, 오히려 신라 말에 남쪽으로 국경을 넘어와 신라에 정착하면서 신라의 왕족 성씨임을 강조하느라 신분 세탁을 하였을 개연성도 존재한다. 여기서 박씨 집안의 선조인 박적고(혹은 박적오)가 북원경 출신이었다고 나오는데, 그곳 자체도 원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이었던 곳임을 참고해볼 수가 있다. 스스로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던 이들이었기에 그냥 장군도 아니고 대모달이라는 고구려어로 자신을 지칭할 수 있있던 것 아니겠느냐는 추론이다.

 

더욱이 같은 집안 출신으로 보이는 박질영(朴質榮)의 경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초기에 최고위직인 시중(侍中)에 임명되는 인물인데, 다시 4년 후에 앞서 언급했던 김행파 집안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온 가족을 이끌고 서경으로 이주하게 된다. 김행파와 동일하게 박씨 집단의 북방 친연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럼 끝으로, 아예 남쪽에서 북으로 이주한 케이스는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그 대상은 놀랍게도 금나라의 황족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인물이다.

 

금나라의 시조는 함보(函普)이며 고려(혹은 신라)에서 왔다. 그가 완안부(完顔部)에서 살 때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다른 부족과 분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현명하게 해결해줌으로써 그는 정식으로 완안부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후손들의 기록으로 역산해보면 그의 이주 시기는 대략 10세기 초경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기록에 따라서는 그의 출신이 고려라고도 하고 신라라고도 나오는 것으로 짐작된다. 설화와도 같은 이 이야기는 여기저기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고려측에 남아 있는 기록도 함께 살펴보자면, 평주의 승려 금준(今俊), 혹은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여진의 아지고촌(阿之古村)으로 넘어갔다는 버전을 달리한 풍문도 전해진다. 사실의 정확성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려 초 내지 신라 말에 북방으로 이주해간 이들의 전해지지 않는 기록들도 얼마나 많을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함보의 후손인 아구다(阿骨打)가 발해유민들에게 했다는 다음의 말이 꽤 유명하다.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 (女直渤海本同一家)

 

완안 아구다 - Wikipedia

 

이를 보통은 여진과 발해 둘 다 옛 말갈 계통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긴 하나, 조금만 시선을 달리해서 보자면 말갈의 후예인 여진도 발해에서 나왔고 지금의 발해유민들도 어차피 발해 출신이니 다 같은 발해 아니겠느냐고 해석해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본다면, 금나라의 공식적인 황실 전승에서는 자신들이 고려 혹은 신라 출신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그 선조도 발해의 변경에 거주하던 지방민 출신으로 신생국 고려를 거쳐 북쪽으로 완안부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한다면 같은 발해 출신이라는 공감대가 있었을 일말의 가능성도 한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잠깐 936년에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벌어졌던 후삼국 최후의 전투를 떠올려보자. 이때 고려군의 총병력은 87,500명에 달하는데, 이 중에는 흑수말갈, 달고 등 무려 9,500명의 북방민족 정예기병대가 참전하였다. 총병력의 10%가 넘는 높은 비중이다. 그런데 과연 이들은 종전 후 어디로 갔을까? 짐작컨대 다수는 발해의 중앙민들과 같이 자연스럽게 고려사회로 흡수되어 고려인으로서 정착하였을 테고, 얼마간은 앞서 언급했던 양수척처럼 이질적인 사회집단으로 구분되어 살아갔을 것이고, 또 일부는 언젠가 다시 국경 너머로 자유롭게 떠나가지 않았을까? 그들을 오늘날 주민등록번호처럼 일일이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지만, 그렇게 이들 경계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또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다시피 오늘날과 달리 물리적으로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았던 시대에는 국경지역 양측을 수시로 넘나들었던 수많은 경계인들이 존재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허나 시간의 흐름에 반비례하여 역사 기록은 기하급수로 줄어들기에 모든 조건을 충실히 입증하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 역사라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은 매우 지난하고 너무도 고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잠깐이나마 사료의 제약이라는 한계를 넘어 추론을 통해서 그 비어 있는 틈새를 찾아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 참고자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금사, 박경산 묘지명, 박경인 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