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준비하며 버킷리스트를 만들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아이디어 중 하나가 다개국어 사용자(polyglot)가 되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어를 잘 하는 인구만 해도 10억 명이나 되니 나 하나 좀 더 잘 한다고 해서 (어차피 평생 해도 원어민만큼도 못하겠지만) 조금도 튀지 못할 테니, 기왕이면 여러 개 언어를 동시에 다룰 줄 안다면 각각은 얼마간 부족하더라도 다 합치면 그나마 희소성(?)의 가치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 버킷리스트는 달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나이 들어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나마 젊었을 적 기초만이라도 조금씩 깨쳐둔 게 지금의 나이 치고는 발음에는 조금 도움은 되는 것도 같지만 이 또한 자기위안에 불과하겠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외국어, 그것도 다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일종의 이룰 수 없는 혼자만의 로망같은 것이겠지요. 여하튼, 최근에 또 읽은 책 중에 이 ‘다중언어’ 사용자를 심도 있게 분석한 책이 있어 오늘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제목은 “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The Power of Language)”입니다.

저자 자신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면서도 몇몇 동양어까지 포함해서 10여 개 언어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대단한 언어 능력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심리언어학이라는 약간 니치한 영역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는 전문 교수이기도 합니다. 여러 나라들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유럽계 출신들이 많이들 그러하듯 각국의 언어들을 어려서부터 섞어서 보고 듣고 배우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도 있는 데다가, 심지어 결혼도 다른 언어들을 하는 남자와 만나서 했다보니 집안에서도 여러 나라 말을 섞어 사용하는 게 다반사인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단일언어 환경에서만 자라나 외국에 길게 거주한 적도 없기에 듣기만 해도 부럽기 짝이 없는 환경이지만, 어쨌든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일찍이 다중언어 뇌 연구를 시작한 특이한 경력자이기도 합니다. 책의 내용 전체를 통째로 소개할 수는 없으니 마찬가지로 눈에 띄는 내용만 발췌하여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중언어, 혹은 최소한 이중언어를 사용하면 뇌의 구조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마치 신화처럼 전해지듯이 외국어를 배우면 노년에 치매 걸릴 확률적으로 낮아진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여기에 더해 여러 언어를 동시에 복합적으로 할 줄 안다면 더불어 창의력까지 높아진다는 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라고 합니다. 기억 혹은 지식이 뇌의 한 부분에 (컴퓨터가 그렇듯이) 저장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다개국어로 그 언어마다의 환경과 문화까지 함께 복합적으로 뇌에 저장이 된다면 그 효과는 훨씬 증폭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입니다.
책에서는 병렬 처리라는 표현을 쓰는데, 쉽게 말해 일반인들이 고작 어느 하나의 키워드를 가지고 연상해서 몇 개 떠올릴 때 다중언어 사용자는 언어적 상호작용을 통해 더 넓은 스펙트럼을 훑으면서 더욱 많은 연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냥 듣기만 해도 맞아 보이지요. 창의력의 정의를 좀 더 넓게 해석해서, 이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을 어떻게 의미 있게 새롭게 조합해내느냐까지 포괄한다면, 다중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보편적인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여지 또한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언어는 언어마다 고유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유럽의 인근 지역 언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는 서로 차별화된 발전환경을 가지고 있듯이 말입니다. 더욱이 우리 동양어들은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하더라도 바다로 가로막혀 상호 고립적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문화와 문맥을 가진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을 인식하는 틀 자체가 확장되는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한 언어로 사과를 떠올릴 때 고작 색깔이나 맛 혹은 그와 얽힌 약간의 에피소드 정도가 떠오른다면, 여러 언어로 사과를 익혔다면 각 문화권마다 사과가 어떤 상징으로서 그 사회들에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는지까지 인식의 폭이 훨씬 넒어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모국어 대신 외국어를 사용할 때에는 좀 더 진실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자기 스스로도 속이기 쉬운 자연스러운 모국어가 아니라 어쨌든 생각이란 것을 해야 하는 외국어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이성적이 되기 쉽다는 통계적 결과입니다. 또한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 언어가 가지는 문화적 배경에 맞춰 또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예전에 JYP가 한국어로는 불같이 화내기가 쉬웠는데 영어로는 그만큼 화를 내지는 못하겠더라고 했던 게 떠오르네요.)
더불어서 저자는 실리적으로 다개국어 사용자일수록 연봉이 더 높고 노년에 더 건강하게 사는 등의 부수적인(?) 정보도 주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인간에게 있어 배움이란 곧 돈이자 건강이라는 것을 이 책의 저자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에스페란토에서는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직관적으로는 빠르게 다개국어 사용자로 거듭날 수 있는 쉬운 언어를 고른다고 했을 때 가장 우선적 대상으로 고려해볼 만하겠네요. 어차피 영어는 싫어도 해야 하는 대상이라면, 그 억지로 배워야 했던 영어에서 조금만 더 파생해서 그보다 더 빨리 접근할 수 있는 2차 언어로서는 에스페란토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항상 곤혹스러운 영어의 수많은 불규칙들에 치를 떨어본 사람들이라면 얼마든지 이 언어의 특장점인 단일한 규칙성이 꽤나 합리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같은 한자 기반에 문장구조까지 흡사한 이웃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좋은 옵션입니다. 유럽계 언어보다 더 빨리 배울 수 있으니 그건 그거대로 배우고, 추가로 유럽어를 새로 하나 배우고자 한다면 가장 추천하기 좋은 것이 곧 에스페란토일 수는 없을까요. 스펠링과 발음이 불일치(?)하는 프랑스어, 문장이 길고 관사가 우리 언어습관과 맞지 않는 독일어, 단어에 성 구분이 있어서 커다란 진입장벽이 되는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 등은 우리가 현지에서 살지 않는 한 쉽게 익히기 어려운 언어들입니다.
기왕 서양 언어를 배운다고 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접근이 쉽고 불편한 요소가 없는 언어를 선택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다중언어 사용자로 거듭나고자 할 때 내가 다룰 줄 아는 언어의 숫자에 좀 더 쉽게 +1을 할 수 있는 옵션으로 과감히 에스페란토를 추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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