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천재들

권력 투쟁에서 밀린 비운의 천재, 조식(曹植)

위클리 히스토리 2026. 2. 4. 12:10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서 후세까지 이름을 남겼지만,
겸손하지 않은 탓에 기회를 잃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조는 아들만 25명을 낳은 삼국지 속 다산의 상징적 존재이다. 난봉꾼 기질이 다분했던 그가 그 여러 부인들 중 가장 사랑하고 개인적으로 존중하였던 인물은 무선황후(武宣皇后) 변씨(卞氏, 160~230)였다. 본처가 있었던 조조는 다섯 살 터울의 그녀를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80년에 첩으로 먼저 받아들이는데, 이후 오랫동안 그녀의 현명한 처사를 눈여겨 보고는 기존의 본처를 쫓아내고 그녀를 정실로 삼게 된다.

 

   조조와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는 조비, 조창, 조식, 조웅의 네 명이 있었다. 조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한나라 황제의 자리까지 찬탈하게 되는 조비(曹丕, 187~226)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그 다음 둘째 조창(曹彰)은 아버지 조조가 황수아(黃鬚兒, 노란 수염의 아이)라는 애칭으로 불렀을 만큼 뛰어난 무장이었으나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맏형과 차기 권력을 위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조식(曹植, 192~232) 역시 이미 그 당시부터 타고난 두뇌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막내 조웅(曹熊, ?~?)만큼은 너무 어려서 요절하였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어쨌든 조비가 역사의 승자가 되어 위나라 문제로서 이름을 남겼다면, 권력 쟁투에서는 비록 패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역사에 자신의 천재성을 널리 알리게 된 이는 조식이었다. 물론 조식 입장에서는 승자가 되지 못한 점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지만 말이다.

 

   조식은 어려서부터 천재로 유명했다. 10대에 접어들어서 이미 당대 지식인들의 기본 교과서와도 같았던 《시경》, 《논어》 등 10만 자를 통째로 외울 정도였다고 하며, 특히 글쓰기에 매우 능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 조조가 자신도 믿어지지가 않은 모양인지 아들 조식에게 노골적으로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대신 지은 것이냐?”

   “제가 말을 하면 자연히 논리가 세워지고 붓을 들면 그대로 문장이 완성됩니다. 지금 당장 증명해드릴 수도 있는데, 어찌 굳이 타인에게 부탁하여 대신 짓게 하겠습니까?”

 

   엄청난 자신감이다. 그렇다고 자존심 강한 천재의 독단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까탈스럽지 않은 성격에 순리대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고, 평소 권위 의식이 없었으며 화려한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의 뛰어난 재능에 비해서 그리 문제되는 행동거지는 없었던 셈이다.

 

   그의 타고난 재능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는 여럿 있다. 조조는 210년에 당시 자신의 본거지였던 업성(鄴城)에 동작대(銅爵臺)라는 높이 33m짜리 누각을 세웠는데, 완공되자 기념으로 그는 여러 아들들을 데리고 동작대에 올라 각자 시를 지어보도록 하였다. 이때 아들 조식이 일필휘지로 글을 완성해내자 조조 또한 놀라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아버지 조조가 어려운 문제를 낼 때마다 그는 쉽게쉽게 대답해냈기에 조조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차기 권력의 승계자로서의 자질 테스트가 이어졌다. 조조는 손권을 공격하려던 214년 당시 23세의 조식에게 업성의 방비를 맡기면서 실무 능력을 확인해보기도 했다. 다행히 이때의 테스트도 조조의 기대치를 만족시켜 통과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권력의 속성상 자연스럽게 차기 권력을 향해 줄 서는 이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조식에게도 그러했다. 조조와 교분이 있었던 정충(丁沖)의 두 아들 정의(丁儀)와 정이(丁廙), 그리고 양수(楊脩)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정의의 경우에는 조식의 형 조비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 조조의 사위가 될 뻔한 일이 물거품이 되면서 조비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 게 계기가 되었고, 동생 정이는 조식을 실제로 대단한 인물로 여겨서 따르게 된 케이스였다. 그리고 양수는 조조에게도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천재적인 참모형 인재였다.

 

   조조는 맏아들 조비와 재능 있는 셋째 조식 사이에서 갈등을 했다. 장자 상속이 권력의 시스템상 가장 안정적인 것은 당연했기에 기본적으로 그 방향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자꾸 똑똑한 자식이 눈에 밟히다 보니 여러 차례 마음이 동하였던 모양이었다. 조조의 결심을 만들어낸 것은 결정적으로 이 둘의 성격 차이였다.

 

   조식은 문인으로서의 뛰어난 재능만큼이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 일쑤였고 굳이 스스로를 포장하는 일에 취미가 없었으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단점이라면 술을 절제하지 못 한다는 점이었다.

 

   그에 비해 조비는 타고난 재능은 딱히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아버지 조조를 충심으로 따랐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준비된 리더로서의 면목을 보이고자 노력하였다. 그 덕분에 조비는 주위 신하들의 상대평가에서 동생 조식을 앞설 수 있었다.

 

   결과는 조비의 판정승이었다. 217년 겨울 10월 조조는 조비를 위나라의 태자로 최종 공표하였다. 사실 이 발표는 갑작스러운 것이었는데, 바로 전해 5월에 조조가 황제로부터 위왕(魏王)으로 임명받은 이후로 별다른 낌새 없이 정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나서 3년 후에 사망하게 되니 꼭 건강 탓을 하기도 어려운 시점에 후계자가 확정된 셈이었다. 사실 그래서 조비도 자신이 태자로 낙점받게 되자 의아해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승자는 승자였고 패자는 패자였다. 본인은 얼마나 이 상황을 냉정하게 받아들였을 지 모르겠으나, 권력의 정점에 설 기회를 잃은 조식은 이제 지뢰밭길 한 가운데에 자연히 놓이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를 인지하게 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았다.

 

   어느 날 조식이 마차를 타고 사마문(司馬門)을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조식은 별 생각 없이 행동했던 것이겠지만, 사실 사마문은 황제 전용 길로 이어져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조는 격노하였는데, 이제 막 차근차근 위나라의 기반을 다져나가던 시점이었기에 더욱 민감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그는 차마 자기 자식을 직접 처벌하지는 못하고 대신 궁문의 관리자를 처형해버리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다. 아마 조식도 식겁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이때부터 제후에 대한 법령기 강화가 되었고, 동시에 아들 조식에 대한 조조의 총애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조조는 태자 조비를 위해서라도 조식의 세력을 꺾어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조식의 측근인 양수가 머리도 똑똑하고 모략에도 능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살해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식의 불안감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219년 조인이 관우에게 포위당하여 고초를 겪고 있던 무렵에는 조식을 파견해 조인을 구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조식이 술에 취해 조조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조는 셋째 아들에 대한 마지막 희망마저 내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조조 사후 조비가 위나라 왕이 된 다음 조식의 측근인 정의와 정이 형제들 및 그 집안 남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식이 또 다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사고를 치자 탄원까지 조비에게 접수되었다. 다행히 조비가 어머니를 생각해서 조식의 작위를 낮추는 정도로 이번에는 봉합되었지만 말이다.

 

   망나니까지는 아니어도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조식이었지만 그래도 한번 멀어진 권력의 맛을 잊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그는 중앙정부에서 밀려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그 뛰어난 재능을 펼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여러 차례 형 조비 그리고 그 다음 황제인 조예에 이르기까지 거듭하여 읍소하는 글을 올렸다. 남아 있는 그의 글들을 보면 워낙에 만연체로 길게 써서 오늘날 읽기에는 힘들긴 하지만, 스스로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어떻게 하면 다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간절함 두 가지가 가득히 묻어나는 글들이 태반이다. 여러 가지 정책적 기획안을 조정에 올리기도 하고 긍정적 평가를 얻어내기도 하였지만 그 실행의 권한까지는 결코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232년 11월 28일, 한참 추운 겨울 날 조식은 평생 아쉬운 마음 한가득히 41세라는 한창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권력 다툼을 벌였던 친형보다 생물학적인 나이로 불과 1년을 더 산 생이었다. 냉정한 권력의 속성 탓에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채 억압과 핍박의 세월을 견뎌내며 참고 참아온 결과는 참으로 허무했다. 아무리 그자 좋은 제안을 올린다 하더라도 반대급부로 돌아온 것은 없었으며, 오히려 그가 관장하는 관리들이나 병사들은 무능하고 허약한 이들만 그것도 소수가 배정될 뿐이었다. 젊은 시절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것이 실책이 된 것 치고는 길고도 잔인한 대우였다. 살아생전 항상 근심에 젖어 있었고 삶에 즐거움이 없었으며 끝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마지막 순간까지도 얼마나 인생무상을 느꼈을까 싶다.

 

   그의 사후 주어진 황제 조예의 조서는 이렇게 그를 평가하고 있다.

 

과거 잘못이 있었지만 스스로를 통제하고 행동을 신중히 하며 그 잘못한 바를 잘 보완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과거 조식의 죄를 상주한 문건과 이를 논의한 서류를 모두 회수하여 폐기하고, 조식이 지은 글 100여 편을 정리하여 잘 간수토록 하라.

 

   이제야 인정해주나 싶은 만시지탄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죽은 이는 더 이상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증명해줄 뿐이라는 생각이다. 결코 살아있는 권력에는 함부로 저항해서는 안된다는, 권력의 특성상 단 한 번의 낙마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바로 조식의 인생이다. 자신의 천재성만 믿고 주위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한때의 잘못이 평생의 굴레가 되어 인생을 옥죄고 말았으니 진정 누구를 탓해야 할지 단정하기 어렵다. 인생이란 나 혼자서는 결코 풀지 못하는 그런 수학적 난제와도 같다.

 

   마지막으로 그가 생전에 남긴 솔직한 자신만의 생각을 담은 글 한 편을 읽어보자.

 

인간이 삶을 존중한다는 것은 편안한 생활과 함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천수를 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핵심은 하늘의 섭리대로 일이 이루어지게 함에 있습니다. 직위와 봉급이라는 것은 단순히 허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로와 실적에 대한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공로가 없는데 직위가 높고 실적이 부족한데 봉급이 많은 것은 영예로운 게 아니라 치욕적인 것입니다. 당연히 공로과 실적이 있어야지만 명성을 후대에 남길 수 있는 법입니다. 명성을 남긴다는 것이 곧 대장부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저는 간절히 맡은 바 할 일을 얻어 반드시 공적을 세우고 싶습니다. 제 생각이 비록 지금은 반영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세에라도 이러한 제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