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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베네치아, 백제의 해외 진출

백제의 시작은 부여였다. 처음에는 저 멀리 북부여 출신의 구태(仇台)라는 이가 이끄는 한 일파가 졸본 지역에 정착하였다. 후에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 세력의 남하로 기존 세력인 비류와 온조가 재차 더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렇게 삼한 중 가장 강력했던 마한(馬韓) 영토에서도 옛 대방의 땅이라고 불린 북쪽 지역에 처음 정착하였던 것이 백제 역사의 시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초기 역사는 조선시대의 실록같은 자료가 있을 리 없이 때문에 불확실과 혼돈 그 자체이다. 그러나 대략적으로는 비류의 미추홀과 온조의 위례성의 생존 경쟁에서 좀 더 환경에 잘 적응한 온조 측이 비류의 세력을 흡수함으로써 백제의 역사가 시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도 처음에는 마한의 54개 국 중 하나(이때만 해..

주몽의 진짜 이름은?

의 고구려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高)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여기뿐만 아니라 , 같은 우리쪽 역사서는 물론이고, , , 등 중국측 역사서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또한 그의 이름의 유래 역시 그 자료들에서 공통적으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하는 까닭에 그것으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이 순서는 참으로 이상하다. 태어날 때의 이름이 주몽이었는데, 그 이름이 그가 활을 잘 쏴서 주어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순서가 바뀐 듯한 느낌이다. 그의 이름은 원래 다른 것이었는데, 성장하여 명사수의 자질을 보이자 별칭으로 주몽이 된 것이라는 해석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실제로 그의 이름이 주몽으로 정해진 것..

백제와 미추홀, 제3의 부여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이야기와 그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운 사실 정도는 대개 알고 있다. 이를 실제 역사기록에서 찾아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고구려의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高朱蒙, 기원전 58~기원전 19)은 북부여에서 예(禮)씨 부인을 얻어서 살다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부여를 떠났다. 그리고는 기원전 37년에 22세의 나이로 졸본(卒本)의 비류수(沸流水) 가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졸본부여 혹은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의 세 딸 중 둘째와 결혼하였다. 얼마 후 졸본부여의 왕이 사망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렇게 기존 세력을 흡수함으로써 고구려 건국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주몽은 그곳에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비류(沸流), 둘째는 온조(溫祚)였다. 그런데 부여에..

Gansu(强首), la Frutempa Kleristo de Sinla

Gansu estis de Ĵunŭongjong(中原京, nuna Ĉunĝu(충주) urbo). Lia patro estis Sokĉe(昔諦), kies rango estis Nama(奈麻, la dek unua el oficaj rangoj de Sinla) en Sinla. Iam la patrino de Gansu sonĝis pri homo kies kapo havis kornon, poste ŝi gravediĝis kaj naskis la bebon kiu havis altan oston sur la dorsokapo. Sokĉe kunprenis sian filon al tiama saĝulo. “Ĉi tiu knabo havas tian kranion. Kion vi pensas?”..

Semajna Historio 2025.12.17

보장왕, 고구려와 발해 그 사이

668년 가을 9월, 드디어 당나라의 원정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포위한 지 한 달도 넘게 걸려 가까스로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정군의 실력이라기보다는 고구려의 내부 분열이 더 큰 원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666년에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 맏이 연남생(淵男生, 634~679)에 대항해 둘째와 셋째 아들이 평양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이번 전쟁을 야기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둘째와 셋째가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인 보장왕(寶藏王) 고장(高臧, ?~682)을 붙잡고 평양성에 틀어박혀 최후의 저항을 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평양성 포위가 한 달이 넘었을 때 이제는 패전이 확실해졌다고 판단한 보장왕이 셋째 연남산(淵男産, 639~701)을 설득해 수령 ..

을지문덕과 다문화사회 고구려

우리가 을지문덕에 대해 그나마 들어서 아는 것이라고는 살수대첩 하나뿐이다. 워낙에 탁월한 전략운용이 돋보이는 작전이어서 그런지 기록들을 차분히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직접 느껴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그가 정말로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신인지도 불분명하다.심지어 그의 성씨가 을(乙)인지, 을지(乙支)인지도 명확치 않다. 그가 을씨라고 보는 쪽은 고구려 역사 초기에 등장하는 을씨 재상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 - 제9대 고국천왕(179~197) 때좌보 을두지(乙豆智) - 제3대 대무신왕(18~44) 때대보 을소(乙素) - 제2대 유리왕(B.C.19~A.D.18) 때하지만 3세기를 마지막으로 을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

을지문덕 그리고 요동전쟁

598년 2월의 아직 한창 추운 겨울 어느 날, 고구려 장수가 지휘하는 말갈 기병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수나라의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였다. 이는 갑작스런 게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고구려에서는 수나라가 마지막 남은 남진(陳)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중원을 통일한 것에 충격을 받고 무기를 정비하고 식량을 축적하면서 외침에 대비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선왕의 뒤를 이어 제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7) 고원(高元, ?~618)은 반복적인 사신 파견을 통해 수나라의 내실을 염탐하면서 이들의 역량을 확인해왔는데, 동시에 그에 대응하여 갈고닦으며 준비해온 고구려의 실력을 한번 확인해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사실 2백 년 넘게 이어진 중국의..

고구려의 마지막 국왕, 안승(安勝)

668년 9월의 어느 가을 날, 고구려의 평양성이 당나라 원정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날로 고구려의 700년 대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국가는 무너졌어도 그 구성원들까지 모두 고구려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藏王)의 외손이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 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은 불확실한 미래를 품고 자신을 따르는 고구려인 4천여 호와 함께 669년 2월 신라로 망명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그가 보장왕의 서자(庶子)로 고안승(高安勝)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그는 연안승(淵安勝)이 맞다. 아마도 큰아버지 연개소문이 역사에서는 쿠데타로 국왕을 시해한 역신으로 남다보니 자연스럽게 연씨임을 가리고자 그저 안승이..

BALHEGO(渤海考) - Historio de Balhe Regno

Enkonduko de la Aŭtoro Gorjo(高麗) Regno ne sukcesis fariĝi potenca lando, ĉar ĝi ne skribis la historion de Balhe Regno. Prae estis Gogurjo(高句麗) Regno norde, Bekĝe(百濟) Regno sudokcidente, kaj Sinla(新羅) Regno sudoriente. Estus kompreneble verki la historion de la tri regnoj, kaj estis prave ke Gorjo faris tion. Kiam antaŭe Bekĝe disfalis kaj ankaŭ Gogurjo ruiniĝis, Sinla posedis la sudan teritorio..

Semajna Historio 202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