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페란토의 역사를 다룬 책은 꽤 많습니다. 에드몽 프리바(Edmond Privat)가 에스페란토로 쓴 자멘호프 전기나 에스페란토의 역사도 그렇고, 코르젠코프(Aleksander Korzhenkov)의 자멘호프의 인생(The Life of Zamenhof)도 에스페란토의 역사를 짧지만 깊이 있게 다룬 저작입니다.
제가 최근에 본 것은 “에스페란토와 그 경쟁자들(Esperanto and Its Rivals)”이라는 영어로 쓰인 책입니다. 총 240쪽이긴 하지만 본문은 168쪽까지여서 읽는 데 많은 부담은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출판한 곳이 흔히 유펜(UPenn)으로 약칭될 정도로 유명한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라는 점입니다. 즉 일반적인(혹은 쉬운) 대중 교양서가 아니라 대학에서 직접 출간할 정도로 전문성이 담보된 책이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저자 자신도 스페인의 현직 교수 출신인 로베르토 가르비아(Roberto Garvia)라는 분입니다. 신기하게도 총 분량 중 거의 50쪽이 주석과 참고서적일 정도로 아주 열심히 조사하고 집필된 책입니다. 다만 최근 책은 아니고 2015년작이니까 한 10년은 되었네요.

보통 에스페란토계에서 쓴 에스페란토의 역사는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기 마련인데(그나마 코르젠코프의 책은 자멘호프가 에스페란토를 임의로 고치고 싶어 했다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담고는 있지만), 이 책도 물론 친-에스페란토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에스페란토’만’ 다루기보다는 그 전후의 주요 경쟁 언어들의 동향에 대한 정보와 함께 “왜” 인공어들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국제사회적 배경 및 그중 에스페란토만 살아남게 된 동인을 부지런히 조사하고 정리한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더욱이 자멘호프에 대한 찬양은 삼가고 나름 객관적으로 그의 인간적 한계도 포함하는 등 책에 대한 신뢰가 가는 측면이 많습니다. 또 에스페란토에 대한 (1백 년 전이긴 해도) 통계도 담고 있는데, 정말 궁금해 하던 자료인데 모처럼 발견할 수 있어서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부 공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에스페란티스토 통계 (1927년, 단위: %)
| 미국 | 영국 | 유럽 | 전체 평균 | |
| 성별 | ||||
| 여성 | 37 | 41 | 26 | 36 |
| 남성 | 63 | 59 | 74 | 64 |
| 연령 | ||||
| ~20 | 27 | 21 | 19 | 25 |
| 21~30 | 19 | 32 | 34 | 29 |
| 31~40 | 24 | 27 | 20 | 24 |
| 41~50 | 17 | 15 | 15 | 13 |
| 51~60 | 10 | 5 | 8 | 7 |
| 60~ | 3 | - | 4 | 2 |
| 최종 학력 | ||||
| 초중등 | 19 | 48 | 24 | 31 |
| 중고등 | 43 | 28 | 40 | 36 |
| 대학교 | 28 | 9 | 17 | 17 |
| 교육대학 | 4 | 2 | 10 | 5 |
| 상과대학 | 3 | 1 | 5 | 3 |
| 기타 전문대학 | 4 | 12 | 4 | 7 |
| 직업 | ||||
| 비숙련 노동자 | 7 | 8 | 5 | 6 |
| 숙련 노동자 | 5 | 15 | 11 | 11 |
| 사무직 | 26 | 33 | 11 | 25 |
| 전문직(+교사) | 26 | 21 | 41 | 28 |
| 학생 | 24 | 8 | 16 | 16 |
| 주부 | 10 | 13 | 10 | 11 |
| 기타 | 2 | 1 | 4 | 3 |
- 에스페란토 학습 통계 (단위: %)
| 미국 | 영국 | 유럽 | 전체 평균 | |
| 학습 시기 | ||||
| ~1910 | 27 | 21 | 20 | 23 |
| 1910~1919 | 18 | 20 | 16 | 18 |
| 1920~1926 | 55 | 59 | 64 | 59 |
| 학습 방법 | ||||
| 사설 강좌 | 33 | 28 | 42 | 33 |
| 독학 | 44 | 28 | 44 | 37 |
| 에스페란토 모임 | 7 | 24 | 5 | 14 |
| 야간학교 | - | 11 | - | 5 |
| 학교(+대학) | 12 | 5 | 5 | 8 |
| 라디오 강좌 | 3 | - | 4 | 2 |
| 기타 | 1 | 4 | 1 | 2 |
| 에-토 전파 활동 | ||||
| 사적 활동 | ||||
| 친구 | 28 | 36 | 22 | 31 |
| 친인척 | 5 | 11 | 12 | 9 |
| 동료 | 5 | 7 | 1 | 5 |
| 소계 | 38 | 54 | 35 | 45 |
| 공적 활동 | ||||
| 교사 | 8 | 2 | 2 | 4 |
| 신문(언론) | 32 | 19 | 32 | 26 |
| 에-토 홍보글 | 4 | 8 | 7 | 7 |
| 에-토 홍보모임 | 4 | 8 | 7 | 7 |
| 라디오 | 3 | 1 | 4 | 2 |
| 기타 | 4 | 2 | 6 | 4 |
| 소계 | 61 | 47 | 64 | 56 |
| 학습 이유 | ||||
| 평화 | 24 | 31 | 30 | 28 |
| 정치 선전 | 3 | 6 | 2 | 4 |
| (종교) 포교 활동 | 7 | 2 | - | 2 |
| 언어에 대한 관심 | 25 | 24 | 30 | 26 |
| 여행 등 | 30 | 29 | 22 | 28 |
| (새로움)신기해서 | 6 | 5 | 3 | 5 |
| 기타 | 5 | 3 | 13 | 6 |
* 퍼센트의 합계가 100을 넘는 경우는 복수응답이 반영되었기 때문임
그렇다면 어떻게 에스페란토는 성공했고 또 마찬가지 의미에서 실패하였다고 평가를 받았을까요? 이 또한 길게 다 쓸 수는 없으니 인상적인 부분만 발췌해서 요약해보겠습니다. 우선 시대적 배경이 중요합니다. 원래 인공어의 시조격이 되는 볼라퓌크(Volapük)만 해도 우리가 아는 그런 대중적인 언어로서 처음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 근현대가 시작되고 (유럽을 중심으로) 점차 세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각국의 서로 다른 언어를 어떻게든 통일시켜야 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그것이 각광을 받게 된 게 그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도(Ido) 때와 비슷하게도 살아 있는 ‘언어’로서 기능토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묵과한 까닭에 한때의 인기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페란토가 등장하지요. 유대인 사회의 각종 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자멘호프는 저자의 말마따나 참으로 영리하게(!) 새로운 언어가 어떻게 하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될 지를 잘 알았습니다. 창안자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사용자들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하는 참으로 파격적인 결정은 바로 그였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생물인 언어는 그 이후로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스스로 살아 움직여가면서 퍼져 나가게 됩니다. 나름의 언어적 컨셉(평화, 민족 중립성 등)도 주효했지만,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마치 자기 것인양 열과 성의를 다하게 만드는 문화가 정립된 것도 아주 효과적인 확산의 기반이 되어주었습니다.
이후 이도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운동은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도는 볼라퓌크의 전례를 따라가고 맙니다. 여기서 저자는 VHS와 베타맥스(Betamax), 쿼티(Qwerty) 자판과 드보락(Dvorak) 자판 같은 전통적인 표준화 경쟁 사례를 예시로 드는데, 마치 진화론처럼 최고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더 널리 퍼진 것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주장이 핵심입니다. 즉 이도는 가장 최적화되고 가장 완벽한 인공어가 되는 것을 모토로 삼았지만, 그것은 표준화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잘못 둔 자충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언어는 최고여야지만 모두가 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부족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를 만들어둔 다음에야 자생적으로 확대 발전한다는 점을 이도는 묵과한 것입니다. 게다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문법을 고쳐나가면서 내부적으로 혼란을 부추겼으니, 누가 그렇게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언어를 쉽고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시간이 흘러 백 년이 지나도록 살아 남은 인공어는 오늘날 에스페란토 하나뿐입니다. 여기까지는 에스페란토의 성공 스토리이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자멘호프의 초기 탁월했던 의사결정 이후 에스페란토는 유일하게 생존한 인공어가 될 수는 있었지만, 그가 그토록 원했던 국제어로서의 위상은 끝내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각국의 자국어 권력다툼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긴 했지만, 여기에는 에스페란토의 이상인 비민족성이 어쩌면 가장 큰 허들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유사한 인공어(!)이면서 전략적 접근은 다르게 한 사례로 드는 게 바로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는 고대에 실존하였던 사어(死語)에 기반하여 오늘날 현대적으로 복원한 사실상 계획된 인공어입니다. 마치 민족에 기반을 둔 버전의 에스페란토처럼 말입니다. 다만 결정적 차이는 그 언어는 탄탄한 실사용 대상층을 두고 있었다는 점, 또 그들은 원래 서로 각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언어를 통일해야 하는 당면한 니즈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더욱이 민족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이 강했기에 뚜렷하게 그 언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사 또한 충만했다는 점 등에서 느슨한 연대와 같았던 에스페란토 사용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곧 히브리어는 같은 민족으로서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목적이 너무도 분명했던 언어였습니다.
그에 반해 에스페란토는 안 배워도 그만인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언어로 포지셔닝을 하였기에 그 속성상 아무래도 소위 결속력 측면에서는 결코 다른 어떤 민족어도 뛰어넘을 수가 없는 한계가 처음부터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지금의 현실이 말해줍니다. 취미로서의 학습 언어, 사교모임 목적의 친목 언어, 매년 국제행사를 위시한 여행 언어로서는 살아 남았지만, 특정 지역 혹은 특정 거주집단을 대상으로 한 제2의 공용어 수준까지는 결코 다다르지 못한 현실 말입니다.
안타깝지만 현실은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에스페란토는 인공어로서는 가장 성공한 언어이지만 안타깝게도 국제어로서는 결국 실패한 언어로서 묘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It ain't over ‘til it's over”라는 유명한 말마따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닌 것도 맞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죽은 자식 xx 만지기”라는 우리말 속담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집니다. 현재 에스페란토는 그 사이 어디쯤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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