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인구조사(Census)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 로마도, 고대 중국도 국가가 정책적으로 전국의 인구수를 조사한 기록이 있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에는 작은 지역 단위의 인구수까지 조사한 통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물론 이는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해 조사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어떨까? 약간 안타깝지만 국가 차원이든 뭐든 지역별 인구통계가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전국적으로 제대로 된 인구조사는 조선시대의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번 최대한 긁어모을 수 있는 정보들을 가지고 오늘은 한번 고중세 이 땅(+만주)의 나라들의 인구를 추산해보도록 하겠다.
가장 이른 시기의 인구기록은 재밌게도 예(濊)라는 고대민족의 것이다.
원삭(元朔) 원년에 예의 군주(濊君) 남려(南閭) 등이 (고조선의)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한나라)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이때는 기원전 128년으로, 그 어느 기록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당시 예는 위만(衛滿) 세력이 탈취한 고조선의 압박을 받아 아예 한나라 측에 줄을 선 것이었는데, 저 많은 인구가 대규모 이주를 하였다고 하기보다는 저만한 인구를 가진 예군 남려가 한나라에 투항하였다고 봄이 옳다. 참고로 구(口)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인구(人口)에 가깝긴 한데, 전체 남녀를 모두 포괄하는지 아니면 조세 수취의 주된 대상이었던 남성을 지칭하는지, 그것도 어린이나 노인도 들어가는지 아니면 성인 남성만 카운트한 것인지, 또 양민만 대상인지 노비 계층까지 포함인지 등 기준은 불분명하다. 한 마디로 그때그때 다르다.
그런데 이 예라는 집단 자체부터가 사실 미스터리이다. 이보다 조금 후대에는 맥(貊)이라는 고대민족과 합쳐서 통칭 예맥(濊貊)이라고도 한다. 즉 별개의 종족이 점차 흡수된 것인지 혹은 원래 거의 같은 종족인데 별개 집단이었다가 하나의 세력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 등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기원은 모호하나,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선조뻘 된다는 점뿐이다.
<삼국지>에서 부여 지역(지금의 북만주)에서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인장이 발견된 적이 있다고 하고, <삼국사기>에서는 북명(北溟) 지역(강릉 이북)에서 ‘예왕인(濊王印)’도 발견되었었다고 하는데, 사실 다 문헌상으로만 확인이 가능하다. 다만 북한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예군”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다. 이것이 역사기록상의 예왕의 인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참고는 할 수 있겠다.

이 예라는 집단은 그 규모 대비해서 위치가 불명확하다.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닿았다”고 하는 <삼국지>의 기록과 이들 지역을 창해(蒼海), 즉 푸른 바다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 동해 북부 어딘가로 추정만 해볼 뿐이다.
그런데 이보다 후대인 3세기 중엽에는 예의 인구수가 2만 호(戶)라고 하여 대략 10만 명 남짓한 규모로 28만 명 당시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한나라로 직접 이동한 세력이 그만큼 차감된 것이거나 아니면 기원전에 비해 거의 4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보니 그만큼 전쟁이나 주변국으로의 인구유출로 인한 자연감소 등이 있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참고로 이 호(戶)라는 개념도 참으로 불분명한데, 보통은 하나의 가구를 단위로 하지만 크게 자연호냐 편호(編戶)냐가 정확치 않다. 자연호는 오늘날의 가구수와 같은 개념이고(핵가족이든 대가족이든 하나의 가구수로 카운트), 편호면 국가에서 관리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지정하는 인위적 호수가 된다. 즉 후자면 자연호와 달리 5명을 한 단위로 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가능해진다. 또한 구(口)와 마찬가지로 일반 양민까지만인지 노비 가구도 포함인지 등 기준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를 참고해볼 만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20세기 말에 평양 인근에서 발굴된 ‘낙랑군 초원(初元) 4년 현별 호구부(戶口簿)’라는 자료이다. 실물은 북한에 있어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판독된 내용을 기반으로 정리해보자면, 기원전 45년 당시 낙랑군의 호는 43,835호, 구는 280,361명이 된다. 대략 호당 평균 인구수는 6.4명이다. 그런데 이 자료의 특징은 전년도와의 비교가 있다는 점인데, 바로 전년도의 경우엔 호당 인구수가 6.3명이었으니 정부에서 정한 편호가 아닌 자연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참고로 일제시대 때 발굴되어 조작의 의심을 받는 그런 자료가 아니라 북한이 1990년대에 직접 발굴한 실물 자료이기에 낙랑군 호구부를 조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너무 보고 싶은 대로 보지 말았으면 한다.)
여기까지가 기원전에 확인 가능한 일부 지역의 인구수이다. 이것만 보아서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까지의 전체 인구수를 알 수는 없다. 그 다음으로 확인 가능한 것은 하한선으로 보자면 3세기 중반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는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각국의 인구이다. 참고로 3세기 중반으로 추정한 이유는 위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예 지역까지 두루 훑으면서 각지의 동태를 최대한 파악하여 회군한 데에 기반한다. 이때가 위나라군이 한반도 각지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온갖 정보를 취합하였던 게 가장 확실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 국가 | 인구수(戶) | 비고 |
| 부여 | 8만 | 각 가(加)는 수천~수백 가(家) |
| 고구려 | 3만 | |
| 동옥저 | 5천 | |
| 예 | 2만 | |
| 마한(54국) | 총 10여 만 | 대국 1만여 가, 소국 수천 가 |
| 진한,변한(24국) | 총 4~5만 | 대국 4~5천 가, 소국 6~7백 가 |
이를 모두 합산해보면 보수적으로 봐도 30만 호가 넘는 규모이고, 편호가 아닌 자연호라 보고 낙랑군의 평균 수치를 적용해보면 대략 200만 명에 달하는 총인구가 된다. 다만 이 호수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어디까지 포함인지에 따라 그 숫자는 상당히 크게 나이가 날 수도 있다. 예컨대 부여처럼 백성들이 호민(豪民)과 하호(下戶)로 구분이 될 때 전자만인지 후자도 포함인지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고구려의 사례를 참고하자면, 총 3만 호 중에서 대가(大家)라고 부르는 농사 짓지 않고 앉아서 먹기만 하는 인구(坐食者)가 1만여 명이고 이들을 먹여살리는 하호(下戶)라는 존재가 별도로 있었던 것을 보면, 우선 보수적으로 저 인구는 대가부터 하호까지의 전체 가구수로 산정해볼 수는 있을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노비 가구수가 명확히 밝혀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게 많은지 적은지 느끼기 위해서는 고대 한나라가 5천만 명 가량 되었음을 참고하면 되겠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인과 중국인의 인구수 비례와 대략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좀 더 시간이 흘러 삼국시대가 완연히 정착된 시기는 어떠할까? 여기는 크게 두 가지 류의 자료, 곧 일연의 <삼국유사>와 중국측 역사서인 <당서>로 구분해서 볼 수가 있다. 우선 순서대로 <삼국유사>의 자료를 먼저 보도록 하겠다.
| 국가 | 인구수 | 비고 |
| 고구려 | 210,508호 | 전성기 때 |
| 백제 | 152,300호 | 전성기 때 |
| 신라 | 178,936호 | 전성기 때의 수도 내 |
| 가락국(가야) | 7만5천 명 |
고구려와 백제의 전체 인구가 신라 전성기 때의 수도의 인구 수준에 불과할 리는 없다. 바로 아래에 중국측 자료만 봐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수도의 인구 한정일 수밖에 없다. 백제의 경우 천도를 연달아 했던 경험 때문에 삼국 중 가장 적은 인구가 된 것도 그렇게 본다면 이해가 간다. 또한 여기서 가야는 삼국에 비해서 너무 숫자가 적은데, 이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금관가야 하나만의 숫자로 봄이 타당하겠다.
한 호당 인구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보수적으로 편호 방식을 적용해본다면 3개국 수도만 해도 거의 3백만 명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또 살펴봐야 할 것은 동시대에 중국측에서 남긴 이들 삼국의 인구수이다.
| 국가(시기) | 인구수(戶) | 출전 |
| 고구려(668년) | 69만7천 | 신당서, 자치통감 등 |
| 백제(660년) | 76만 | 구당서, 신당서, 통전 등 |
| 24만 (편호) | 당평백제국비(唐平百濟國碑) |
이는 점령군인 당나라가 직접 조사한 내역이니 믿을 만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와 백제의 총 인구는 145.7만 호인데, 보수적으로 봐서 점령군이 편호로 파악을 했다고 해도 7백만 명이 넘으니 이 정도면 당대의 대국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참고로 이때의 금석문에서는 편호(編戶)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동일한 점령군 중에서도 현지 지휘관이었던 소정방(蘇定方)이 충남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기도록 한 기록은 이와는 또 다르다. 660년 당시 백제의 인구가 무려 620만 명(口六百卄萬)이나 된다는 것이다. 후대의 역사기록도 아니고 당시에 직접 남긴 기록이다보디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해석하기가 상당히 난해한데, 대개는 허풍 내지 과장(?)이라고 본다. 결정적 이유는 한 호당 인구가 25.8명이나 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본의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신라의 장적문서 상의 당시 신라 호구수도 잘 해야 한 호당 10명 정도이다. 그래서 이를테면 인구수를 한자 순서를 약간만 달리하여 126만 명(口百卄六萬) 정도쯤 되어야 한 편호당 5.3명까지 합리적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래도 어쨌든 전체 76만 호와 소정방이 점령했다는 24만도 격차가 큰데, 아마도 이는 후자의 경우 수도와 부근의 직접 점령한 지역을 적은 것이라고 보면 이해 못할 것도 없긴 하다.
더불어 북국 발해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보자.
사방이 2천 리이며, 편호(編戶)는 10여 만이고 강한 병사(勝兵)는 수만 명이다. - <구당서> 발해말갈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 - <신오대사> 발해
두 기사의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크게 편호 방식으로 10여 만 호, 혹은 인구수로는 40만 명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추가로 발해의 2대 무왕 당시에 (약간의 과장이 들어간 숫자일 듯하지만) 강병이 고구려 전성기 때 30만 명의 1/3인 10만 명 정도였다는 발언을 참고하자면, 후자의 인구 40만 명은 아무래도 너무 적은 듯하다. 편호 5명씩으로 환산해서 보면 8만 호밖에 되지 않으니, 그 인구수는 아마도 좀 더 초창기 숫자이거나 혹은 조세 대상인 성인남성 기준이거나 그도 아니면 수도권의 인구만이거나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 고려 시대는 어떠했을까? 고려의 인구에 대해서는 두 개의 기록이 남아 있다.
모두 3경(京), 4부(府), 8목(牧)이며, 군(郡)이 118개, 현(縣)과 진(鎭)이 390개, 섬이 3,700개이다. 작은 군읍(郡邑)은 간혹 100가이다. 인구는 총 210만명으로, 병사, 백성, 승려가 각각 3분의 1이다. - <송사> 고려열전
최우(崔瑀)가 자기 집에 재추(宰樞)들을 모아, 도읍을 옮기는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여 경도(京都)의 호수(戶數)가 10만에 이르고 호화로운 저택이 즐비하였다. - <고려사절요> 고종세가
우선 고려의 주요 외교대상이었던 송나라는 고려와의 무역에서 손해가 막심하자 상대국인 고려 내의 정보를 최대한 취득 정리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저런 내부자료까지 함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에 고려에는 210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는데, 당시 양민 남성만 가능했던 병사에 승려까지만 언급된 것을 보면 이는 당연히 노비가 제외된 수치이고 또한 문맥상 남성 인구만 반영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즉 환산해보면 못해도 40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인구가 고려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추가로 당시 개경 인구는 10만 호였다고 한다. 적게 잡아도 편호로 보아 50만 명 이상이 당시 수도였던 오늘날 개성 지역에 거주하였던 것이니 당대의 대도시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규모는 바로 위의 기준처럼 노비와 같은 천민 계층은 포함되지 않은 숫자로 보이기에 이조차도 최소한의 숫자라고 봄이 옳겠다.
전통사회에서도 인구조사(Census)는 분명 있었다. 그렇기에 부분적으로나 위와 같은 수치들이 역사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국가의 행정상 필요성 때문에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기에 조사도 임의적이었고, 또 고대 국가들의 경우 점령자의 피점령지로 전락하였을 때의 조사된 수치들도 병존하고 있기에 해석에는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거칠게나마 정리해보자면, 기원전의 예나 낙랑 지역같은 경우에는 20여만 명씩이나 거주하고 있었고, 서기 2~3세기가 되면 만주에서 한반도까지 (읍루 등 제외한) 파악 가능한 곳들만 해도 최소 2백만 명대, 삼국시대 말엽에는 3대 수도는 전성기 때 도합 3백만 가까이 되었고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 양국만 해도는 7백 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영토의 남부만 확보한 고려의 경우엔 공식기록상으로는 전국 210만 명에 수도는 10만 호였다고 하는데, 제외된 계층이나 인구집단이 있었던 듯하니 이를 임의로 반영해보면 대략 4백만 명 이상으로 잡을 수가 있다. 비교검증을 위해 참고로 고려말의 혼란 끝에 건국된 조선 초만 해도 4~5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니 크게 차이는 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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