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출한 재능이 있었고 군사 전략에 밝았지만, 말보다 실제가 부풀려진 인물

어떤 인물이 사자성어 속 주인공이 되거나 혹은 보통명사화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주 드물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있긴 하다. 《삼국지》에 나오는 백미(白眉)라는 고사의 형제들이 바로 그 사례이다. 백미는 글자 그대로는 단순히 ‘흰 눈썹’이라는 뜻인데, 오늘날 사전적 정의는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로 쓰인다. 그 배경은 이렇다.
당시 양양군 의성현(宜城縣)에서는 마(馬)씨 집안의 다섯 형제가 재능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는데, 그 중에서도 눈썹에 흰 털이 나 있던 마량(馬良, Mǎ Liáng, 187~222)이 제일이라고 해서 흔히들 ‘백미’가 바로 그 중 가장 낫다고 하는 표현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당대의 명성 그대로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였을 때 발탁되어 종사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유비가 방통을 이끌고 유장의 촉을 정복하던 시기인 213년경 제갈량도 뒤늦게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때 마량은 본거지격인 형주에 남아 있었다. 마량과 제갈량은 여섯 살 터울로 의형제를 맺은 관계였기에, 자연스럽게 마량은 제갈량을 사적으로는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비는 촉 정복 후 그를 자신의 속관으로 발령내었는데, 아마도 제갈량 휘하로 배속시켰던 것 같다.
나중에 마량은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는데, 그때 그가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서술한 글이 남아 있다.
“재능이 뛰어난 지역의 유명 인사로서,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일관성이 있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한참 후인 221년 유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던 당시 제갈량은 승상(丞相)이 되었고 마량도 마찬가지로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였다. 여기까지는 일개 지방 출신으로서 당대 최고의 인재였던 제갈량을 따르며 안정적으로 성공 루트를 잘 밟아가고 있던 셈이었는데, 그의 인생이 무너지게 된 계기는 그 자신이 아닌 최고 권력자인 유비였다.
황제 유비가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관우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던 221년의 늦여름 장비 또한 불운하게 측근에게 살해당하게 되고 겨우 가을 7월에 오나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던 때였다. 마량은 무릉군 오계의 이민족인 만이(蠻夷)를 우군으로 포섭하는 역할로 파견되었는데, 처음에는 성공한 듯하였으나 해가 지나 유비가 이릉에서 대패하자 본색을 드러낸 만이에게 마량은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에 살해당하고 만다. 안타깝게도 백미라는 명칭만 세상에 남긴 채 그는 최고 권력자의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불운하게 운명을 다한 것이었다.
당대에는 다섯 형제 중 이런 마량이 가장 유명하였으나, 사실 《삼국지》를 통해 가장 유명해진 인물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세 살 터울의 동생 마속(馬謖, Mǎ Sù, 190~228)이었다. 형처럼 마속도 형주에서부터 유비를 따랐고 촉군으로 이동한 이래 현령과 군 태수를 거쳐 지속적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범인들을 뛰어넘는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군사 전략을 논하기를 좋아하였기에, 원래 똑똑한 이를 좋아하였던 승상 제갈량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제갈량의 참군이 되어 전략 논의의 맞상대가 되어주었는데, 툭하면 낮부터 토론을 시작하면 한밤중까지 이야기가 계속되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 일화가 한 가지 남아 있다.
225년 봄 제갈량이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로 유명한 남정에 나섰던 때의 일이다. 그 전부터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온 남만 세력에 대해 유비 사후 2년 간 철저한 준비를 거쳐 제갈량은 정복전에 나섰던 것인데, 마속은 그를 전송하면서 자신의 계획을 제갈량에게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남쪽은 험난하고 거리가 먼 것에 의지하여 오랫동안 복속되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번에 저들에게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조만간 또 다시 반기를 들기 쉽상입니다. 공께서는 앞으로 국력을 총동원한 북벌을 계획하고 계신데, 만약 저들이 그 사이 우리나라 내부에 방어력 공백이 생기는 걸 알게 된다면 심각한 국방 이슈가 생길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고 혹여 이 기회에 저들을 모조리 다 섬멸하여 훗날 문제의 근원을 제거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불가능한 목표입니다. 용병(用兵)이란 모름지기 힘으로 무릎을 꿇리는 것이 하책이요, 마음을 굽히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공께서는 이번 기회에 그들의 마음을 굽히게 하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애독해온 마속다운 제안이었고, 실제로 이는 제갈량의 생각과도 일치하였기에 이 둘의 사이는 좋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갈량은 마속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처음 그의 군대는 남중에 이르기까지 계속 싸워 이겼는데, 단순히 무력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전략이 아니었다. 싸움의 초기에 기선제압을 하는 것이 목표였을 뿐, 제갈량은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당시 이 지역의 실질적 리더 역할을 하던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다음 그를 죽이는 대신 자신의 진영을 일부러 보여주었다.
“우리 군이 어떠한 것 같소?”
“전에는 허실을 몰랐기 때문에 졌지만, 이제 진영을 돌아보니 다음 번에는 분명 쉽게 이길 수 있겠소이다.”
이 말을 듣고도 제갈량은 맹획을 풀어주었고, 소설 속에서 거의 신화적인 내용으로 꾸며진 스토리의 근간이 된 것처럼 일곱 번의 전투를 거치며 맹획을 계속 사로잡았다. 이에 마음 속으로 승복하게 된 맹획이 이와 같이 선언을 하게 된다.
“우리 남인(南人)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남중이 평정되자 제갈량은 현지인들을 기용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일종의 현지화 전략이었다. 다음은 이에 대한 그의 실제 발언이다.
“만일 외부인으로 통치를 하게 한다면 동시에 병력을 주둔시켜야 하고, 그 비용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문제이오. 이번에 현지인들 중에는 전쟁을 통해 가족을 잃을 이가 많은데, 외부인이 부족한 병력으로 주둔한다면 온갖 재난이 발생할 테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오. 또한 과거에 현지인들은 관리들을 내쫓고 죽이는 등 수많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거듭해 왔기에, 만일 상황을 모르는 외부인이 주둔하여 통치를 한다고 했을 때 사회적 신뢰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세 번째 걱정하는 바이오. 나는 이번에 물리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 식량의 강탈도 없이, 이곳 사회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정착시킴으로써 현지인과 외부인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오.”
제갈량은 이렇게 해서 불과 두 계절만에 성공적으로 개선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남만은 그의 생애 동안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 성과로 제갈량은 남만으로부터의 보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이후 대규모 북진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마속의 탁월한 관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질 정도이다.

그리고 드디어 228년 제갈량의 오랜 숙원인 북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제갈량의 곁에는 경험 많은 조운, 위연 등 유명한 장군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는 대다수의 예상을 깨고 마속을 선봉장으로 선택하였다. 마속은 행정가 내지 참모로서의 역할은 꾸준히 해왔었지만 실제로 한 부대를 이끌고 실전에 나선 바는 없었기에 당연히 이는 의외의 결정으로 여겨졌다.
처음 제갈량이 야곡도(斜谷道)로 진격을 개시했고, 조운과 등지를 파견해 기곡(箕谷)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제갈량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략하자 위나라의 남안군, 안정군, 천수군이 그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등 그 파급력 때문에 관중 지역 전체가 진동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곧 고대 중국의 오랜 수도 장안(長安, 오늘날 중국의 시안(西安) 시)이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니 위나라 입장에서는 공포로 떨 만도 했다. 그 꼼꼼한 성격의 제갈량이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만큼 초기의 기세는 상상초월이었다. 그래서 위나라에서는 급히 대장군 조진(曹眞, Cáo Zhēn)을 방어군으로 투입하였고, 동시에 우장군 장합(張郃, Zhāng Hé)을 파병해 제갈량의 선봉을 저지하게 하였다.
이때 마속은 휘하에 왕평(王平)과 함께 선봉부대를 이끌고 진군하고 있었는데, 책에 기반한 지식은 충분하였으나 실전 경험이 일천하였던 그는 그 과정 중에 왕평과 의견 충돌을 겪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마속이 가정(街亭, Jiētíng)에 도착하여 남산(南山)을 점거하고 산 위에 진을 구축하겠고 주장하자 왕평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던 부분이었다. 현장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하긴 했어도 군에서의 상관은 마속이었고 결국 그의 뜻대로 결정되었다. 과거 노련한 조조 밑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해본 경험이 있었던 왕평 입장에서는 이런 비체계적인 지휘 방식에 대해 토를 달아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위나라의 장합은 과거 중원의 운명을 뒤바꾼 관도대전을 직접 경험해본 데다가 다름 아닌 조조의 눈에 들 정도의 백전노장이었기에 그에 비해서 전투에 미숙하기 그지없었던 마속을 대응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마속이 산에 의지해 수성전으로 대응해 나온 것을 보고는 공성 자체는 힘들겠다고 판단한 다음, 역으로 수로를 끊어버리고 마속의 보급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가정을 공략하였다.
결과는 마속의 참패였다. 마속 휘하의 병사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와중에 그나마 왕평이 직속 1천 명을 규합하여 굳건히 방어에 나서자, 그 장합조차도 혹여나 복병이 있을까 싶어 과감히 공세에 나서지는 않았던 점이 주효했다. 그나마 용병에 능했던 왕평이 현장에 있었기에 패잔병들을 이끌고 안정적으로 회군할 수 있었다.
선봉전의 패전의 타격은 제갈량군 전체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잘 하면 첫 번째에 북벌을 성공시킬 수도 있었던 제갈량은 이 가정 전투의 패배가 결정타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얻었던 지역들을 모조리 다시 내어준 채 회군하여 한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의 북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패장이 된 마속은 승상 제갈량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서른아홉의 나이에 처형당했다. 직접 이 결정을 내린 제갈량은 인간적인 눈물을 흘렸다. 바로 이렇게 그 유명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가 만들어졌다. 이때 마속이 마지막으로 제갈량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아직까지 전해진다.
“공께서는 저를 자식처럼 돌보아주셨고 저도 공을 아버지처럼 따랐으니, 이제 다시 되새겨보면 깊은 우의의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평생의 교분이 여기서 결코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저는 그럼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어본 다른 이들도 모두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한계는 이미 유비가 생전에 제갈량에게 지적한 바가 있었다.
“마속은 하는 말이 실제보다 과장된 인물이니 조심하도록 하시오.”
한때 그 형 및 다른 형제들과 함께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또 기대를 한몸에 모았던 이의 말로 치고는 비참한 결과였지만, 결국 용인(用人)의 책임은 그 상관에게 있는 법이다. 그래서 마속이라는 개인의 한계를 꿰뚫어본 유비만큼의 사람 보는 눈을 가지지 못했던 제갈량의 잘못이 여기서는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참모형 인재와 리더급 인재는 필요로 하는 재능이 일정 부분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제갈량은 간과했다. 참모는 비유컨대 두뇌의 역할이니 전략과 계획에 대한 충실한 제안이 중요하겠으나, 지휘관의 경우엔 실행과 추진의 역할이 일순위이기에 현장에 대한 감각과 실질적인 임무수행 능력을 제일 필요로 한다. 마속은 전자의 측면에서는 충분했을 지 몰라도 후자에 있어서는 경험 미숙과 구체적인 방법론이 체득화되어 있지 못하여 실패를 겪고 말았다. 그래도 현장 경험이 풍부했던 왕평을 부대에 배속시켜주었지만 그런 인물을 잘 다룰 줄 몰랐던 것은 마속 개인의 자질 문제이다. 그런 인물을 군 지휘관으로 임명한 것은 총사령관이었던 제갈량의 한계이고 말이다.
결국 언제나 모든 일에서 문제는 사람으로 귀결된다. 그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냉철한 눈과 장점과 단점을 구분해 장점을 살려 활용할 줄 아는 용인의 능력이 최종 리더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어려서부터 주목받아온 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충반했던 마속과 그리고 상대방의 똑똑함에만 주목하여 실제 실행 단계에서의 구체적인 능력은 검증 없이 간과해버린 제갈량은 그런 측면에서 어쩔 수 없이 둘 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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