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24

백제와 미추홀, 제3의 부여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이야기와 그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운 사실 정도는 대개 알고 있다. 이를 실제 역사기록에서 찾아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고구려의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 기원전 58~기원전 19)은 북부여에서 예(禮)씨 부인을 얻어서 살다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부여를 떠났다. 그리고는 기원전 37년에 22세의 나이로 졸본(卒本)의 비류수(沸流水) 가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졸본부여 혹은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의 세 딸 중 둘째와 결혼하였다. 얼마 후 졸본부여의 왕이 사망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렇게 기존 세력을 흡수함으로써 고구려 건국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주몽은 그곳에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비류(沸流), 둘째는 온조(溫祚)였다. 그런데 부여에..

보장왕, 고구려와 발해 그 사이

668년 가을 9월, 드디어 당나라의 원정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포위한 지 한 달도 넘게 걸려 가까스로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정군의 실력이라기보다는 고구려의 내부 분열이 더 큰 원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666년에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 맏이 연남생(淵男生, 634~679)에 대항해 둘째와 셋째 아들이 평양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이번 전쟁을 야기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둘째와 셋째가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인 보장왕(寶藏王) 고장(高臧, ?~682)을 붙잡고 평양성에 틀어박혀 최후의 저항을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평양성 포위가 한 달이 넘었을 때 이제는 패전이 확실해졌다고 판단한 보장왕이 셋째 연남산(淵男産, 639~701)을 설득해 수령 ..

을지문덕과 다문화사회 고구려

우리가 을지문덕에 대해 그나마 들어서 아는 것이라고는 살수대첩 하나뿐이다. 워낙에 탁월한 전략운용이 돋보이는 작전이어서 그런지 기록들을 차분히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직접 느껴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그가 정말로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신인지도 불분명하다.심지어 그의 성씨가 을(乙)인지, 을지(乙支)인지도 명확치 않다. 그가 을씨라고 보는 쪽은 고구려 역사 초기에 등장하는 을씨 재상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 - 제9대 고국천왕(179~197) 때좌보 을두지(乙豆智) - 제3대 대무신왕(18~44) 때대보 을소(乙素) - 제2대 유리왕(B.C.19~A.D.18) 때하지만 3세기를 마지막으로 을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

을지문덕 그리고 요동전쟁

598년 2월의 아직 한창 추운 겨울 어느 날, 고구려 장수가 지휘하는 말갈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수나라의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였다. 이는 갑작스런 게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고구려에서는 수나라가 마지막 남은 남진(陳)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중원을 통일한 것에 충격을 받고 무기를 정비하고 식량을 축적하면서 외침에 대비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선왕의 뒤를 이어 제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7) 고원(高元, ?~618)은 반복적인 사신 파견을 통해 수나라의 내실을 염탐하면서 이들의 역량을 확인해왔는데, 동시에 그에 대응하여 갈고닦으며 준비해온 고구려의 실력을 한번 확인해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사실 2백 년 넘게 이어진 중국의..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 안승(安勝)

668년 9월의 어느 가을 날,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나라 원정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날로 고구려의 700년 대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국가는 무너졌어도 그 구성원들까지 모두 고구려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의 외손이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 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은 불확실한 미래를 품고 자신을 따르는 고구려인 4천여 호와 함께 669년 2월 신라로 망명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그가 보장왕의 서자(庶子)로 고안승(高安勝)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그는 연안승(淵安勝)이 맞다. 아마도 큰아버지 연개소문이 역사에서는 쿠데타로 국왕을 시해한 역신으로 남다보니 자연스럽게 연씨임을 가리고자 그저 안승이..

고려의 무신정변 프리퀄(Prequel)

1014년 겨울 11월의 첫날, 고려 개경 한복판에서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인 6위(衛)의 군사들이 단체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소란스럽게 궁궐로 난입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노리던 두 명을 붙잡아서는 딱 죽지 않을 만큼 마구 폭행을 가했다. 그 다음 합문(閤門) 안으로 들어가 국왕의 면전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쿠데타 배경을 설명하였다. “저들이 우리의 토지를 빼앗은 것은 자신들 이익을 위해서였지 결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신발에 발을 맞춘다고 억지로 발가락을 자른다면 그 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군사들은 울분과 원한을 참지 못하겠으니, 부디 나라의 좀벌레를 제거하여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주십시오.” 국왕도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

발해가 발해인 이유

714년 5월 18일, 한 무리의 당나라 사신들이 요동반도 끝자락에서 배를 타기 전에 돌에 글을 새겼다. 근처에는 이를 기념하여 미리 파둔 두 개의 우물도 있었다. 사신의 대표는 홍려경(鴻臚卿) 최흔(崔忻)이라는 인물로, 바로 전 해에 당나라에서 발해로 파견되어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이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보다 몇 년 전에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이 먼저 발해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었고, 그를 따라서 대조영이 들째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로 보냈었다. 그 아들이 이번에 최흔과 함께 발해로 돌아온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우물은 없어졌지만 이 돌만큼은 1,200년 가까이 지나서까지도 그곳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승리하자 기념물로 이 돌을 강제로 가져갔다..

신라인 설계두, 열린 세상으로 모험을 떠나다

645년 여름 6월, 당나라의 대군은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 등 고구려의 주요 성채를 차례차례 함락시킨 데 이어 이번에는 안시성(安市城) 북쪽까지 진군해왔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요동성에서 최대한 막아섰어야 했는데, 당 태종도 만만치 않은 영걸이었다. 수 양제가 눈물을 삼키고 회군해야 했던 요동성을 이번에 무너뜨린 것은 대고구려 전선에서 신의 한 수가 되어주었다. 그곳에서 얻은 군량미 50만 석은 가볍게 출정해온 당군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급해진 것은 고구려군이었다. 당초 안시성이 최전선이 될 가능성은 낮았기에 방비가 완벽하지 못한 것을 우려한 고구려는 총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15만 명이 넘는 대규모 지원군을 편성하여 급히 파병하였다. 당 태종은 고구려 ..

연개소문의 주민번호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또 다른 이름은 개금(蓋金)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이 고구려인의 발음을 듣고 그대로 기록한 것은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였다. 즉 소문=수미=금(金)이니 곧 고대한국어로 쇠라는 뜻을 한자로 써서 금이 되는 것이다. 그의 집안은 고구려 말에 소위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중리(中裏), 곧 중리위두대형(3품)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도 중리를 거쳐 막리지(2품)를, 그리고 아버지는 드디어 막리지에 대대로(1품)까지 고구려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아버지 사후에 젊은 연개소문은 정적들의 견제로 인해 대대로 직위를 승계하지 못하게 되자 이들에게 저자세로 읍소하면서 겨우 설득을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앙심을 품고는 641년(중국측 역사서에는..

고구려 관등과 일본어 숫자

외국어를 배우다보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일본어를 배우던 시절 의외로 고구려어가 이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연구자들이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통해 밝혀냈듯이, 고구려어로 3은 밀(密), 5는 우차(于次), 7은 난은(難隱), 10은 덕(德)이라는 한자로 표현되는데, 흥미롭게도 일본어에서도 비슷하게 3은 미츠(みつ), 5는 이츠(いつ), 7은 나노(なの), 10은 토오(とお)로 읽힌다. (일본어는 한국어보다 숫자를 읽는 방식이 좀 더 다양하다.) 뿐만 아니라 두 언어의 많은 명사들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외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에서도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오늘은 한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