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한 말과 궤변의 소유자

예형(禰衡, 173~198)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달변이었으며 의로움을 중시 여겼지만, 한편으로 꽤나 무례하고 잘난 체가 심했으며 관습을 무시하고 인간관계에 있어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오늘날 산둥성 서북방 출신이었는데, 조조와 여포가 격돌하였던 즈음에 20대 초반의 차이로 형주(荊州)로 피신을 떠났다가, 한두 해 지나 안정을 되찾자 조조가 헌제(獻帝)를 맞아들여 수도로 삼았던 허도(許都) 인근을 유람하게 되었다.
예형이 처음 허도를 둘러싸고 있는 영천군(潁川郡)에 왔을 때는 허도가 새로 세워지면서 온갖 사대부들이 사방에서 모여들던 와중이었다. 어떤 사람이 예형에게 물었다.
“왜 진군(陳群)이나 사마랑(司馬朗, 사마의의 형)을 찾아보지 않습니까?”
“내가 백정 자식을 만나 뭐하겠소!”
“순욱(荀彧)이나 조융(趙融)은 어떻습니까?”
“순욱은 문상(問喪) 정도 대신 보낼 만하고, 조융은 주방에서 손님 접대나 하면 되겠소.”
예형은 당대의 7대 문필가, 곧 건언칠자(建安七子) 중에서도 대표주자로 명성이 드높았던 공융(孔融), 그리고 박학다식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만큼 재치가 뛰어났던 양수(楊脩) 두 사람만 인정할 따름이었다.
“사내로는 공융과 양수뿐, 나머지는 하잘것 없는 무리라 말할 것도 없다.”
나중 일이지만 이 둘은 모두 조조에게 밉보여서 죽임을 당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어쨌든 공융도 마찬가지로 그런 예형의 재주를 아꼈다. 예형과 공융은 나이 차이가 무려 20년이나 났지만 서로 나이를 잊고 교류하였다. 공융이 젊은 천재 예형을 조조에게 인재로 추천하였다. 설명이 길기 때문에 축약해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재야의 선비인 예형은 나이 24세에 재능이 뛰어나고 가치관도 올바르며 특히나 영특합니다. 학문을 시작할 무렵 이미 경지에 다다를 정도였으며, 기억력이 특출나 한 번 보고들은 것은 곧바로 외워버립니다. 예형은 과감하고 충직하며 뜻한 바도 순수합니다. 선행은 따르고 악행은 증오하며, 행실이 바르고 지조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예형이 발탁된다면 틀림없이 상당한 성과를 보여줄 것입니다. 비상한 언변은 막힘이 없고 토론에서도 주장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관철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만약 예형같은 이가 정부에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분명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예형과 같은 인재는 쉽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
공융은 이렇듯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예형의 재능을 매우 아껴서 이처럼 조조에게 여러 차례 칭찬을 하였다. 드디어 관심을 가지게 된 조조가 예형을 만나보겠다고 하였는데, 문제는 예형이 평소에 조조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놓고 싫어하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방문을 거절하였고, 심지어 조조에 대한 선을 넘는 발언들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조조는 사실 화가 났지만 예형의 명성을 들은 게 있다보니 아직 죽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조조는 언뜻 듣기로 예형이 북을 잘 친다는 말에 그를 놀릴 겸하여 북 연주를 담당하는 고사(鼓史) 중 한 명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손님들을 초빙하여 고사들의 연주를 시켜보았다. 원래 고사들은 연주할 때 고사만의 복장을 입게 되어 있었는데, 예형의 순번이 되자 그는 평상복 그대로 곡을 연주하며 앞으로 나왔는데 그 표정이 진지하고 북 연주 또한 매우 능숙하여 좌중이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형이 연주를 마치고 조조 앞에 섰는데 이를 본 다른 고사가 예형에게 따지고 나섰다.
“당신은 왜 옷은 갈아입지도 않고 예의없이 앞으로 나선 것이오?”
그러자 예형이 대뜸 옳은 말이라고 대꾸하고는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던졌다. 그 다음 나체인 상태로 천천히 고사의 복장을 차려입고는 북을 치며 물러났는데,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이를 지켜본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예형을 웃움거리로 만들려고 하였던 것인데, 오히려 내가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구나.”
몰지각한 행동을 보인 그를 추천하여 체면을 구기게 된 공융이 예형을 쫓아가 따져물었다.
“그대는 군자이거늘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는가?”
그러면서 공융은 조조의 진심을 설명하였고, 예형은 알겠으니 자신이 찾아가서 사과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안심한 공융은 다시 조조를 만나보고는 예형이 병이 도져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그의 사과 의사를 전했다. 조조는 한 번 더 참아보기로 하고, 측근에게 손님이 오거든 보고하라고 한 후 한참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형은 예상과 달리 허술한 차림을 한 채 군영의 정문 앞에 앉아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측근이 들어와 이 황당한 일을 전했다.
“밖에 미친 사람이 와서 욕지거리를 하고 있는데 처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참고 있던 조조도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공융에게 말했다.
“예형같은 놈을 죽이는 건 어려운 게 아니지만, 그래봤자 이놈이 헛된 명성이 있어 기껏 주위에서 내가 참을성이 없다는 소리나 들을 테니, 그냥 이놈을 유표에게 보내버려야겠소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형을 말에 태워 보내도록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예형의 출발에 앞서 성 남쪽 길에 잔치상을 마련하고는 서로 약속을 하였다.
“예형은 버릇도 없고 무례한 녀석이니, 그가 지나갈 때 가만히 앉아서 그 콧대를 꺾어봅시다.”
얼마 후 예형이 그곳을 지나갈 무렵 다들 그를 무시한 채 아무도 일어나지 않자 이를 본 예형은 그 자리에 앉아 큰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왜 그런지 묻자 예형이 대답했다.
“무덤에 시체가 가득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듣는 이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데는 확실히 일가견이 있는 예형이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 조조의 차도살인(借刀殺人)임을 눈치챘을 형주의 유표(劉表)와 사대부들도 처음에 그토록 소문이 자자한 예형을 맞아들였을 때에는 그의 재주와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손님의 예로 극진히 대우하였고, 실제로 문장이나 토론에서 예형은 그들 사이에서 언제나 두각을 나타냈다. 한번은 유표가 휘하의 나름 능력 있다는 문인들을 동원해 공문서의 초안을 작성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예형이 외출했다가 돌아와서는 그 초안을 읽어보다 말고 그냥 찢어버렸다. 유표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는데, 다시 예형이 그대로 빈 종이에 일필휘지로 순식간에 문장을 작성하였고 그 자체로 완성도가 기존보다 훨씬 뛰어났다. 자신감 과잉의 한바탕 쇼였겠지만 어쨌거나 이때만큼은 최소한 예형의 능력은 확실히 유표를 사로잡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효과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당연히 예형의 그 잘난 독선적 성격 탓이었다. 계속해서 예형이 유표를 대놓고 무시하자 결국 유표는 참다참다 더 이상 체면을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형주 휘하의 강하태수(江夏太守) 황조(黃祖)에게 예형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조가 유표에게 골칫거리 예형의 처분을 떠넘겼듯이 똑같이 유표도 성격 급한 황조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킨 것이었다.
황조도 처음에는 다들 그러했듯이 예형을 잘 대우해주었다. 그는 예형을 서기(書記)에 임명하였는데, 왠일로 예형도 크고 작은 일이든 쉽고 어려운 일이든 모두 잘 처리해내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이에 황조는 예형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자네는 내 생각을 어찌 그리 잘 파악하는지, 마치 내 마음 속을 읽고 있는 것 같소.”
황조의 맏아들인 황역(黃射)은 장릉태수(章陵太守)로 있었는데 예형과 특히 친밀한 관계였다. 그전에 예형과 함께 유람하던 시절 채옹(蔡邕)이 지은 비문(碑文)을 함께 읽은 적이 있었는데, 황역은 그 글이 마음에 들었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서는 그때 필사해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에 예형이 말했다.
“제가 읽었던 내용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그 비문에 글자가 빠진 게 있어서 그것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비문 내용을 쭉 써내려갔는데, 나중에 황역이 사람을 보내 필사해온 것과 대조해보니 예형이 써준 그대로여서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확실히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황역은 그 무렵 손님을 초청하여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한번은 술잔을 들고 예형에게 제안을 했다.
“선생께서 멋진 시를 지어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시지요.”
예형은 붓을 잡고 시를 지었는데 문장에 글자 하나 보탤 필요도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는 평이었다.
황조도 많은 손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자리에서 예형의 언행이 너무 불손하여 황조는 창피하게 여기고는 예형을 질책하였다. 그러자 이미 눈이 돌아가버린 예형도 지지 않고 황조를 노려보며 화를 냈다.
“망할 늙은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순간 격노한 황조는 사졸에게 예형을 끌고나가 때리라고 시켰다. 하지만 이 정도로 기가 죽을 리 없었던 예형이 한참 욕을 퍼붓자 더욱 화가 치밀어오른 황조는 아예 예형을 죽여버리라고 소리질렀다. 그렇게 어이없게 예형은 일순간 목숨을 잃었다. 황조의 아들 황역이 뛰어와 예형을 구하려고 했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다음이었다. 그 순간 성격 급한 황조도 아차싶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예형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으로 이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때 예형의 나이 26세였고,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그의 글들은 이후 유실되어 전해지는 게 없다고 한다.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기행을 일삼고 자신의 높은 재능만큼 자존심 부리며 살아온 안하무인 인생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니 과연 누구를 탓하겠는가. 탁월한 기억력과 완성도 있는 문장을 만드는 능력은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수준이었음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또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예술가적 자질에 심지어 뛰어난 행정가적 능력까지 두루 갖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 빼어난 재능을 좋은 곳에 써서 사회에 일조할 수 있었다면 참 다행이었을 텐데, 스스로 높디높은 자긍심 하나를 위해 허공에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결과인가 싶다. 무능도 문제이겠지만 재능의 허비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예형은 타고난 자질을 공적으로 남기지 못하고 오히려 남들에게 악을 행할 기회만 제공한 셈이었다. 천재적 재능이 사회에 제대로 활용되지도 못한 채 의미 없이 묻혀버렸으니 그는 결국 독선적인 독설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고 말았다.
현대 사회에도 예형처럼 자신만 잘난 줄 아는 독설가들이 자칭 평론가라는 타이틀로 정치판과 언론계를 돌며 자기 몸값을 높이기 위해 대중들의 눈과 귀에 욕설에 버금가는 쓰레기를 투척하며 작약하고 있다. 그들보다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던 예형의 결말을 보며 다들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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