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의 명문가 출신인 양수(楊修, 175~219)는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글 읽기는 좋아했다고 한다. 성장해서는 승상 조조의 주부 즉 비서가 되었는데, 그와 조조 간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이 여럿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조조가 공사 중인 동작대를 시찰하러 나섰다가 문 앞에 멈추어 살펴보더니 그 자리에 글자 하나를 적었다. 바로 “활(活)”이었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었는데, 양수는 곧바로 조조의 뜻을 눈치채고는 문 크기를 줄여야 한다고 해석해주었다. 이 또한 무슨 뜻인가 싶어 하는 이들에게 양수가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였다.
“문(門) 사이에 활(活) 자가 있으면 곧 넓다는 뜻의 “활(闊)” 자가 됩니다. 즉 승상께서는 문이 너무 넓다고 하신 것입니다.”
조조의 번뜩이는 재치도 눈에 띄지만 이를 단번에 알아챈 양수도 만만치 않은 재간꾼이었다.
한 번은 조조가 살타래처럼 생긴 사탕 한 상자를 선물로 받고서는 그 합 위에 “일합소(一合酥)”라고 적어두고는 자리를 나가버렸다. 이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양수가 고민 없이 상자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었다. 나중에 조조가 돌아와서 그 사탕 상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자 양수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승상께서 한 사람당 한 입씩(一合, 풀어서 쓰면 一人一口) 먹으라고 쓰셨기에 저희들끼리 나누어 먹었습니다.”
참으로 머리회전이 좋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두 명의 재기발랄한 두뇌싸움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그저 장난에 불과했다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조금 더 심각한 상황이 조만간 찾아왔다.
219년 조조가 장로(張魯)를 공격하여 한중을 차지하였던 때의 일이다. 이후 그는 한중을 거점 삼아 촉땅의 유비를 마저 굴복시키려고 하였지만 방어선에서 막혀 더 이상 진군이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공세를 지속할지 그만 회군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조조는 “계륵(鷄肋)”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양수가 다른 이들에게 그 뜻을 풀어서 전하였다.
“승상께서는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를 들은 하후돈(夏侯惇)이 별 생각 없이 철수를 준비하였는데, 조조가 그의 부대가 군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이에 양수가 해준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는 양수를 더 이상 관용으로 대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였던 모양이다. 계륵, 즉 닭의 갈비처럼 먹을 부위도 적고 맛도 좋지 않은데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쉬운 부위를 떠올린 자신의 속마음을 양수가 너무도 쉽게 알아챈 것에 대한 인간적 분노도 그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자신이 어렵게 낸 문제를 매번 손쉽게 맞혀버리는 양수를 과연 조조가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짐작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하다. 나중에 양수는 불분명한 사유로 조조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바로 양수가 그간 조조의 후계 문제에 깊숙이 관여한 것이 이 사달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양수와 조식은 둘 다 모두 수재여서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사이였기에, 자연스럽게 양수는 조비와 조식의 후계 경쟁에서 가까운 조식을 밀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비에게 문필가적 자질이 부족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천재성에 있어서는 조식 그리고 양수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또한 양수 자신이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조조의 신생 위나라보다는 오랜 전통의 한나라 황실을 지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모양인데, 이를 위해서라도 강한 성격의 조비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유순한 성향의 조식이 더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였음직하다.
조비와 조식의 권력 다툼은 치열했다. 한 번은 조비가 측근을 궁으로 불러 상의할 일이 있었는데 주변 이목을 피하기 위해 광주리에 숨겨 데려온 적이 있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양수가 즉시 조조에게 고해바쳤고, 조비는 깜짝 놀라 대책 상담을 위해 또 다시 측근을 찾았다. 다만 이번에는 똑같은 광주리에 비단 등을 채워 보냈기에, 조조의 불시검문에 들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양수가 조비를 모함한 꼴이 되어 조조에게 미운 털 하나가 더 박히게 되었을 따름이었다.
양수 또한 조비가 측근을 활용하였듯이 그 스스로가 조식의 측근이 되어주었다. 예컨대 조조가 질문할 만한 것들을 미리 정리하여 조식에게 사전에 과외를 시켜주었는데, 실제로 조조가 물어볼 때마다 조식이 막힘없이 대답을 하자 조조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다만 역시나 의심 많은 조조가 혹시나 싶어 뒷조사를 해보니 양수가 미리 일러준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자 또 다시 양수는 조조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은 조조가 성문의 통행을 막게 하고는 조비와 조식 두 형제에게 성 밖에 다녀올 것으로 지시하였다. 당연히 문제 상황에서 이 둘의 대응을 보고자 함이었다. 먼저 조비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고지식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조식은 양수의 코치를 받아 성문 관리를 목 베고 임무를 수행하였다. 위왕의 직접적인 명이 더 우선이라는 양수의 판단이었다. 문제는 조조가 계속해서 자신의 객관적 판단을 그르치는 타인의 개입을 지독히도 싫어했다는 점이었다.
긴 고민 끝에 조조는 217년 마침내 자신의 후계자로 조비를 낙점하였다. 그간 똑똑한 조식에게 마음이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종합적으로 판단해보았을 때 냉철한 리더감으로 큰아들을 선택한 것이었다. 재기 넘쳤던 양수가 오히려 일을 그르친 셈이 되었다. 단순히 그 정도로 결말이 지어졌다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으나, 이 시대에는 인권같은 개념이 없었던 시절임을 알아야 한다. 안정적인 권력의 승계를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권력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 결코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는 시대적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조조는 자기 자식을 직접 제거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조비 외의 자식들에게 줄 서고 있었던 무리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언젠가 자신의 왕조에 생채기를 낼 잠재적 암세포들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수는 탄탄한 집안 배경에 자신의 빠른 두뇌회전과 명민한 사리판단을 믿고 스스로 자신감 있게 행동하였지만, 한편으로 그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사회집단 속에서는 그런 존재를 시기견제하는 이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했다. 그런 상황 하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경쟁상대도 매우 위험하지만, 그것이 심지어 자신의 상관일 경우에는 《한비자(韓非子)》에서 강조하였던 것처럼 군주의 역린(逆鱗)을 건드리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양수는 자신의 똑똑함에 함몰되어 시야를 폭넓게 바라보지 못하였던 게 그 자신의 한계점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양수는 생존해 계신 부모보다 더 먼저 마흔다섯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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