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큰 인물이었으나, 다만 임기응변의 지략이 부족하였다.

삼국지 최고의 천재를 꼽는다면 누구나 다들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는 사실 소설 《삼국지연의》의 탓이 크다. 역사적 인물이 아닌 소설 속 캐릭터로서의 제갈량은 기묘한 책략과 온갖 술수까지 다를 줄 아는 만능의 귀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묘사의 수준이 오늘날 합리성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면 너무도 심하게 과장되어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오죽하였으면 우리보다 훨씬 앞 세대인 조선시대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도 《삼국지연의》를 읽다가 칠종칠금과 축융부인의 일화를 보고는 너무 허황되어 책을 던져버렸었다고 하였을까. 물론 《삼국지연의》 자체가 선과 악에 대한 인위적인 구분과 역사의 정통을 바로잡겠다는 목적성이 뚜렷하고, 이를 위해 의도적으로 주연과 악역을 양극단으로 묘사하게 된 점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적 위인으로서의 제갈량의 실체를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골수팬들로부터 지나치게 추앙받는 것도 문제겠지만, 한편으로 합리주의자들에게 부당하게 매도당하는 일도 없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럼 이제부터 역사에 기록된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정확히 그의 진솔한 모습을 찾아나가보도록 하겠다.
그가 속한 제갈(諸葛) 가문은 그 시대에 특출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도 조상 대대로 한나라 조정에서 근무한 전통 있는 가문이기도 했지만, 삼국지 시대에는 특히나 똑똑한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여 중원 각지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 역시 한나라의 관직을 받은 인물이었고, 작은아버지 제갈현(諸葛玄)도 원술과 유표를 거쳐 지방장관을 역임한 바 있었다. 제갈량이야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나중에 촉나라의 최고위직에 오르게 되고, 형 제갈근(諸葛謹, 174~241)은 오나라에서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며, 동생 제갈균(諸葛均)도 마찬가지로 제갈량을 따라 촉나라에서 중용되는 인물이다.
제갈량에게는 제갈첨(諸葛瞻, 227~263)이라는 총명한 아들이 있었고, 형 제갈근에게도 제갈각(諸葛恪, 203~253), 제갈교(諸葛喬, 204~228)같은 똑똑하기로 유명한 아들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제갈탄(諸葛誕, ?~258)이 대국 위나라에서 고위직에 있었다. 집안 자체가 머리 좋고 능력을 인정받는 그런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젊은 시절의 제갈량은 작은아버지를 따라 고향이었던 산동반도를 떠나 돌고돌아 훗날의 촉나라와 오나라의 경계가 되는 형주(荊州)에 정착하였다.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명인사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인 서서(徐庶)가 때마침 가까운 곳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劉備, Liú Bèi, 161~223)를 알게 되면서 그의 소개로 두 사람의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를 소설적 묘사로 잘 풀어낸 것이 바로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이다. 상상력을 걷어내고 그 과정을 기술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이 당시 유비는 서서를 처음 접하고는 그를 자신에게 필요한 인재로 여겼는데, 서서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두 사람이 있는데, 곧 와룡(臥龍)과 봉추(鳳雛)로 불리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두 인물 중 와룡이 바로 제갈량이라고 하자, 유비가 그를 자신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서서의 대답은 유비의 기대와는 달랐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어도 강제로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직접 찾아가보셔야 됩니다.”
물론 유비도 이 무렵 잘 나가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물리적인 힘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기꺼이 서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 번이나 찾아가 겨우 제갈량을 만나볼 수 있었다. 유비가 한나라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그에게 지혜를 묻자,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였다.
“조조는 가장 강력한 군사력과 황제라는 명분을 거머쥐고 있어 당장 다툴 수는 없고, 손권은 강동(江東)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기에 경쟁이 아닌 협력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곳 형주와 서쪽의 익주(益州)를 기반으로 우선 세력을 키운 다음, 형세의 변화를 보아 향후 중원을 공략한다면 패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것이 곧 융중대(隆中對) 혹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불리는 제갈량의 대전략이었다. 그간 제대로 전략을 담당하는 브레인 없이 인간적 관계에 기반하여 무장들 위주로 근근히 세력을 이끌어오던 유비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길을 정확히 보여준 제갈량의 폭넓은 혜안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제갈량의 나이가 27세였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젊은 축에 속하겠지만 사실 그 당시 기준에는 이미 사회에 진출하여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어도 시원찮을 나이였다. 따라서 놀라운 점은 그의 젊은 나이가 아니라, 형주의 구석진 곳에서 근근히 지내던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난세의 현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결코 당장의 이익에 휘둘리지 않은 채 장기적인 안목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해답을 제시할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이후 유비는 스무 살 연하의 제갈량과 함께 어울리며 감싸고 돌았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관우와 장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득을 시켰다.
“나에게 공명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유비의 곁을 빼앗긴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이 이 정도임을 알게 되자 그 둘도 더 이상 대놓고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이 당시 유비의 세력은 형주의 유표(劉表)와 협력 관계에 있었는데, 마침 그의 집안은 전처와 후처의 자식들간의 후계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었다. 하루는 전처의 아들인 유기(劉琦, Liú Qí)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던 와중에 제갈량에게 자신이 어찌 해야 할지 지혜를 물은 적이 있었다. 제갈량은 내심 이와 같은 권력 암투에는 끼고 싶지 않았었으나 유기가 너무도 간절하였기에 옛 사례를 바탕으로 꾀를 내어주었다.
“나라 안에 있으면 위험에 처할 테고, 나라 밖에 있으면 오히려 안전한 법입니다.”
이 말을 새겨들은 유기는 마침 전임자의 사망으로 자리가 비어 있던 강하태수로 나가게 된 덕분에 정적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유표 사후에 어린 동생 유종(劉琮)이 정권을 이었고 그때 조조가 남침해오자 두려움에 아예 형주 통째로 투항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시작이다.

이 소식에 급히 유비는 제갈량, 서서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떠나야 했다. 이때 제갈량은 유종을 쳐서 형주를 차지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아직까지는 현인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었던 유비의 반대로 실제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유비는 조조의 추격군에게 패하고 말았고 서서의 어머니가 포로로 붙잡히자 효자였던 서서는 어쩔 수 없이 유비 곁을 떠나 조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유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브레인은 제갈량 한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제갈량은 융중대의 전략을 떠올렸다.
“사태가 위급하니 손권에게 지원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이때 손권(孫權, Sūn Quán)도 군대를 소집하긴 하였으나 적극적 개입은 하지 않은 채 작금의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유표의 세력이 조조에게 항복한 마당에 과연 조조의 대군을 상대로 과연 자신이 항전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지, 여차하면 자신도 항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온갖 경우의 수를 면밀히 검토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외교는 겉보기에는 대의명분이 지배하는 듯해도 실제로는 냉정하게 이해득실이 핵심일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그런 그를 설득하겠다고 나선 것이 제갈량이었다.
“조조는 그간의 혼란을 평정하고 이번에 형주마저 공략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장군께서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이 사태를 관망하시기보다는 이제는 투항하든지 적극 항전하든지 결단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유비는 어찌하여 조조에게 투항하지 않고 있소?”
“황실의 후예이신 분께서 어찌 조조의 신하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갈량의 탁월한 언변과 논리적 흐름을 보면 확실히 그의 두뇌회전이 얼마나 뛰어난 지 자연히 알 수 있다. 그렇게 자신보다 세력이 적은 유비와 순식간에 비교가 되어버린 손권은 제갈량의 도발에 곧바로 응수하였다.
“나 또한 우리 국토와 10만의 대군을 내놓을 생각이 없소. 내 뜻은 이제 결정되었소!”
이에 제갈량은 곧바로 미리 생각해둔 대응방안까지 제안하며 전략을 논의하였다. 유비 휘하의 군사와 강하태수 유기의 군사를 합치면 2만이 넘으니 오나라의 군과 합치면 병력 측면에서 조조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고, 상대방은 원정을 온 것이어서 체력이 떨어져 있고 수전(水戰)에 약한데다가 형주의 군사들도 모두가 다 아직 마음으로 복종하고 있지는 않기에 분명 침공군의 사기가 좋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파악한 것 치고는 확실히 냉철한 분석이었다. 손권 역시 그런 제갈량의 의견을 받아들여 수군 3만 명을 지원하였고, 결과적으로 조조를 적벽(赤壁)에서 격파하여 패퇴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여덟, 208년의 일이었다.
이때 손권측에서는 제갈량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영입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 자신이 그 제안을 받지는 않았다. 자신을 알아봐준 일은 감사한 일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점이 그 사유였다. 이를 거꾸로 해석해보자면, 큰 조직보다는 그보다 작은 조직에 있을 때가 좀 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개인적 판단이 있었다는 뜻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용의 허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는 편이 낫다는, 그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겠다.
그렇게 유비는 본거지를 되찾게 되었고, 제갈량 또한 군사중랑장이 되어 세 군을 관할하면서 보급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시간이 흘러 211년, 이제 그의 나이가 30대에 접어든 그때에 융중대 전략의 또 다른 한 꼭지가 현실화되었다. 즉 형주 옆 익주를 차지하여 세력을 확장한다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익주목으로 있던 유장(劉璋)은 북쪽의 한중 지역을 지배하던 장로(張魯)와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마침 가까이 있던 유비의 세력을 활용해 장로를 치고자 하는 꾀를 내었다. 하지만 이는 그에게는 최악의 한 수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기회를 활용해 유비는 유장을 몰아내고 익주 자체를 집어삼키는 모략을 추진하게 되기 때문이다.
와룡 제갈량은 관우와 함께 형주에 남아 있었고, 이번에는 봉추 방통(龐統)이 익주 침공의 브레인으로 나섰다가 도중에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에 제갈량은 관우만 형주에 남겨둔 채 장비, 조운 등과 같이 유비를 지원하기 위해 진군하였고, 여러 군현을 평정하면서 1년에 걸쳐 유비와 함께 성도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214년 여름의 일이다. 이제 제갈량은 군사장군으로 승진하여 좌장군 유비의 보좌역을 맡게 되었다. 이후 유비가 출정할 때면 늘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 군수품 보급을 담당하였다.
세월이 흘러 221년,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뜬소문이 돌던 무렵에 촉나라의 유비에게 그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달라는 신하들의 요청이 이어졌다. 유비가 거듭 거절하자 나서서 그를 설득한 이가 바로 제갈량이었다.
“조조가 한나라 조정을 찬탈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왕께서는 황실의 후예이시므로 이번 기회에 황제 자리에 오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그들도 각자 자신의 주인을 찾아 떠나 결국 남는 이가 없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유비는 여름 4월에 마지못해 황제로 등극하였고, 제갈량 역시 최고위직인 승상이 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오나라와의 억지스러운 전쟁을 벌이는 등 온갖 우여곡절이 이어진 끝에 223년 봄 3월 어느덧 63세가 된 유비에게도 생의 마지막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승상 제갈량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자네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는 되니 분명 국정을 잘 다스리고 대사를 이뤄낼 것이네. 만일 내 후계자가 보았을 때 재능이 있다 싶으면 잘 보좌해주고, 그렇지 않다면 자네가 직접 맡아주겠나.”
이에 제갈량은 울면서 답하였다.
“제 온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유비는 별도로 후계자인 유선(劉禅, 207~271, 재위 223~263)에게 승상 제갈량을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그의 말을 잘 들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때의 에피소드를 두고 의견들이 많이 있는데, 유비가 실제로 제갈량에게 황제 자리를 제안했다는 설부터 그의 역심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안전장치라는 설까지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물론 우리는 유비의 본심을 알 길은 없으나, 최소한 제갈량이 유비에게는 신뢰의 대상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그가 자신의 사후에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여겼는지만큼은 이 일화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제갈량은 제2대 황제 유선의 치세에서 사실상 전권을 차지하였다. 작위로 무향후(武鄕侯)를 받았고, 곧이어 익주목이 되어 모든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외교 또한 그의 역할이었는데, 자신의 융중대 전략에 따라 오나라와는 화친을 맺어 전략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내치, 외교에 이어 국방의 임무가 새로 주어졌다. 그간 유비 본인과 오랜 측근들에 의해 군사적인 일은 굳이 제갈량에게까지 내려올 일이 없었는데, 드디어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직접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셈이었다. 그의 경력에서 전략가와 행정가에 이어 군사전문가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렇게 225년 봄 3월 제갈량은 남정(南征)에 착수하였다. 2년 전부터 이미 남쪽 국경지대의 현지인들의 저항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는데,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의 내정이 안정되었다고 판단되자 드디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당시 통칭해서 남중(南中)이라고 불렀던 이 지역은 촉나라의 간섭과 개입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세력화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갈량은 이러한 현지 분위기까지 감안하여 정복 이후의 정책까지 준비해두었다. 우선 이곳의 유력자였던 맹획(孟獲)을 일곱 번의 전투로 압도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상대방에게 힘의 우위를 각인시켜 완전히 저항의지를 꺾어버리는 것이 첫 번째, 심리적 저항이 불가피하고 고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군대를 통한 직접 통치가 아닌 현지인의 관리 등용을 통한 간접지배 전략으로 자연스레 촉나라의 지배를 따르도록 만드는 행정제도의 마련이 두 번째였다. 다행히 그가 구상한 대로 남중 지역은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고 이후에도 촉나라게 반발하는 일 없이 중요한 보급처가 되어주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신격화를 위해 이 사건이 길게 인용되고 있지만 사실 반년 남짓밖에 걸리지 않은 원정이었기에, 대규모 총력전의 컨셉도 아니었고 그가 기획한 일생일대의 승부수였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처음 군권을 오롯이 쥐고 자신의 생각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투를 이끌어보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전 연습과 같은 성격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제갈량이 그린 전략의 구도에서 동쪽으로 오나라와 힘을 합쳐 북방의 강국 위나라를 제압하기 위해 사전에 남부 국경지대를 안정화시키고 또 후방의 보급기지화함으로써 실리를 얻었다는 측면에서 그의 큰 그림이 잘 느껴지는 사례이다.
제갈량은 남정 성공 후 2년만에 드디어 그가 오래 꿈꿔온 마지막 전략적 퍼즐인 북벌(北伐)을 본격 추진하게 된다. 이때 그가 유선에게 올린 글이 바로 출사표(出師表)라는 글이다. 약 1년 동안의 꼼꼼한 준비 끝에 228년 봄 제갈량은 한중을 출발하여 야곡도를 통과해 미현을 공격하였고, 조운과 등지에게는 기곡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위나라에서는 대장군 조진(曹眞)이 총지휘관으로 나섰다.
제갈량은 기산을 공격하고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을 차지하였다. 그 여파로 관중 지역이 진동하였다는 말이 돌았다. 위나라의 제2대 황제 조예(曹叡, 205~239, 재위 226~239)도 깜짝 놀라 급히 당대의 명장인 장합(張郃)을 추가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신임하였던 마속(馬謖)의 선봉군이 가정(街亭) 전투에서 노련한 장합에게 대패하는 바람에 초반 기세가 꺾이고 만 것이다. 애써 치밀하게 세웠던 전략이 이렇게 크게 어그러져버리자, 제갈량은 더 이상의 진군을 포기하고 한중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탄생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제갈량은 스스로 승상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를 대체할 인물이 없었던 황제 유선은 그를 우장군으로 강등은 하되 승상의 업무를 대행하도록 조치하였으니, 명목상으로는 책임을 물은 것처럼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북벌 이전의 상황과 사실상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같은 해 겨울에 제갈량은 2차 북벌을 추진하였으나 위나라의 학소(郝昭)의 철벽수비에 막혀 결국 군량이 떨어져 또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왕쌍(王双)의 추격군을 대파한 것으로 기분이 조금은 풀렸을 지 모르겠다.
해가 바뀌어 229년 봄에 제갈량은 위나라의 옹주자사 곽회(郭淮)를 무찌르고 무도군(武都郡, Wǔdū)과 음평군(陰平郡, Yīnpíng) 두 곳을 차지하였다. 이 공로로 다시 승상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230년 가을, 이번에는 위나라측에서 반격에 나섰다. 곧 사마의, 장합, 조진 등 당대 1급 인사들을 파병하여 한중을 공략하는 작전이 추진되었다. 제갈량이 직접 이에 대한 방비에 나섰지만 때마침 폭우로 길이 끊기는 바람에 위군이 퇴각하여 다행히 큰 위협은 받지 않았다.
231년 봄 2월에 제갈량은 역공에 나서 재차 기산으로 출격하였는데, 이때 새롭게 고안한 목우(木牛)를 전장에 도입해 군수품 보급에 활용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군량 부족으로 부득이 철군을 하였는데, 이때는 앞서 1차 북벌 당시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장합을 전사시킴으로써 그때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다음 해인 232년에 제갈량은 목우에 이어 유마(流馬)까지 개발하여 보급을 한 차례 더 혁신하였다. 매번 군량 수송이 끝내 자신의 발목을 잡았었기에 이제는 아예 장기적 안목에서 보급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나선 것이다. 후방에 농경을 활성화시키고 동시에 병사들을 훈련시키면서 다음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233년 겨울 그간 준비된 군량을 야곡의 입구에 모아두고 군창(軍倉)을 조성하였다. 얼마나 그가 보급에 중점을 두었는지 느껴진다.

234년 봄 2월 제갈량은 또 다시 야곡에서 출병하여 오장원(五丈原)에 주둔하였는데, 유마를 활용해 전장으로 군량을 수송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대를 주둔시킨 곳에서 둔전(屯田)을 통해 군량 공급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체제를 이 기회에 마련하였다. 둔전을 담당하는 병사들은 지역민과 공존하게 되었는데, 이들 입장에서도 가까이에 군이 주둔하고 있으니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측면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군이 이들의 생업에 간섭하지 않도록 하였기에 딱히 생활 속에서 부담스러울 일도 없었다.
그렇게 위나라군과 대치한 지 100여 일만인 8월의 어느 가을 날 제갈량은 갑작스럽게도 진중에서 생명이 다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는 이때 54세였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려두었던 전략대로 착실히 북벌을 추진하던 와중이었으니 그로서도 참으로 허무한 느낌이 들지 않았었을까 싶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큰 꿈을 꾸고 사회에 나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 그 하나에 베팅을 하고 당시 보잘것없던 유비를 따라 나서서는, 끝내 국가를 건설하고 심지어 최고위직에 올라 본인이 뜻한 바대로 한 국가를 운영해본 이의 인생에 있어서는 결코 짧은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촉나라군이 퇴각한 이후 제갈량의 병영을 직접 살펴본 두 살 터울의 사마의(司馬懿, 179~251)는 그를 이렇게 평하였다.
“천하의 기재(奇才)로구나!”
제갈량은 본인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유언으로 자신을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간소하게 묻어달라고 당부하였다.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면 충분하고, 염할 때도 평소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해주면 되며, 제사 용품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평상시에도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비해서 검소한 편이었던 모양이다. 가진 재산은 8백 그루의 나무와 토지 약 15헥타르가 있었는데, 자손을 위해 남겨줄 유산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고 한다. 옷과 음식은 어차피 정부의 지급품으로 생활하면 되니 별도로 재산을 형성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의 묘사를 떠나,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가 타고나길 총명하였던 것은 이론이 없고, 연발식 쇠뇌나 목우, 유마와 같은 발명도 직접 하였던 것을 보면 꽤 창의성도 갖추고 있었으며, 직접 팔진도(八陣圖)와 같이 병법을 정리한 사례를 보면 이론부터 실행까지 모두 가능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제갈량문집》에 정리된 그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바쁜 와중에도 수없이 많은 글을 쓰고 매번 온갖 생각들을 정리해두는 그 꼼꼼한 성격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 233~297)의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들어보자.
“제갈량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능과 영웅적인 모습을 지녔기에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인물로 여겼다. …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뛰어난 인재였다.”
“제갈량은 군 조직을 다루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장에서의 역동적인 재능은 부족했으며, 군사를 지휘하는 역량이 국정을 운영하는 능력만 못 했다.”
그러면서 그의 부족한 점을 메꿔줄 수 있는 뛰어난 장군이 없었기에 그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진수는 제갈량의 사망 전해에 태어났으니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많은 고향 인물들을 통해 제갈량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만큼 진수의 평가는 사실상 동시대의 평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역사적 인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현대 일본에서 소설 《삼국지》를 정착시킨 대표적인 인사인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1892~1962)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
“사마의는 공명을 ‘천하의 기재’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위대한 보통 사람’이라고 칭송하고 싶다. 공명만큼 정직한 사람은 적다. 성실하고 정직했다. 공자나 맹자같은 성현처럼 원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언행이 기발하고 쾌활한 사내도 아니었다. 그 평범함이 세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함과 달리 몹시 위대했다.”
역시나 문필가스러운 멋드러진 묘사이다. 나 역시 이에 동감한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제갈량문집》을 보면 그의 성격이 거의 드러난다. 그렇게 창의적이지는 않으면서, 참 성실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글들이 그의 작품이다. 다만 약간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겨울에 눈 내리고 장마철에 비 내리는 내용의 글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솔직히 군사적인 측면만 떼어서 놓고 본다면, 전쟁과 전략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글솜씨 등 수많은 장점으로 칭송할 수 있는 저서인 《손자병법》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평이한 내용들의 나열이다. 심지어 두 저작의 집필 시기까지 고려하여 저울질한다면 솔직히 제갈량의 완패이다.
그의 저서 중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인 『장원』에 따르면 “필승의 비결은 바로 상대방이 방심한 틈을 타서 허를 찌르는 것이다. (중략) 적을 상대할 때에는 미처 대비하지 못하도록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은 승리의 방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위연이 급습을 제안한 자오곡 루트는 왜 거절하였는가? 심지어 나중에 이를 전해 들은 사마의도 솔직히 인정한 위나라 방비의 허점이었던 곳을 말이다.
뿐만 아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군대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라고 본인 스스로 적었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끊임없이 위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을 일으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편의십육책』에서는 심지어 “전투를 벌일 때에는 유리한 지형을 점거한 뒤 안전한 곳에서 위험한 곳에 있는 적을 습격해야 한다”면서 “산악이나 구릉지대에서의 전투 시에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향해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정확히 마속을 목 베면서 스스로의 모순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삼국지연의》 속의 가상의 모습과 《삼국지》 속 실제의 모습이 무척이나 다른 캐릭터이다. 소설 주인공처럼 천재적인 모습과 동시에 역사적 위인로서의 착실하고 충직한 모습이 동시에 존재한다. 어쩔 때 보면 발명가와 같이 창의성이 번뜩일 때가 있고, 또 잘 들여다보면 작은 일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는 지극히 모범생적인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가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에 대해 갖는 인상 혹은 기대하는 모습과 실제 현실과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그저 하나일 뿐인데, 각자 서로 다른 인물을 기대하고 있으니 당연히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리라.
끝으로, 진수가 《제갈량문집》을 정리하면서 쓴 논평으로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글로서 평가하는 데에 능한 모양이니까. 다시 얘기하지만,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진리이다.
“누군가는 제갈량의 글이 화려함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또 너무 자세한 게 흠이라고 평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중략) 그 대상이 보통은 일반 대중이었기에 더 깊이 있게 다루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공적으로 남긴 문서들은 모두 그가 직접 경험했던 사실 및 실제 처리했던 일들의 결과물입니다. 문장 중에 그의 공정하고 성실한 태도가 자연히 묻어나는 것을 보면, 제갈량이란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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