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삼국에서 천도를 한 번도 안한 국가는 신라 하나뿐이다. 정확히는 신문왕(神文王) 때인 689년에 달구벌(達句伐), 오늘날 대구 일대로 옮겨갈 계획을 세웠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실행까지는 되지 않았다. 즉위 직후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무사히 극복한 그는 아버지 대에 끝난 나당전쟁 이후의 신라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전력을 다한 인물이다. 특히 지방행정을 정리한 공이 큰데, 서원소경(西原小京, 충북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 전북 남원)을 신설한 것도 그였고, 오랜 전쟁이 끝난 만큼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고구려 유민들의 보덕국(報德國)을 해체시킨 것도 그였다. 또한 완산주(完山州)를 비롯해 청주(菁州), 웅천주(熊川州), 무진주(武珍州), 사벌주(沙伐州) 등을 설치하여 최종적으로 9주(州) 체제를 완비한 것도 역시 그였다. 이처럼 아마도 전국을 두루 내려다볼 만큼 너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국가의 행정구조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였기에, 당시의 수도가 갖는 지리적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신라를 위해 천도를 검토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백제의 천도도 나름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다. 함께 졸본부여(卒本扶餘)를 떠나온 비류와 온조 두 형제는 처음에 각각 미추홀(彌鄒忽)과 위례성(慰禮城)에 자리를 잡았었는데, 결국 온조측이 모두 흡수하게 되면서 위례성은 한 차례 하북에서 하남으로 이동을 한다. 그렇게 잘 정착하고 있던 백제는 전성기 때인 371년에 도읍을 (북)한산(漢山)으로 옮겼다. 하지만 475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수도인 한성(漢城)을 포위하였고, 끝내 개로왕(蓋鹵王)이 살해당하는 것으로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그의 아들 문주왕(文周王)은 파괴된 한성을 대신해 그해 겨울 10월에 웅진(熊津, 충남 공주)으로 급히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번 더 성왕(聖王) 때인 538년 봄에 국명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고 도읍을 사비(泗沘, 충남 부여)로 옮겼다. 그렇게 신도시 사비가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어떨까? 고구려에서도 백제처럼 여러 차례 천도가 이루어졌다. 우선 첫 시작점은 기원전 37년 졸본부여가 먼저 자리잡고 있던 졸본천(卒本川)의 비류수(沸流水) 가였다. 그곳에서 졸본부여 혹은 비류국(沸流國)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운 다음, 서기 3년 겨울 10월에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琉璃王)이 국내(國內)로 처음 도읍을 옮기고 그 지역에 새로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첫 수도였던 졸본(卒本) 지역이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구려의 시조묘(始祖廟)가 있던 졸본은 고구려의 역사 내내 국왕들이 빈번하게 방문하는 지역으로 남게 된다.
여하튼 이곳 위나암성은 아마도 산성이었던 것 같다. 대무신왕(大武神王) 11년(서기 28년) 가을 7월에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이곳 위나암성이 암석지대에 세워져 있어 샘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은 축성의 귀재였고 성을 쌓을 때에도 연못을 마련해두었기에 능히 수십일 동안에 걸친 적군의 공세를 피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은 산상왕(山上王) 13년(209년) 겨울 10월의 일이다. 축성에만 무려 11년 8개월이나 걸린 환도성(丸都城)이 그 대상이 되었다. 정확한 천도 사유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맏형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자식 없이 세상을 뜨자 곧바로 형 발기(發歧)와 치열한 즉위 경쟁이 붙었었고, 산상왕이 즉위에는 성공하였지만 발기가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와 결탁하면서 고구려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던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환도성은 결정적 문제점이 있었다. 246년에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현도태수, 낙랑태수, 대방태수 등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해왔을 때, 환도성이 너무 쉽게 함락되버리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한 차례 더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무언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당시 동천왕(東川王)은 가까스로 성을 탈출할 수 있었고 옥저 지방까지 멀리 피신을 떠나야만 했다. 그나마 동부(東部) 출신의 유유(紐由)가 아이디어를 낸 스스로 목숨을 건 작전을 통해 겨우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인해 결국 물러나게 되는 위나라군의 퇴각로이다. 그것은 낙랑(樂浪)이었다. 한사군의 하나로 악명이 높은 바로 그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위나라군의 퇴각 직후인 247년 2월에 동천왕은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수도로 삼을 수 없다”는 이유로 새로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도성 주민들을 이끌고 천도를 결행하였다. 그렇다. 오늘날 북한이 차지하고 있는 그 평양이다. 문제는 기존 사학계의 해석에 따르면 낙랑도 평양에 있었고 고구려는 천도를 평양으로 했다고 하니 모순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억지스럽게 이 평양이 그 평양이 아니라는 희한한 논리를 편다. 이 이슈에 대해서는 곧 다른 글에서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니 지금은 잠시 넘어가도록 하겠다.
여하튼 이곳 평양은 임시수도로 급히 활용하다보니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미천왕(美川王)이 302년 가을 9월에 병력 3만 명을 동원하여 현도군을 공격하여 확보한 8천 명의 포로를 평양으로 옮겼다든지, 고국원왕(故國原王) 때인 334년 가을 8월에는 평양성을 증축한다든지, 지속적인 보완작업이 진행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고국원왕은 지금의 평양이 아무래도 마음에 안들었던지 342년 봄 2월에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환도성을 보수하고, 또 동시에 국내성(國內城)까지 축조하였다. 그의 최종 목표는 환도성으로의 환도(還都)가 되었다.
사실 이 당시 고구려는 선비족 출신인 모용황(慕容皝)의 신생국 연나라(전연)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요서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모용황은 339년에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한 차례 공격해오기도 했다. 다만 그렇게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오히려 수도를 북쪽으로 옮기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한 세기 전 외세로부터 침탈당한 바 있던 같은 장소로 말이다.
그렇게 평양은 거의 1백 년 가까운 시간을 수도로서 기능하였지만, 그해 가을 8월에 다시 환도성으로 수도가 옮겨짐으로써 모든 게 원복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환도성이 불과 3개월 만에 전연의 모용황의 기습 침공을 받아 철저하게 짓밝히는 바람에, 바로 다음해 가을 7월에 평양 동쪽의 황성(黃城)으로 재차 수도를 옮기게 된다. 이곳 황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위치가 특정되어 있다.
목멱산(木覓山) : (평양)부의 동쪽 4리에 있다. 황성의 옛터가 있는데, 일명 동성(絧城)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구려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있다가 모용황에게 패하여 이리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
황성 : 강성(綱城)이라고도 한다. 목멱산에 있으며, 고구려 고국원왕 12년(342)에 새로 성을 쌓았는데, 모용황에게 패하여 13년에 이 도성으로 옮겼으니, 모두 84년 동안이다.
누를 황 자를 쓰는 황성은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이 있기도 하고, 아마도 동성보다는 그 의미상 강성이 맞을 것 같은데 벼리 강 자의 경우 핵심, 총괄, 통치 등의 뜻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황성과 같은 맥락의 명칭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여하튼 한 차례 크게 데이고 나서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만큼 이제 다시는 북쪽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뿐더러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한 번 찾아온 위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번에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었다.
369년 가을 9월에 고국원왕은 2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 백제측 치양(雉壤)에 주둔하였다. 전략적 목표는 정확치 않으나 크게는 백제 정벌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상 14년 간 아무런 활동도 보이지 않던 그가 오랜만에 행동에 나선 것이라는 점과 동원한 병력수가 보병 기병 합쳐서 2만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결코 단발적인 작전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무렵의 백제는 하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치세 하에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즉위 직후부터 20년 가까이 아무런 활동내역이 남아 있지 않기에 신비에 쌓여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어쨌든 태자를 파병해 고구려군을 상대하게 하였고 그는 기대에 부응하여 기습공격을 성공시킴으로써 무려 5천 명이나 포로로 획득하였다고 한다. 전사자를 제외하고도 생포율이 25%였던 것을 보면 고구려군의 완패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었던 것인지, 근초고왕은 그래 겨울 11월에 한수(漢水)의 남쪽에서 크게 군 사열을 하고는 본격적으로 대고구려 전쟁을 준비하였다. 역시나 371년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급보를 들은 근초고왕은 곧 군대를 패하(浿河) 가에 매복시켜둔 다음 고구려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끝이 아니었다. 근초고왕의 심모원려는 방어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이번에는 친히 출정하여 태자 및 정예병력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 공략에 직접 나선 것이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고국원왕의 전사였다. 비록 평양성 함락까지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백제 역사 최초로 타국의 수도를 직접 타격한 것은 물론 상대국의 왕까지 전사시켰으니 이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는 힘들 것이다. 그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앞서 언급하였던 백제의 수도를 한산(漢山)으로 옮긴 것도 바로 근초고왕이었다.
백제의 다음 왕은 태자였던 근구수왕(近仇首王)으로, 바로 고구려군의 첫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그 인물이다. 당시 패퇴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며 백제의 최전선 기지였던 수곡성(水谷城, 황해북도 신계)보다도 더 서북쪽으로 진격해 올라갔었다고 하는데, 백제인 최초로 가장 멀리까지 이동한 기록을 세웠다고 한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근초고왕의 기존 최고기록인 평양도 지나쳐 장거리 추격전에 나섰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참고로 수곡성의 서북쪽 방향에는 정확히 지금의 평양이 있다.
다만 백제로서는 불행히도 이때는 고구려 또한 소수림왕(小獸林王)이라는 영웅적인 군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375년 백제의 수곡성을 함락시키고 또 연이어 다음해에 북쪽 국경선을 공격하였다. 근구수왕도 참지 못하고 앞서 아버지가 그러하였듯 자신도 동일하게 고구려에 앙갚음을 해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377년 겨울 10월 3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평양성 침공이었다. 아마도 기록 갱신에 대한 개인적인 야욕에 불탔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근구수왕은 아버지와 같은 행운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게다가 상대방이 소수림왕이었다는 점도 그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자세한 상황은 알려지 있지 않지만 그는 제대로 된 공성전도 하지 못한 채 회군해야만 했고, 곧바로 고구려군이 반격에 나서서 11월에는 전장이 백제 영토로 바뀌어 있었다. 전쟁의 결과 또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어찌되었든 일진일퇴의 공방전은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여전히 고구려의 수도는 정확히는 지금의 평양성 자리가 아니라 바로 동쪽의 황성이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급하게 정한 수도였기에 그래도 방어전에는 탁월한 입지를 고른 것이겠으나, 문제는 일국의 정식 수도로서 기능하기에는 그리 규모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구려인들도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를테면 광개토대왕이 393년에 평양에 절 9개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을 참고하자면 이 앞뒤로 하여 평양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짐작된다.

그리고 실제로 천도가 지금의 평양 자리로 이루어진 것은 그의 아들 장수왕 때인 427년의 일이다. 다만 너무 드라이하게 수도를 옮긴 사실만 기재되어 있을 뿐 아무런 전후맥락에 대한 소개가 없기에 그저 그렇구나 싶은 정도이다. 여기서 잠깐, 장수왕의 평양 천도를 마치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는데, 사실 평양 지역 내에서의 이동에 불과한 것이기에 이는 기록을 잘못 이해한 결과일 뿐이다. 동천왕이 전란의 여파로 배후지인 평양에 성을 쌓고 급히 천도를 한 이래, 고국원왕 때 아주 잠깐 환도성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고, 심지어 그 평양에서 그는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기까지 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들인 소수림왕 역시 같은 평양에서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즉 고구려는 같은 평양에서 지금까지 존속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평양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 평양과 장소는 같지만 모습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유는 오늘날의 평양 성곽은 이보다 1백 년도 더 지나서 552년 양원왕(陽原王) 때에 장안성(長安城)이라는 이름으로 평양 둘레에 축성을 하면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 장안성이 완공되는 것은 평원왕 28년(586년) 때인데, 공식 역사기록만으로도 34년이 걸린 셈이고, 추가로 확인 가능한 금석문상으로는 이보다 더 길어서 무려 42년이나 걸린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평양성(장안성)에서 발견된 석각들은 다음과 같다.
- 기축년(569년) 5월 28일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서쪽으로 향하는 11리는 소형(小兄) 상부약모리(相夫若牟利)가 만들었다.
- 기축년(569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12리는 물구(物苟) 소형 배수(俳湏) 백두(百頭)가 축조를 맡았다.
- 기축년(569년) 3월 21일, 여기서부터 □쪽 아래로 2리는, 내중(內中) 백두(百頭) 상위사(上位使) 이장(尒丈)이 축조를 맡았다.
- 병술(566년) 12월 중, 한성하후부(漢城下後部) 소형 문달(文達)이 맡아, 여기서부터 서북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 괘루개절(卦婁盖切) 소형 가군(加群)이,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돌아 □리 4척을 맡았다.
- 이 성은 42년 역사를 마쳤다.

여기까지가 고구려 천도의 역사이다. 668년 당나라라는 외세와 이웃나라 신라의 협공,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부의 이반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는 바로 그 역사적 장소가 이 평양성이다. 나중에 고려가 건국되어 태조 왕건이 제창한 북진(北進)의 전진기지로서 평양, 그 당시 이름으로는 서경(西京)이 다시 주목받기까지는 이로부터 거의 3백 년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고려는 세계제국 몽골의 침략에 따라 다급히 강화도로 임시 천도하였던 것을 제외하면 어찌되었든 끝까지 개경(오늘날 개성)을 지켰고, 조선 또한 공식적으로 한성 혹은 한양(지금의 서울)이 줄곧 수도였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특별시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천도는 결코 쉽지 않다. 전시를 제외하고, 한때 잠시나마 남한도 행정수도 이전의 큰 꿈을 꾸었었지만 보수적인 헌재의 판결로 중단된 사례가 있었다. 정치적 목적이든 군사적 이유이든 어떤 사유로든 천도는 거대한 격변의 상징이다. 신라는 결국 수도를 옮기지 않고 천년을 버틴 끝에 마침내 소멸하였고, 백제와 고구려는 절반은 외부의 위협 속에 절반은 자체적인 판단으로 수도를 여러 차례 옮겼다. 심지어 고구려는 원래 수도로 환도까지 하였었지만 잘못된 전략적 판단 탓에 이는 커다란 피해만 야기하고 만다. 그만큼 천도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를 오해해서 간혹 천도가 곧 망국의 지름길인 것처럼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잘못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위에 길게 설명하였듯이 정확히는 천도를 할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 먼저 벌어졌던 것이고, 또 그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국가적 위기상황이 이미 유발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즉 엉뚱하게 천도를 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위기가 닥쳐온 다음에 천도라는 행위가 후행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보다 합리적인 접근이다. 천도 자체는 죄가 없다. 그 천도를 유발시킨 배경이 문제인 것이다. 혹여나 더 이상 천도에 대한 불신 내지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후한서, 삼국지, 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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