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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발해를 잇다 - 역사 속 경계인들의 이야기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 정도씩은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학문을 하는 이들은 학설이든 주장이든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정해진 양식으로 학문을 다뤄야 하다보니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실제로 인간들이 사는 현실은 완전 무질서(chaos) 그 자체의 세상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절대 원인과 결과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수가 없고, 또 통계적으로 아름다운 그래프가 나올 리가 없는 게 또 인간 세상이다. 뿐인가, 역사는 글자든 유물이든 기록 내지 물질로 남아야지만 다룰 수가 있다. 본질적으로 시작점부터 자료의 한계라는 제약을 안고 출발하는 셈이다. 남지 않은 무수한 정보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후대의 우리는 더 이상 그 존재 자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

에스페란토는 왜 Samideano가 필요한가

에스페란티스토가 서로를 부르는 표현이 있다. Samideano. 풀어보자면 Sama-Ideo-Ano, 즉 생각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좋은 뜻에서 그 의미는 이해가 간다. 사회적으로 주류가 아닌 이들끼리 모여 같은 생각을 가지고 단합하여 이 힘든(?) 세상을 이겨낸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용어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심적으로는 부담감이 엄습해온다. 왜 우리는 생각이 “같아야” 한다는 것일까?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이 서로에게 ‘같음’을 강요해온 기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것을 처음으로 강요했던 대표적 사례는 고중세의 종교, 특히 일신교 사상이다. 조금만 그 기준에서 벗어나도 이단으로 몰아붙였던 역사를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또한 근현대로 넘어와서는 사상이 그 ..

(신간) 후삼국, 영웅들의 시대 (주류성출판사)

각국의 역사는 서로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은근 서로 닮은 구석들이 엿보이곤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쟁투를 벌였던 삼국시대는 마치 중국의 위, 촉, 오 세 나라가 등장하는 삼국지(三國志)를 연상시키는 시대입니다. 또 고려 때인 1270년에 무신정변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 무려 1백 년 간이나 지속되었던 무신정권의 경우는 일본의 쇼군(將軍)과 막부(幕府) 체제를 연상케 하는 그런 비상했던 시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본의 전국시대는 거의 2천 년의 격차가 있음에도 나라 전체가 싸움터가 되었다는 뜻에서 공히 전국(戰國)시대라고 일컬어집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시기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바로 후삼국시대입니다. 진성여왕 치세와 더불어 통일신라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각지에서 서로..

(신간) 어린왕자 반스 - Prince Vance & Princo Vanc'

고전 동화 중에 "Prince Vance"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저자는 엘리너 퍼트넘(Eleanor Putnam)과 알로 베이츠(Arlo Bates, 1850~1918)인데, 사실 이 둘은 부부입니다. 엘리너 퍼트넘은 해리엇 베이츠(Harriet Bates, 1856~1886)의 필명입니다. 1882년에 결혼한 베이츠 부부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세상은 무정하게도 아내를 만 29세의 나이에 앗아가고 맙니다. 그리고 혼자가 된 남편에게 남겨진 것은 아내의 유작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빛을 본 작품이 이 Prince Vance입니다. 영어로 쓰인 원작은 시간이 지나 당시 절판이 되었고, 우연히 어느 에스페란티스토의 눈에 띄어 다시 세상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에스페란토로 다시 쓰인 이 소설은 영..

(신간)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 (feat.에스페란토 배움의 이유)

은퇴를 준비하며 버킷리스트를 만들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아이디어 중 하나가 다개국어 사용자(polyglot)가 되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어를 잘 하는 인구만 해도 10억 명이나 되니 나 하나 좀 더 잘 한다고 해서 (어차피 평생 해도 원어민만큼도 못하겠지만) 조금도 튀지 못할 테니, 기왕이면 여러 개 언어를 동시에 다룰 줄 안다면 각각은 얼마간 부족하더라도 다 합치면 그나마 희소성(?)의 가치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 버킷리스트는 달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나이 들어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나마 젊었을 적 기초만이라도 조금씩 깨쳐둔 게 지금의 나이 치고는 발음에는 조금 도움은 되는 것도 같지만 이 또한 자..

고구려 환도성과 평양성, 그 수도 이전의 역사

고대 삼국에서 천도를 한 번도 안한 국가는 신라 하나뿐이다. 정확히는 신문왕(神文王) 때인 689년에 달구벌(達句伐), 오늘날 대구 일대로 옮겨갈 계획을 세웠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실행까지는 되지 않았다. 즉위 직후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무사히 극복한 그는 아버지 대에 끝난 나당전쟁 이후의 신라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전력을 다한 인물이다. 특히 지방행정을 정리한 공이 큰데, 서원소경(西原小京, 충북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 전북 남원)을 신설한 것도 그였고, 오랜 전쟁이 끝난 만큼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고구려 유민들의 보덕국(報德國)을 해체시킨 것도 그였다. 또한 완산주(完山州)를 비롯해 청주(菁州), 웅천주(熊川州), 무진주(武珍州), 사벌주(沙伐州) 등을 설치하여 최종적으로 9주(州) ..

에스페란토와 그 경쟁자들(Esperanto and Its Rivals)

에스페란토의 역사를 다룬 책은 꽤 많습니다. 에드몽 프리바(Edmond Privat)가 에스페란토로 쓴 자멘호프 전기나 에스페란토의 역사도 그렇고, 코르젠코프(Aleksander Korzhenkov)의 자멘호프의 인생(The Life of Zamenhof)도 에스페란토의 역사를 짧지만 깊이 있게 다룬 저작입니다. 제가 최근에 본 것은 “에스페란토와 그 경쟁자들(Esperanto and Its Rivals)”이라는 영어로 쓰인 책입니다. 총 240쪽이긴 하지만 본문은 168쪽까지여서 읽는 데 많은 부담은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출판한 곳이 흔히 유펜(UPenn)으로 약칭될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라는 점입니다. 즉 일반적인(혹은 쉬운) 대중 교양서가 아니라 대학에서 직접 출간할 정도로 전..

언어가 세계를 감각하는 법 (feat. 에스페란토는 정말 쉬운가?)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감독의 2017년작 라는 영화는 장르가 SF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어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원작 자체가 테드 창(Ted Chiang)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속 단편이기도 한데, 그것은 인류가 처음 외계인과 조우하였을 때 어떻게 대화를 나눌 것인지를 소재로 다룬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사실 외계인이라는 존재를 빼고 그냥 서로 언어가 다른 지구상의 이종족을 만났다고 가정했을 때에도 통용되는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개봉한 에도 마찬가지로 외계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의사소통할 것인지를 다룬 부분이 나옵니다. 다만 아무래도 영화라는 시간 제약상 너무 쉽게(?) 어휘간 공통점을 찾아가면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부분이 좀 아쉽긴 했습니다. 주제..

고대 한반도에 있던 말갈(靺鞨)이라는 존재

역사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가득하다. 자칫 잘못 해석하는 순간 고대 로마가 한민족의 역사가 되기도 하고, 고대 스키타이가 갑자기 신라가 되기도 하는 게 역사(?)이다. 그만큼 조심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 곧 역사이다. 그럼에도 구더기 무서워 장을 안 담글 수는 없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 다룰 주제는 정답이 없는 이야기이다. 바로 고대 한반도에 실존하였던 말갈(靺鞨)이란 존재이다. 말갈은 거칠게 말해서 기원전부터 존재하였던 옛 숙신(肅愼)을 모태로 한 읍루(挹婁), 물길(勿吉) 등의 후예 정도로 보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와 중국계 역사서들간의 차이이다. 에는 읍루는 아예 등장하지도 않고, 물길은 504년에 한 번 언급이 있고, 숙신은 121년과 246년, 280년에 세 차례 등장할 ..

말갈(靺鞨)은 과연 한민족의 선조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승만이고, 또 일제 패망 당시 마지막 주석은 김구였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물론 그 사이에도 여러 명의 대통령 혹은 주석이 재임하였다. 그 중에 이승만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통령을 지낸 이가 바로 박은식(朴殷植)이다. 나름 독립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인데, 흥미롭게도 『한국통사(韓國痛史)』즉, 조선 말부터 일제의 국권 침탈까지의 아픈(痛) 역사를 다룬 역사서의 저자로 더 유명할 것 같다. 그런데 시대적 영향으로 민족주의적 의식이 강했던 박은식이 쓴 글 중에는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라는 일종의 단편 역사소설이 있다. 꿈속에서 금나라 태조 아구다(阿骨打)를 만나 민족의 고통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조언을 듣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다. 다른 부분은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