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가득하다. 자칫 잘못 해석하는 순간 고대 로마가 한민족의 역사가 되기도 하고, 고대 스키타이가 갑자기 신라가 되기도 하는 게 역사(?)이다. 그만큼 조심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 곧 역사이다. 그럼에도 구더기 무서워 장을 안 담글 수는 없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 다룰 주제는 정답이 없는 이야기이다. 바로 고대 한반도에 실존하였던 말갈(靺鞨)이란 존재이다.
말갈은 거칠게 말해서 기원전부터 존재하였던 옛 숙신(肅愼)을 모태로 한 읍루(挹婁), 물길(勿吉) 등의 후예 정도로 보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삼국사기>와 중국계 역사서들간의 차이이다. <삼국사기>에는 읍루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고, 물길은 504년에 한 번 언급이 있고, 숙신은 121년과 246년, 280년에 세 차례 등장할 뿐이다. 그외에는 시대 불문하고 모두 ‘말갈’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삼국사기>의 표기법이다.
그에 반해 중국계 역사서들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이 언급된다. 대략 “후위(後魏, 386~534) 때에는 물길로 불렸다”라는 기록을 기준으로 다시 정리해보자면, 그보다 이전에는 읍루나 숙신, 그 이후부터는 말갈로 호칭이 전환된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도 숙신은 280년에 언급된 게 끝이고 물길은 504년에 등장하니, 물길이라고 불렸다는 후위(386~534) 당시와 대충 맞기도 하다. 즉 <삼국사기>도 아마 원래 참고하였던 기록들은 다양하게 호칭이 등재되어 있었겠지만 편찬자가 임의로 ‘말갈’로 싹 다 통칭한 게 아닌가 의심해볼 만한 지점이다. 우리도 여기서는 혼선을 피하기 위해 <삼국사기>가 그러하였듯 시대 불문하고 ‘말갈’로 통칭하여 이야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먼저 ‘말갈’이 등장하는 기록은 놀랍게도 고구려의 건국(B.C.37)과 함께이다. 심지어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말갈이란 존재는 이미 그 주변에 존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비류수 가의)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약탈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 말을 100% 있는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어찌되었던 실제로 이후 말갈은 고구려를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단 한 차례도 괴롭히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이때 고구려가 말갈을 복속시킨 것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하는데, 그러기에는 고작 한 번의 공세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논리적 완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초창기에 말갈과 적절히 공생할 수 있는 모종의 지혜를 찾았다고 봄이 좀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를테면 121년에 태조대왕이 부여(아마도 동부여)를 방문하였을 때 일부러 사신이 찾아왔던 사례를 참고해볼 수 있을 듯하다. 단순히 무력으로 정복하였다고 하기엔 이들의 이러한 자발적인 행동을 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짐작컨대 오랜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하는 게 더 합리적 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는 이후의 역사가 설명해줄 것이다.
백제
어쨌든 주몽 다음으로 말갈이 등장하는 것은 또 신기하게도 백제를 건국한 온조 때의 일이다. 이번에는 적대적인 관계로, 그것도 수십 년간 이어지게 되는 장기전의 서막으로서 말이다. 주몽이 말갈을 포섭하였던 시점이 기원전 37년이었다면, 온조가 똑같은 이들 말갈에 대해 잠재적국으로서 대응방안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점은 20년이 더 흐른 기원전 17년의 일이었다. 다음은 온조가 신하들에게 하였던 말이다.
말갈은 우리의 북방 경계선에 맞닿아 있는데, 그들은 강인하고 속이는 것도 많으니 우리도 무기를 손질하고 식량을 준비해두는 등 방어계획을 세워야겠소.
이때 그의 예언과도 같은 이 말은 1년여 후에 현실화가 된다. 기원전 16년 가을 9월,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을 넘어온 것이다. 온조는 강병을 이끌고 침략자들을 물리쳤다. 미연에 방비해야 한다고 했던 그의 생각이 옳았음이 다행히 이렇게 증명되었다.
그런데 왜 말갈이 갑자기 백제를 공격해온 것일까? 물론 신생국 백제가 지역의 맹주 마한의 배려로 말갈과 마한 사이의 영토를 받아 그곳에 정착하였기에 지리적으로 1차 타깃이 될 만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여러 방향이 있는데 굳이 말갈이 백제를 쳤던 이유는 그보다는 좀 더 다른 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 온조가 말갈에 대한 방어책을 이야기한 시점은 스스로 남진하여 백제를 건국한 이듬해였다. 그리고 동시에 고구려에서는 2년 전 주몽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인 유리(類利)가 차기 국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정설은 아니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신화 중 일부에서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와서 결혼을 통해 왕위를 계승받게 되면서 원래의 아들 둘, 즉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떠나게 된다는 내용도 있다. 여기에 기반해서 이 상황을 재해석해본다면, 고구려의 권력을 승계한 유리측에서 잠재적 경쟁상대였던 이들을 차도살인(借刀殺人)하는 음험한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었겠나 하는 추론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말갈의 공격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다시 기원전 11년 봄 2월에는 3천 명이나 되는 말갈 병력이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해온 것이다. 온조도 그 규모에는 달리 방도가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성안에 틀어박혀 무대응하는 방어전략을 구사하였다. 열흘이 지나자 말갈도 결국 양식이 떨어지게 되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를 노린 온조는 정예병력만 뽑아서 대부현(大斧峴)까지 추격해가서는 단번에 승리를 거두었다. 말갈측의 피해규모가 5백여 명이었다고 하니 약 20% 가까운 손실을 입힌 셈이었다.
기원전 9년 겨울 10월, 이번에도 말갈은 백제의 북쪽 지방을 노리고 침범하였다. 다만 이때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듯 온조는 군사 200명에게 곤미천(昆彌川)에서 말갈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백제군은 거듭 패하는 바람에 청목산(靑木山)까지 물러나 방어에 전념하였다. 부득이 온조가 직접 정예기병 100명을 동원하여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백제군을 지원하였고, 그제서야 말갈도 물러났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원전 8년 여름 4월에 이번에는 낙랑의 사주를 받고 말갈이 또 다시 공격해온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병산책(甁山柵) 즉 병산의 목책이었다. 원래 낙랑과 백제는 기원전 15년에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을 만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백제측에서 그 병산책과 마수성(馬首城) 두 곳을 신설하면서 나름 국방력 강화에 나섰는데, 하필 이웃한 낙랑측에서 이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행위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말갈이 습격해와서는 문제가 되었던 병산책을 무너뜨리고 그곳의 백제군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갔다.
이에 백제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3개월 후인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 두 곳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교통로를 완전히 차단해버리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온조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이러했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영토를 침공해오므로 평온한 날이 없소. 게다가 근래 들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또 마침 국모께서 돌아가셨소. 지금의 상황이 참으로 좋지가 않으니 이 기회에 천도함이 옳겠소. 순행을 나가보니 한수(漢水之南)의 남쪽 땅이 터가 좋던데, 만일 그곳에 수도를 마련한다면 오래도록 평화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오.
그렇게 추진된 천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기원전 6년 무렵의 백제 영토는 “북쪽은 패하(浿河), 남쪽은 웅천(熊川), 서쪽은 큰 바다, 동쪽은 주양(走壤)”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대략 오늘날로 치면 북으로 평양 아래 대동강, 남으로는 공주의 금강, 서로는 황해, 동으로는 강원도 춘천쯤 될 것이다. 그 전역을 다 물리적으로 차지하여 통치하였다기보다는 최대 그곳까지를 일종의 비무장지대처럼 설정하는 식으로 광의의 세력권으로 설정하였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온조의 예측은 매번 신기하게도 맞아떨어지는데, 실제로 기원전 2년 봄에 낙랑이 위례성을 공격해오는 일이 발생하였고, 연달아 1년 후인 기원전 1년 겨울 10월에는 말갈이 또 습격해왔다. 이때는 온조가 직접 나서서 칠중하(七重河)에서 막아서서 오히려 대승을 거두었다. 백제는 말갈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상국이었던 마한으로 보내는 한편, 나머지 포로들은 모두 구덩이에 생매장시켜버리는 것으로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그리고는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지 바로 다음 달에 온조가 친정을 준비하였다.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목표로 하여 출진하였으나, 도중에 구곡(臼谷) 무렵에서 폭설로 인해 계획을 취소하고 부득이 회군하고 말았다.
시간은 흘러 서기 4년 9월에 온조는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우연히 말갈군과 조우하였다. 갑작스레 전투를 벌인 것 치고는 압승을 거둔 덕분에, 생포한 포로들을 휘하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동안 말갈도 조용했다. 온조가 상국 마한을 멸망시킬 때에도 말갈은 그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활동에 나서는 것은 서기 22년의 일이다. 그해 가을 9월에 말갈은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왔고, 연달아 겨울 11월에는 자신들과 악연이 깊은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에 온조가 정예기병 200명을 파병하여 말갈을 막도록 하였다.
백제의 건국자이자 초대국왕이었던 온조는 그렇게 말갈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서기 28년에 생을 마감하였고, 이어서 맏아들이자 태자 다루(多婁)가 2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의 삶도 아버지 온조 때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서기 30년 겨울 10월에 백제 동부(東部)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전투를 벌이는 일이 있었다. 결과는 백제군측의 대승이었다. 다루왕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첫 단추가 잘 꿰어진 셈이었다. 그가 얼마나 고맙게 여겼는지는 얼마 후 흘우를 우보(右輔)를 거쳐 좌보(左輔)라는 최고위직까지 고속승진시킨 것만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해 가을 8월에는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2백여 명을 전사시켰을 만큼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말갈도 그 사이 절치부심하며 보복의 칼을 갈았다. 그들은 서기 34년 가을 9월에 또 다시 마수성을 공격해왔는데, 이번에는 기어코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마치 과거의 패전에 대한 복수를 하듯 불을 질러 주민들의 집을 태워버렸다. 그 다음 연이어 다음달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낙랑이 문제 삼았던 바로 그 두 곳이 이들의 목표였던 것을 보면 이때의 말갈도 낙랑의 사주를 받았던 게 아닌가 의심된다.
어쨌든 이만큼의 전공을 세운 말갈도 추가적인 군사활동은 더 이상 벌이지 않았고, 백제군도 그에 대한 재반격은 삼간 채 거의 20년 가까이 흘러갔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말갈측이었다. 서기 55년 가을 8월에 백제의 북부 국경선을 침범해온 것이다. 전투 결과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갈이 돌아간 이후인 다음해 봄 2월에 다루왕은 동부(東部)에 명하여 우곡성(牛谷城)을 건설하여 말갈의 침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위치는 미상이나 말갈이 북쪽에서 매번 남진해온 것을 보면 그 선상에 있는 지역이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신기하게도 말갈의 침공이 뚝 끊긴다. 그들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무려 50년도 더 지난 108년 가을 7월인데, 이때도 그저 우곡(牛谷)에 쳐들어와서 그곳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는 기록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재밌게도 말갈은 이 이후 한동안 서남쪽의 백제 대신 동남쪽의 신라를 타깃으로 삼았다.
신라
(125년 봄 정월) 말갈이 북쪽 국경에 대규무로 침입하여 관리와 주민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것이 신라와 말갈의 첫 조우 기록이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들 말갈이 정말 말갈인지, 혹 한반도 내에 있던 여타 다른 집단을 <삼국사기> 편찬자가 말갈로 일괄적으로 부른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하는데, 말갈 자체가 중국계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수십 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지역도 한 군데가 아니라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게 확인되므로 얼마든지 한반도 내에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숙신, 읍루, 물길 등 여러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 옥저 등 비슷하면서도 다른 집단들과도 한데 어우러져 지냈다거나 공동으로 약탈을 하고 다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마치 후대의 왜구(倭寇)에도 일본계 해적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명나라인들, 심지어 일부 고려인도 껴 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다 왜구라고 통칭하듯이 말이다.
어쨌든 말갈은 백제와의 오랜 악연을 뒤로하고 이제부터 거의 80년 간을 신라 공격에 집중한다.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음 공격도 불과 반년 후의 일이다.
가을 7월에 또 대령의 목책(大嶺柵)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넘어왔다. 왕(지마(祗摩) 이사금)이 백제에 지원을 요청하니 백제가 다섯 장군을 파견해왔다. 말갈이 그 소식을 듣고서 물러갔다.
당장은 백제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말갈의 위협은 다음 국왕인 일성(逸聖) 이사금 때에도 이어졌다.
(137년 봄 2월) 말갈이 국경을 침입하여 장령(長嶺)의 다섯 목책을 불태웠다.
(139년 8월)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붙잡아가고 약탈하였다.
(겨울 10월) 다시 쳐들어왔는데 폭설로 인해 물러갔다.
이에 일성 이사금도 놀랐던지 급하게 방어책을 마련하였다. 방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어이고 또 하나는 공격이었다. 우선 전자의 방어는 즉시 실행되었다. 말갈의 마지막 공격 직후인 140년 봄 2월에 말갈의 주 침입로인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어력을 강화한 것이다. 문제는 후자였다. 따로 신하들을 불러모아 말갈 정벌을 논의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신라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이찬(2등급) 웅선(雄宣)이 불가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결국 그 안은 포기하고 말았다. 왜 반대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군사 전문가였던 것을 고려해본다면 냉정하게 신라의 승전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거나, 혹은 상대방이 하나의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정벌작전의 실제 효과를 낮게 평가한 게 아닐까 싶다.
다행이었던 점은 이때 이후로 말갈의 준동이 사그러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말갈이 신라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나해(奈解) 이사금 때인 203년 겨울 10월에 국경을 침범해온 기사가 전부이다. 나중에 다시 말갈이 신라를 괴롭히기까지는 무려 2백 년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말갈이 다음 타깃으로 잡은 것은 백제였기 때문이다.
다시 백제로
백제의 제5대 초고왕(肖古王) 때인 210년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해왔다. 하지만 오랜만의 백제 공격이어서 그랬는지 이들은 결국 함락에는 실패하고 그저 분풀이 삼아 성문에 불을 지르고는 돌아갔다. 7년 전에 오랜만에 신라를 공격한 이후 다시 백제로 눈을 돌린 이유는 알 수 없다. 유일한 단서는 이 바로 직전인 봄 2월에 백제가 사도성과 적현성(赤峴城) 두 곳을 신축하고 동부(東部)의 주민들을 옮긴 것인데, 혹 이 사도성이 말갈의 영토와 인접해 있다보니 이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선제대응에 나선 것은 아닐까 추정해볼 뿐이다. 어쨌든 이로 인해 촉발된 양측간의 갈등은 30년 간 지속된다.
선제공격을 받은 백제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후인 214년 가을 9월에 북부(北部)의 진과(眞果)에게 명하여 군사 1천 명을 동원해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다시 벌집을 쑤신 격이 되고 말았다. 다음달인 겨울 10월에 말갈이 정예기병으로 쳐들어와서 술천(述川)에 이르렀다. 온조 때의 격전지 중 하나인 술천성이 있는 곳이었다.
다만 초고왕이 그해 말에 세상을 뜨자 잠깐 휴지기가 찾아왔다. 아마도 백제측의 대응 자제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재개되는 것은 다음 국왕인 구수왕(仇首王) 재위 3년차 때의 일이다. 216년 가을 8월, 말갈이 와서 적현성을 에워쌌다. 사도성과 함께 백제가 축성을 하여 말갈의 반발을 샀던 그곳이었다. 성주가 치열하게 방어에 나서자 달리 방법이 없었던 말갈측은 회군하였다. 하지만 이때 구수왕이 정예기병 800명을 진두지휘하여 추격에 나섰고, 사도성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백제군의 대승이었다.
다음해 봄 2월에 백제는 사도성 옆에 동서로 서로 10리(약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두 개의 목책을 추가 설치하였고, 적현성의 병력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당연히 말갈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력 강화의 일환이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였던 말갈은 220년 겨울 10월에 재차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북쪽 국경지대를 약탈하였고 백제측은 군사를 보내 격퇴하였다.
마지막으로 말갈은 한번 더 백제을 침략해왔다. 229년 11월, 다루왕이 우곡성을 건설하였던 그 우곡(牛谷)의 경계에 들어와 주민과 재물을 약탈한 것이다. 구수왕이 정예군사 300명을 보내 막도록 하였는데, 말갈의 복병이 양쪽에서 급습해오는 바람에 백제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기록은 여기까지이긴 하지만 소규모 접전은 이보다 더 많았을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백제도 언제나 말갈과 사이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음 국왕인 고이왕 때의 일이다.
(258년 봄) 말갈 추장 나갈(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왕이 사신을 잘 대우하고 돌려보냈다.
사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이후로 1백 년 이상 양측은 평화를 유지한다. 그런데 이 평화가 깨지는 것은 독특하게도 백제가 고구려를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한 이후이다.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연달아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심지어 고국원왕까지 전사시키는 등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는 진사왕(辰斯王)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고국양왕 그리고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으로부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게 된다. 그와 동시에 말갈 역시 오랜만에 백제 공격에 나선 것이다.
(387년 가을 9월) 말갈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391년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초반에는 백제도 고구려에 역공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보다시피 고구려 정규군도 아니고 말갈의 공세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적현성의 경우 거의 2백 년 전에 백제가 말갈 방어를 위해 세웠던 방어기지였는데 이 또한 결국 빼앗기고 말 정도였다.
흥미로운 부분은 격전지였던 관미성인데, 백제의 다음 아신왕(阿莘王)이 “관미성(關彌城)은 우리나라 북쪽 국경의 요충지”라고 하면서 이를 되찾고자 하였다. 관미성은 사방이 가파른 절벽에 주변이 바다여서 함락이 극도로 어려운 전략적 요충지인 곳이었다. 광개토대왕조차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부대를 7면으로 나누어 20일 간이나 공략한 끝에 겨우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바로 그곳으로 접근하는 통로인 관미령을 처음에 말갈이 뚫어내고 그 다음에 고구려의 본진이 관미성 공격에 들어갔으니, 이를 보면 사실상 말갈과 고구려가 한 편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또 다시 신라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한참 공격하던 무렵에 말갈은 다시 신라로 관심을 돌렸다. 다만 이는 전략적 접근이라기보다는 말갈 일파의 단독행동이 아닐까 싶은데, 당시 고구려의 전략방향성과 배치되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395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나물(奈勿)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 실직(悉直)의 평원에서 크게 쳐부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말갈의 신라 공격은 이번 한번뿐이었다. 말갈이 다시 공격에 나서는 것은 이로부터 70여 년 후인 468년의 일이다. 그 대상은 이전과 똑같은 실직이라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번에는 고구려와 함께였다. 공식적으로 고구려가 말갈과 공동작전을 펼친 사례는 이것이 처음이다.
(468년 봄 2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국경인 실직주(悉直州)의 실직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다름 아닌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었고, 이때 동원한 병력은 말갈군사 1만 명이나 되었다. 바로 앞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 말갈은 고구려와 협력하는 관계였음이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다만 이들간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했는지, 명확한 상하관계였는지 아니면 전략적 공생관계였는지 등은 분명치 않다. 다만 고구려가 힘의 구조상 더 위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자비(慈悲) 마립간은 같은해 가을 9월에 하슬라(何瑟羅) 주민들 중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니하(일명 니천(泥川))에 축성을 하도록 하였다. 정확한 하천의 위치는 알기 어렵지만 오늘날 강원도 강릉의 지역민을 동원하였던 것을 보면 갓 함락된 실직성으로부터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한 인근 지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라로서는 다행히도 마침 백제가 고구려 공격에 나서주는 바람에 위기를 잠시나마 모면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대신에 백제는 475년에 장수왕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개로왕까지 사망하는 국가적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말이다. 백제 공격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고구려와 말갈은 또 다시 신라로 눈길을 주게 된다.
480년 11월에 말갈은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략하였는데, 그 위치는 아마도 비열성(比列城), 곧 오늘날 북한의 강원도 안변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공격은 잘 막아낸 듯하지만, 다음해 3월에는 또 다시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국경에 쳐들어왔다. 이들 연합군은 호명성(狐鳴城) 등 7성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더 멀리 미질부(彌秩夫)를 향해 진군하였다. 신라군이 백제와 가야의 지원부대와 함께 진격로를 나누어 막아서자 이번에는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패퇴하게 되었다. 신라측에서 곧바로 추격에 나서서 니하 서쪽에 이르기까지 1천여 명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백제를 향하여
신라를 공격하는데 갑자기 백제군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은 것에 대해 고구려와 말갈은 적잖이 분노하였던 듯하다. 이들은 곧바로 공격의 방향을 돌렸다. 이제는 백제가 타깃이었다.
(482년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300여 호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완전히 성을 함락시킨 것은 아닌 듯한데, 왜냐하면 바로 다음해 초에 동성왕(東城王)이 이곳 한산성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이 이후 다시 말갈 혹은 고구려의 공격이 이어지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동성왕 대에 백제와 신라간 동맹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쪽을 공격하면 다른쪽이 와서 도와주는 형세가 반복되자 고구려와 말갈도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성왕 말년에는 이러한 백제-신라 동맹이 약화되면서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공세는 백제의 다음 국왕인 무령왕 때에 집중된다. 502년 겨울 11월에 먼저 백제가 고구려에 선공을 하였지만, 이는 상대방이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 되었다. 바로 다음해 가을 9월에 말갈이 나서서 마수책을 불태워버리고 고목성을 공격해온 것이다. 둘 다 예전부터 백제와 말갈 사이에 격전지가 되었던 곳이다. 무령왕은 급히 5천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말갈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말갈도 그냥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506년 가을 7월 고목성을 재침하여 함락시키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위기감을 느낀 무령왕은 곧바로 다음해 여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웠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실제로 507년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함께 한성(漢城)을 목표로 횡악(橫岳)까지 와서 주둔하였다. 이에 무령왕이 군대를 출진시켜 역습에 나섰고 이들 연합군은 부득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고구려의 국왕은 장수왕의 손자인 문자명왕(文咨明王)이었는데, 신라 및 백제와 일진일퇴를 주고받던 상황이었다.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전쟁은 마무리되었고, 말갈 역시 전술적 승리만을 거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말갈과 고구려는 대체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고구려와 말갈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하나의 방향성만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되다는 것, 그리고 또 어느 하나가 그 전체를 다 대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말갈만 해도 항상 고구려 편이었을 것이라고 가정해서도 안 되고(이들 역시 유불리에 따라 한 편이 되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했다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인 해석이다), 또 이름이 말갈이나 모두가 다 같은 말갈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실제로 말갈 자체는 수십 개의 부(部)로 나뉘어 있었다고 하며, 그저 규모가 큰 부가 7개 정도 있었을 따름이다).
즉 특정 시점에 그들 중 누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말갈의 경우 특히 호칭 정리도 제대로 잘 안 되어 있는 데다가 기록이 부실하기에 조심해서 바라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를 참고해서 보자면, 말갈은 전반적으로는 고구려와는 가까이 지낸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모든 말갈 부가 고구려 편이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는 게 답이다.
이를테면 598년에 영양왕이 1만여 명의 말갈인들을 이끌고 당시 수나라 영토였던 요서를 침공하였는데,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어느 정도는 말갈 집단에 대한 통제권이 고구려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속말부의 추장이었던 돌지계라는 말갈인은 고구려의 적대국 수나라로 아예 집단을 이끌고 망명한 사례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나라 이후로 당나라 시대로 접어들어서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동원한 이민족 부대들 중에 말갈이 존재했고, 또 반대로 같은 전장에서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안시성 구원을 위해 파병한 병력 중에도 말갈 병사가 최소 수천 명 이상 투입된 게 확인된다.
이처럼 보다시피 같은 말갈족도 다 같은 일치된 가치관을 가진 것도 아니고 각 부족마다 다른 판단과 의사결정을 하였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국제외교라는 것은 절대적인 정의도 없고 항시적인 아군이나 적군도 없는 법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흥미롭게도 말갈이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혀왔던 백제이다.
끝으로, 신라
<삼국사기>의 655년 기록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 본기에 모두 실려 있다. 드문 상황이기에 이를 한번 하나씩 살펴보자.
- 고구려 : 우리가 백제·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다. 이에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 백제 : (의자)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신라왕 김춘추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라고 하였다.
- 신라 :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다. 이에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오랜 원수조차 당장의 이익 앞에서는 힘을 합칠 수도 있는 게 인간세상의 특성이다. 신라에게 배신을 당한 바 있는 백제는 아예 오랜 원수지간인 고구려, 그리고 말갈과 손을 잡는 결단을 내렸다. 그 결과가 바로 이 기사의 내용이다. 기록 자체는 655년 초의 것이지만 33개 성의 탈취는 그보다 전이라고 하였으니 실제로는 654년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33개 성의 위치는 일일이 알 수 없지만, 이를테면 하슬라 지역이 말갈에 인접해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판단 하에 북소경(北小京)으로 삼은 지 채 20년도 안 된 658년에 경(京)을 폐지하고 주(州)로 격하시킨 것이다. 아울러 이보다 좀 더 북쪽의 실직(悉直)은 일반행정구역인 주(州)에서 군대 주둔지인 북진(北鎭)으로 위상이 변경되었다. 이처럼 위기감이 커진 신라는 사실상 전시체제로 국정을 전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였다.
더욱이 나비효과처럼 이 사건의 여파는 커져만 갔다. 한반도 외교무대에서 소위 왕따가 되어버린 신라는 다급히 국제외교에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에 연패당하고 있던 당나라에 저자세로 몸을 낮춰서 간절히 손을 벌렸고, 그 결과가 마침내 1차적으로는 660년 백제의 멸망이라는 커다란 파고가 되어 돌아왔다.
당장 연합의 한 축이 무너진 고구려와 말갈은 이번에는 자신들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661년 5월의 북한산성(北漢山城) 공격은 그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당시 백제의 잔존세력 소탕을 위해 “신라의 정예군이 모두 백제에 있으니 나라 안이 비어 있어 공격할 만하다”고 판단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 이들 연합군은 옛 백제와 말갈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술천성을 타깃으로 삼았으나 함락에는 실패하였다. 그래서 2차 목표로 세운 것이 바로 북한산성이었다.

이 공방전에 대해서는 사안의 중요도 때문이었는지 구체적인 날짜까지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바로 5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오늘날 ‘북한(北漢)’ 혹은 ‘북한산(北漢山)’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된 아차산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곳을 고구려군이 서쪽에서, 말갈군이 동쪽에서 협공하는 형태로 공격이 이루어졌다. 각각 고구려의 뇌음신(惱音信) 장군과 말갈의 생해(生偕) 장군이 이끄는 독자적인 군대였다. 기록에는 수륙 양면에서의 진격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고구려군은 수군까지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었다. 대놓고 북한산성을 반드시 함락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듯이 육상에서는 포차(抛車)를 동원하여 마치 성 자체를 무너뜨릴 것처럼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20여일 혹은 무려 한 달을 넘겨 6월 22일까지 포위공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북한산성 안쪽은 공포에 휩싸였다. 계속되는 포격으로 성내 건물마저 다 무너졌고, 포위망에 의해 보급마저 완전히 끊겨 식량 역시 동나고 말았다. 성 안에서는 다들 “구원병이 오지 않아 원망하며 서로 바라보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북한산성의 성주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직급이 대사(12등급)였으니 신분은 높지는 않았지만, 성주 동타천(冬陁川)도 공성전에서의 방어에 대해서는 나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마름쇠를 성 밖에 던져 깔아놓는 식으로 적군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막았고, 또 급한 대로 안양사(安養寺)라는 절의 창고를 헐어서 그 목재를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즉시 망루를 만들고 밧줄을 그물같이 엮어서 소와 말의 가죽과 솜옷을 걸치고는 그 안에 마찬가지로 쇠뇌를 발사하는 노포(弩砲)를 설치하여 공격에 대응하였다. 당시 성안에는 겨우 남녀노소 모두 합해서 2,800명밖에 없었는데, 동타천은 어린이와 노약자까지 어떻게든 독려해가면서 강적을 상대로 장기간의 공성전에 매진했다고 한다.
고구려 그리고 말갈측에는 안타깝게도 한달 가량의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북한산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때마침 천둥번개가 치고 비까지 내리자 공격측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운명은 더 이상 고구려와 말갈의 편이 아니었던 듯했다. 그렇게 마지막 말갈의 고구려 협동작전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로부터 5년 후에는 고구려마저도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이후 말갈의 운명
의리를 중요시 여긴다면 이 이후 말갈이라는 집단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해 하나의 집단이 하나의 목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하나로 보이는 집단조차 결코 단일한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눠볼 수 있을 듯하다.
대표적으로 당나라에 줄을 선 돌지계와 그의 아들 이근행과 같은 말갈인들은 순전히 당나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당 조정의 명에 따라 한반도에서 신라와 7년 전쟁(소위 나당전쟁)을 벌였다. 또 한편으로는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의 영주(오늘날 차오양시)로 끌려갔던 말갈인들은 기회를 틈타 고구려 재건의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그 결과가 곧 역사적으로는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록으로 남지 못한 다수의 일반적인 주민들의 존재이다. 통계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수의 말갈인들은 원래 살아가던 대로 그 땅 그 자리에서 계속 살아가지 않았었을까. 때에 따라서는 고구려의 주민이 되기도 하고, 또 다시 발해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가, 거란이 만주를 차지하였을 때에는 그대로 거란의 피지배층이 되었으며, 마침내 그들 중 누군가 선두에 서서 독립을 외쳤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여진족의 일원 혹은 나중에는 만주족의 일원으로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그런 과정 말이다. 그러다가 금나라도 청나라도 사그러들고 자신들 고유의 역사를 잃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망각의 늪으로 사라지고, 자신의 본래 정체성까지도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안타까운 결말이 찾아오게 된다. 지금도 어딘가에는 말갈의 후예가 살고 있겠지만 자신이 바로 그 말갈의 후예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지는 않을까.
역사는 어쩌면 유물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드물게 우연의 장난처럼 발견은 되지만 절대다수는 땅속에 묻혀 끝끝내 사라져버리는, 여전히 존재는 함에도 무한히 잊혀져 있는 그런 슬픈 운명의 존재처럼 말이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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