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 에스페란토

에스페란토는 왜 Samideano가 필요한가

위클리 히스토리 2026. 5. 12. 09:28

 

에스페란티스토가 서로를 부르는 표현이 있다. Samideano. 풀어보자면 Sama-Ideo-Ano, 즉 생각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좋은 뜻에서 그 의미는 이해가 간다. 사회적으로 주류가 아닌 이들끼리 모여 같은 생각을 가지고 단합하여 이 힘든(?) 세상을 이겨낸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용어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심적으로는 부담감이 엄습해온다. 왜 우리는 생각이 “같아야” 한다는 것일까?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이 서로에게 ‘같음’을 강요해온 기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것을 처음으로 강요했던 대표적 사례는 고중세의 종교, 특히 일신교 사상이다. 조금만 그 기준에서 벗어나도 이단으로 몰아붙였던 역사를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또한 근현대로 넘어와서는 사상이 그 대상이 되었다. 우리 사회의 이념을 공통적으로 주입시키면서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순간 이념적 이단으로 간주되어 정신개조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벤담의 판옵티콘(Panopticon)에서 착안하여 국가가 어떻게 개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지, 즉 획일화시키는 권력구조를 밀도 있게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의 판옵티콘은 곧 모든 개인을 “똑같은” 존재로 만들어내는 역할의 상징물이다.

 

뿐인가, 사람들은 주로 산업혁명에만 관심을 두지만 교육학자들은 동시에 이 당시의 학교에 주목한다. 산업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린 대중들을 대상으로 “동질적인” 산업일꾼들을 찍어내듯 생산하였던 교육시스템 말이다. 이는 마치 헨리 포드의 컨베이어 벨트의 비물질적 형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착상을 얻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자본에 면죄부를 주는 신선한 논리를 도출해내기도 했다. 그의 핀 공장 사례는 유명하다. 과거 가내수공업 시절에는 각자가 핀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만들어내야 했지만, 이제 공장의 시대로 접어들어서는 모두가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만 수행할 뿐, 즉 공장의 기계 부품처럼 전락한 현실을 인간성을 제거한 채 놀랍도록 생산성의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 그의 접근논리였다.

 

무언가 같아진다는 것은 그래서 효율성이 높아진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상 투쟁이 극심하였던 냉전 당시에는 체제 경쟁을 위해 누구나 다들 같은 생각을 강요하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했을 것이다.

 

다만 진화론적으로 인간은 오히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 역설적으로 멸종하고 만다. 히틀러와 그의 국가사회주의는 독일인들을 단일한 우수 형질로 만들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그런 방향이 그들의 몰락을 앞당겼다. 공산주의 세력은 모두가 단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똑같이 살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과는 거꾸로 나타났다. 자본주의를 찬양할 생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그것은 돈만 된다면 모든 것을 허용하는 가치관이 깔려 있기에 최소한 다양성만큼은 어느 정도 보장받을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어찌되었든 “다름”을 받아들일 공간이 조금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는 결코 자유주의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에스페란티스토끼리 서로 samideanoj라고 부를 때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그 기반 위에서 공히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 텐데, 시작부터 서로 같음을 선상에 올려두고 그 다음 논의가 시작되는 것 자체가 이런 나의 생각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바로잡자면, 적자생존(適者生存)은 Survival of the Fittest가 아니라 Survival of the Fitters라는 사실이다. 최상급인 the fittest를 사용하면 사실 최적자(最適者)만 생존한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찰스 다윈이 주장한 것은 실제로는 여러 적자들(the fitters)이 동시에 생존하고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단 하나만 살아남는 것은 곧 멸종의 다른 말이다. 여러 종류의 다양한 적자들이 있어야지만 그 종은 살아남고 어쩌면 번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결코 “같아야”지만 생존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달라야” 생존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커진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페란티스토는 굳이 samideanoj가 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나의 생각만 강요했던 수많은 다른 인공어들의 운명을 오늘날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다. 사회적 결벽증은 지극히 위험하다. 단일해지면 오히려 도태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에스페란티스토가 모두 diversideanoj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에스페란토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슷한 구석이 있는, 그래서 어쩌면 similideanoj가 되는 편이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