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말갈(靺鞨)은 과연 한민족의 선조인가?

위클리 히스토리 2026. 4. 17. 14:0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승만이고, 또 일제 패망 당시 마지막 주석은 김구였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물론 그 사이에도 여러 명의 대통령 혹은 주석이 재임하였다. 그 중에 이승만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이가 바로 박은식(朴殷植)이다. 나름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인데, 흥미롭게도 『한국통사(韓國痛史)』즉, 조선 말부터 일제의 국권 침탈까지의 아픈(痛) 역사를 다룬 역사서의 저자로 더 유명할 것 같다.

 

그런데 시대적 영향으로 민족주의적 의식이 강했던 박은식이 쓴 글 중에는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라는 일종의 단편 역사소설이 있다. 꿈속에서 금나라 태조 아구다(阿骨打)를 만나 민족의 고통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언을 듣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다.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 여기서 재밌는 것은 박은식이 여진족의 금나라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여진족은 후대에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바로 그 만주족의 전신을 말한다. 그런 여진족이 원래 한민족과 같은 본류였다는 것은 사실일까? 흥미롭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믿기가 어려운 주장이기도 하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만주족과 여진족의 더 먼 조상인 말갈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역사 전체를 다루기에는 책 한 권 분량이 될 테니, 여기서는 동류 여부를 검증하기 위한 비교에만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본격적인 비교에 앞서 먼저 말갈의 또 다른 전신들부터 알아보고 넘어가자.

 

  • 읍루(挹婁)는 옛 숙신(肅愼)의 나라이다. (후한서)
  • 숙신은 일명 읍루라고도 한다. (진서)
  • 물길(勿吉)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위서)
  •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靺鞨)이라고도 한다. (북사)
  • 말갈은 곧 숙신의 땅이니, 후위(後魏, 386~534) 때에는 이를 물길이라 하였다. (구당서)
  • 흑수(黑水)말갈은 숙신 땅에 있는데, 또한 읍루라고도 하며, 후위 때에는 물길로도 불렸다. (신당서)
  • 흑수말갈은 본래 물길이라고 불렀는데 … 대개 숙신의 땅이다. (신오대사)
  • 읍루는 물길과 함께 모두 숙신이다. (송나라 소동파의 지장도(指掌圖))

 

이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숙신=읍루=물길=말갈→흑수말갈여진만주족”이 된다. 이 마지막 흑수말갈이 주축이 되어 여진족이 되고, 그것이 이후 만주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 대략적인 역사적 흐름이다. 물론 이들 역시 단일민족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분명 무수히 많은 침략과 내침의 과정을 겪으며 끊임없이 피가 섞이고 섞여들면서 다민족 부족이 되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이름들이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바뀌거나 그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504년에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게 되었”다고 하였다든지, 280년에 숙신이 침략해오자 고구려에서도 서천왕의 동생 달가(達賈)를 투입하여 정벌하였다든지, 시대마다 각 호칭은 섞여서 쓰였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편찬자가 그들의 호칭이 기록마다 제각각인 것이 불편했던지 일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말갈로 통일시킨 것으로 보이기에 유의할 필요는 있겠다.

 

여하튼 옛 숙신이 기반이 되어 시대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면서 지금까지 흘러왔다고 볼 수가 있는데, 이들이 과연 한민족의 전신이 될 수 있는지는 다음의 꼭지들로 구분지어 알아보자. (유전자 검사라고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남아 있는 직계후손들을 찾아볼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득이 간접적으로 추정하는 수밖에 없음에 양해를 구한다.)

 

첫 번째로는 언어가 있다. 이 좁은 한반도에서 그나마 한민족이 존속되어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어쩌면 이 집단 내에서만 사용되는 같은 언어를 공유한다는 점도 클 것이다. 한때 일제가 일본어를 국어로 하여 통일시켜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긴 하였으나 35년의 지배로도 이루지 못한 것이 바로 모국어의 교체(!)였다. 그만큼 바꾸기 쉽지 않은 것이 바로 언어이기에, 그 언어의 유사성과 차별성만으로도 크게는 동류 여부를 판단하기에 좋은 측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의 언어는 주변 여타 고대국가들의 그것과 달랐음이 확인된다.

 

  • (읍루) 생김새는 부여인들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서로 다르다. (후한서)
  • (읍루) 외모는 부여 사람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 (삼국지)
  • (물길)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 중에서 제일 강하며, 언어도 그들만이 다르다. (북사, 위서)

 

그렇다면 실제로도 그러할까? 예컨대 한국어와 일본어는 (한자어를 제외하면) 소리만 듣고서는 유사성을 찾기가 어려운데, 배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문장구조나 문법 등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은 언어로 손꼽힌다. 특히 고구려어의 숫자 세는 방식이 일본어와 닮아 있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져 있다. 어쩌면 오히려 지금보다 고대 사회는 더 언어적 유사점이 높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여진어의 자식뻘인 만주어를 보면 이를 대략 검증해볼 수가 있다. 방금 말했던 숫자부터 한번 비교해보자.

 

1 2 3 4 5 6 7 8 9 10
어무
emu
주워
juwe
일란
ilan
두인
duin
순자
sunja
닝군
ninggun
나단
nadan
자쿤
jakun
우윤
uyun
주완
juwan
20 30 40 50 60 70 80 90 100 1,000
오린
orin
구신
gusin
더히
dehi
수사이
susai
닌주
ninju
나단주
nadanju
자쿤주
jakunju
우윤주
uyunju
탕구
tanggu
밍간
minggan

 

정말 비슷한 것 하나 없다. 뿐만 아니라, 나=bi(비), 너=si(쉬), 그=i(이) 등 대명사 역시 마찬가지로 마치 완전 다른 언어처럼 보일 정도이다. 더욱이 한국어나 일본어에는 L과 R, P와 F의 구분이 사실상 없지만, 만주어에는 이러한 발음들의 구분도 존재한다. 단순히 주어-목적어-서술어의 문장 순서가 같다는 것만으로는 동류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언어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사람들의 이름은 어떠했을까? 오늘날 우리도 이름만 들어보아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추정이 가능할 정도로 국가별 네이밍 방식은 특정한 패턴이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 물길 : 을력지(乙力支, 470년대), 후니지(侯尼支, 485년), 파비(婆非, 493년), 후력귀(侯力歸, 503년), 석구운(石久云, 540년)
  • 말갈 : 소모(素牟, B.C.1년), 나갈(羅渴, 258년), 생해(生偕, 661년)
  • 속말말갈 : 돌지계(突地稽, 600년대 초반) 등
  • 흑수말갈 : 아고랑(阿固郞, 622년), 예속리계(倪屬利稽, 722년), 올아(兀兒, 924년), 호독록(胡獨鹿, 925년), 도리화(桃李花, 932년) 등


인물명이 많진 않기에 추정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특별한 패턴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최소한 동시대 주변국의 인물명 스타일과는 그다지 공통점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갈인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참 후대까지도 한자식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차별점일 것이다. (돌지계의 아들이 이근행(李謹行), 예속리계 자신이 이헌성(李獻誠)이 된 사례 정도가 드물게 전해진다.)

 

그렇다면 문화적으로는 어떨까? 말갈인은 주변국 사람들과 비슷한 문화권을 형성하였을까? 이는 아무래도 차이가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국들 중에서 가장 북쪽에서, 가장 심한 추위를 견뎌내야 했던 만큼 땅을 파고 마치 오늘날 반지하처럼 생활하였다는 기록부터 차이가 난다. 그거야 날씨 탓이라고 할 수 있으니 생활습관으로 넘어가보자면, 예컨대 문자도 쓸 줄 몰랐고 밥을 먹을 때 다른 나라들은 그릇을 사용하였다면 말갈인들은 그런 습관이 없어서 가장 문화적으로 떨어졌다는 평가가 남아 있다. 더욱이 생활방식 자체가 가장 불결했다고 하는데 기록을 읽어보면 몸에서 나는 냄새도 매우 심했던 것 같다.

 

한편 대신 거친 환경 탓인지 생존능력은 탁월하였던 모양이다. 이들도 넓은 범위에서는 동이(東夷)처럼 무기로 각궁(角弓)과 호시(楛矢)를 잘 사용하였다고 한다. (다만 활을 잘 쏘는 것은 민족적 특성이 아니라는 점은 유의하자. 중세 영국인도 장궁으로 유명했다.) 또한 육상전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배를 이용해서 해적처럼 약탈을 자주 벌인 것을 보면 다양한 환경에 나름 잘 적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이들 고유의 결혼풍습이나 장례절차 등의 기록은 있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문화적 특성만 놓고 봐서도 딱히 주변국들과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역시나 서로 근본이 다른 집단이었을 가능성만 높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었던, 혹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주변국들을 특정해보자. 이를 위해서는 통칭하여 말갈의 위치를 찾아보는 게 먼저겠다.

 

(읍루)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천여 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 그 지방은 기후는 추운데 부여보다 혹독하다. (후한서, 삼국지)
(숙신) 불함산(不咸山=백두산)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위략은 10일) 쯤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연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 혹은 관만행국(冠漫行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 리에 뻗쳐 있다. (진서, 위략)
(물길)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의 지역이다. … 낙양(오늘날 뤄양(洛阳))에서 5천 리 떨어져 있다. 그 나라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은 3리 남짓이며 이름은 속말수(速末水=송화강)이다. … 나라 남쪽에는 도태산(徒太山=백두산)이 있다. (위서, 북사)
(말갈)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 서북쪽으로 거란과 서로 닿아 있어서 늘 서로 침략하였다. … 수나라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속말부와 백산부만이 가까왔다.(수서)
((흑수)말갈) 수도(오늘날 시안(西安))에서 동북으로 6천 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에 닿으며, 남쪽은 고구려와 경계하고, 북쪽은 실위(室偉)와 인접해 있다. … 속말부(粟末部)가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태백산(太白山=도태산(徒太山))에 이르러 고구려와 서로 닿는다. 속말수(粟末水=송화강)의 연안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은 산 서쪽에서 흘러 나와서 북으로 사루하(它漏河)에 들어간다. (구당서, 신당서)

 

흑수(Amur, 굵은 선)와 속말수(Songhua, 중간굵기 선)

 

그 당시에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쟀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시안으로부터 6천 리, 뤄양으로부터 5천 리 거리에는 당시에는 흑수(黑水)라고 불렀던 오늘날 아무르(Amur) 강이 흐르고 있다. 그렇기에 부여의 북쪽이자 고구려의 북쪽이라는 말은 사실에 부합한다. 북옥저와도 인접한 것으로 나오지만 북옥저 자체도 멀지 않은 시기에 고구려에 흡수되었기에 추가설명은 불필요하겠다. 또한 말갈과 거리상 가까웠던 돌궐이나 실위같은 경우에는 전형적인 북방민족으로 한민족과는 사실상 거리가 있기에 여기서는 넘어간다.

 

이렇게 보면 가장 가까운 나라로는 부여를 우선 들 수 있겠다. 다만 항상 그렇듯이 가까우면 사이가 안좋을 수밖에 없는 것은 진리인 것 같다.

 

한나라 때 이래로 부여에 복속되어 있었다.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황초 연간(220~226)에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지, 후한서)
두막루(豆莫婁, 북부여의 후예)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위서)

 

또한 부여 몰락 이후에는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져갔다. 참고로 말갈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수십 개의 부(部)로 나눠진 집단이었다. 그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7개 부가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일부만 보자면, 예컨대 속말수에서 이름이 유래한 속말부는 백두산에 좀 더 가까웠다보니 이웃한 고구려와 군사적으로 자주 충돌을 하였고, 수나라 말경 추장 돌지계의 경우에는 아예 본거지를 벗어나 당나라로 귀순한 사례이다. 또 바로 동쪽의 백산부(白山部)같은 경우에는 아예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다른 부들도 비슷한데, 예컨대 가장 멀어서 적대적일 것도 같은 흑수부는 오히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해왔을 때 흑수의 북부(北部)에서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준 적도 있었다. 총지원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 부의 정예병력 수가 평균 수천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당 태종이 주필산 전투 후에 집단학살한 규모만 해도 3천여 명이었다고 하니 거의 전력을 다해 도와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같은 말갈이어도 부(部)에 따라서, 또 같은 부 안에서도 각 소집단별로 대외 방향성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고구려같은 경우에 어느 정도는 소속된 말갈인들을 일종의 같은 시민권자로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시사해준다.

 

정리하자면, 언어적으로도 말갈은 주변국들과 달랐고, 인명만 보아도 공통점을 찾기 힘들며, 문화적으로도 같은 문화권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결론이다. 즉 종족적으로는 사실상 그 유래가 같다고 볼 수는 없겠고, 결국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상당 기간 지리적으로 가깝게 지내왔기에 여러 모로 인적 물적 교류가 자연스럽게 발생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종종 충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공동대응을 하는 식의 협력하는 모습도 보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이나 더 지난 후에 발해가 새로 건국될 때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이 합심하여 단결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 보장왕이 당나라에 끌려갔다가 677년에 요동주도독에 임명되어 다시 요동땅으로 돌아와서는 몰래 고구려의 재건을 획책하면서 만났던 대상도 다름 아닌 이들 말갈인이었다. "먼 사촌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속담은 이렇듯 역사 속에서도 증명된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후한서, 삼국지, 진서, 위서, 북사, 수서, 구당서, 신당서, 구오대사, 신오대사, 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