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는 천재, 그러나 커서는…?

제갈각(諸葛恪, 203~253)은 그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인재들이 활약했던 삼국지의 시대에서도 총명하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제갈씨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기도위로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는데, 출세도 빨라서 221년에 오나라의 손권이 맏아들 손등(孫登, 209~241)을 왕태자로 삼을 당시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를 수행토록 하였을 때 그 중 한 명으로 뽑힌 이가 바로 제갈각이었다. 둘의 나이 차는 불과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같이 마차를 타기도 하고 침대에서 함께 잠들기도 하는 등 무척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229년에 손권이 황제로 등극할 때에 손등이 다시 황태자가 되었고, 이때에도 그를 보좌하는 핵심 4인방 중 한 명이 곧 제갈각이었다.
그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온갖 주목을 받는 빛나는 존재였다. 당대에 이미 사회적으로 명성이 대단했고, 손권 또한 그를 매우 뛰어난 인재로 아낄 정도였다.
제갈각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 당시의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어느 날 손권이 많은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 당나귀 한 마리를 데려오고는, 그 당나귀의 얼굴에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쓰게 하였다. 자유(子瑜)는 제갈각의 아버지이자 그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의 형인 제갈근(諸葛瑾, 174~241)의 자(字)였으니, 그의 얼굴이 당나귀처럼 긴 것을 보고 손권이 나름 장난을 친 것이었다.
하지만 자기 아버지를 놀림거리로 삼은 것을 본 어린 제갈각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당당하게 손권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제가 두 글자를 더 써도 되겠습니까?”
손권은 이 어린 소년의 자칫 당돌해 보일 수도 있는 요청을 허락해주었고, 제갈각은 그 네 글자 다음에 ‘지려(之驢)’를 덧붙였다. 그렇게 하자 그 당나귀를 제갈근이라고 놀린 말뜻이 바로 이렇게 바뀌게 되었다.
제갈자유의 당나귀(諸葛子瑜之驢)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마찬가지로 그의 재치에 감탄한 손권은 그 당나귀를 제갈각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손권이 제갈각에게 대답하기 곤란할 만한 질문을 일부러 던져보았다.
“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제갈량) 중에 누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느냐?
“제 아버지가 더 뛰어납니다.”
손권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묻자 제갈각의 답변이 재밌었다.
“제 아버지는 일을 맡겨줄 만한 분을 알아볼 수 있지만 작은아버지는 그런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촉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제갈량보다 지금 손권의 오나라를 선택한 자기 아버지가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니, 어린 제갈각의 답변 센스에 손권도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손권이 술자리에서 제갈각에게 돌아다니면서 참석자들에게 술을 권하도록 시켜보았다. 제갈각이 장소(張昭, 156~236) 앞까지 왔는데, 장소는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라 더는 마시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
“자꾸 술을 권하는 건 노인을 공경하는 자세가 아니란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손권이 제갈각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네가 장공을 말로 설득하여 한번 마시게 해볼 테냐?”
이에 제갈각도 짧게 반격에 나섰다.
“옛 위인은 아흔 살에도 전장에 나서서 자신은 아직 늙지 않았다고 말했다던데, 지금 이 자리는 그런 최전방도 아닐 뿐더러 술 마시는 것 정도로 어찌 노인 공경을 핑계 삼으신단 말입니까?”
장소는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술잔 한 가득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렸을 적 똑똑하다는 평을 자주 듣고 자란 때문인지 그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높아졌고 또 동시에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싶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요령껏 아부하는 능력도 자꾸만 커져갔다.
언젠가 촉나라 사신이 와서 신하가 모두 모이게 되었는데, 마침 제갈각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손권이 촉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제갈각은 말타기를 아주 좋아한다네. 돌아가서 승상에게 좋은 말 한 필 보내라고 해주게.”
그러자 제갈각이 곧바로 무릎 꿇고 손권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말이 벌써 도착한 것도 아닌데 무엇이 감사하다는 거지?”
“촉나라는 폐하의 마굿간일 뿐인데 오늘 말을 보내라 명하셨으니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손권은 어렸을 때부터 오래 보아온 제갈각을 특별한 인재라고 여기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실제 업무능력을 평가해보고자 새롭게 실무를 맡겨보기로 했다. 오나라의 절도라는 직책은 군량 보급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전임자의 사망으로 제갈각이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갈각은 처리할 문서가 많고 복잡하다고 해서 그 업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유도한 것은 아니지만 건실한 성격에 지극히 객관적이었던 작은아버지 제갈량이 오나라의 육손(陸遜, 183~245)에게 편지를 보내 조카에 대한 그의 솔직한 의견을 전해왔다.
“우리 형의 아들 제갈각은 성격이 거친데 그에게 군량을 관리토록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비록 외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안감이 들 정도이니, 공께서 부디 그의 직책을 변경하도록 힘써주심이 어떨까 싶습니다.”
본인도 그 일이 싫어서 여러 차례 임무 변경을 요청하고 있었던 터에 마침 밖에서의 평가도 그렇다고 하자 손권은 결국 제갈각을 그의 희망대로 단양군(丹楊郡) 태수로 임명하였다. 대략 오늘날 안후이성(安徽省) 이남 양쯔강 너머에 위치해 있던 단양군은 오나라의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지리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세가 험하고 산월(山越)족이라고 불린 현지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계속된 산지 게릴라전 때문에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하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마땅히 아들의 진급에 기뻐해야 할 아버지 제갈근은 오히려 그 소식을 듣고는 깊이 탄식하였다.
“제갈각이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기는커녕 아예 몰락하게 만들겠구나!”
제갈근은 늘 자신의 맏아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에 걱정이 많았다. 당대의 평에 따르면 그는 당당한 용모에 생각이 깊어서 널리 존경을 받았으며, 또 지략은 비록 동생 제갈량에게 미치지는 못했어도 성정 측면에서는 더 나았다고 하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의리를 지켜 재혼하지 않았고 자식이 있어도 굳이 출세시키려고 일부러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 견실한 제갈근의 눈에는 자만심 가득하고 야심만만했던 큰아들이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 것은 아닐지 짐작이 된다.
그런 아버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스스로 똑똑한 것을 잘 알았고 또 그 이상으로 자신감 충만했던 제갈각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이제 234년 가을 8월, 그는 32세의 나이에 단양태수 겸 무월장군(墲越將軍)이 되어서 기병 300명을 부여받았다.
제갈각은 현지에 부임하자마자 준비했다는 듯이 곧바로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우선 각 지역 관리들에게 명하여 각자 자신들의 관할 지역을 지키면서 지방군을 재정비하고, 동시에 지역민들을 안정시켜 문제 없도록 관리하게 하였다. 또 휘하 장수들을 요지에 배치하면서 오로지 주둔지만 방비하면서 적군과는 절대 교전하지 않도록 지시해두었다. 그리고는 곡식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렸다가 병사들을 동원해 전부 수확하게 했다.
이는 모두 그가 산월족 토벌을 계획하면서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작전이었는데, 그럼으로써 산속으로 숨어든 자들은 새로운 보충 없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양식을 소진하며 지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약탈에 나서려고 해도 이미 제갈각의 각 지방군들이 지역 방어를 철두철미하게 하고 있어 이 또한 불가능했다. 결국 산속의 민중들은 굶주리다 못해 점차 투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제갈각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산속의 백성들이 마침내 항복해 왔으니 이제부터는 당연히 잘 관리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을 외부의 현으로 이주시키되 혹여나 의심하거나 잡아가두는 일이 없도록 마라.”
이때 단양의 한 현인 구양(臼陽)현의 현장이었던 호항(胡伉)이 투항자들 중에서 주유(周遺)라는 인물을 찾아서 체포했다. 주유는 저항세력의 일원이었지만 제갈각의 노련한 조치로 인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지자 부득이 산을 내려왔는데, 호항이 그의 역심을 여전히 의심하여 붙잡아 제갈각에게 보내왔다. 하지만 제갈각은 호항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그가 자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즉각 처형하고는 단양군 내에 널리 알리는 한편 중앙정부에까지 이 일을 보고했다.
지역민들은 현장 급의 높은 인물이 자신들과 같은 일반 평민을 체포하였다가 중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갈각의 의지를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다. 드디어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그간의 의심을 풀고 앞다투어 투항하였다. 그렇게 또 1년이 지나자 일부 과장되었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투항자의 총규모는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제갈각은 그중 1만 명을 골라 직속 부대로 수용하고, 나머지 인력은 여러 장수들에게 배정해주었다.
당연히 이 보고를 받은 손권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위북장군에 도향후로 임명했다. 정확히 제갈각 자신이 주장하였던 대로 3년 만에 거둔 쾌거였다. 확실히 여기까지 보면 철저한 초기계획부터 시의적절한 의사결정 그리고 탁월한 실행력까지,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의심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손권도 자신의 인재를 알아보는 눈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237년 겨울 10월, 제갈각은 단양군의 산월을 평정하는 일을 마치고는 본인 희망대로 북쪽으로 위나라와 접하고 있던 최전선인 여강군(廬江郡)의 환구에 주둔하였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경무장 부대로 위나라측 영토인 서현(舒縣)을 습격하여 그곳 백성들을 탈취해 오기도 하고, 또 더 멀리 정찰군을 파견해 각 도로와 요충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좀 더 자신감을 얻은 제갈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위북장군(威北將軍)이 된 그는 241년 여름 4월에 본격적으로 국경 너머의 육안(六安) 지역 공략에 나섰다. 이 공방전은 해를 두 번이나 넘겨 243년 봄 정월에야 끝을 맺게 되는데, 위나라 장수 사순(謝順)을 무너뜨리고 그 백성들까지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사이 아버지인 대장군 제갈근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있었지만 스스로 힘들게 얻어낸 성취였다.
이렇듯 여러 방면으로 북진의 가능성을 타진해본 그의 최종 목표는 좀 더 진격하여 수춘(壽春)까지 넘보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제갈각의 능력을 가장 많이 인정한다고는 해도 그보다는 훨씬 현실적이었던 손권은 대국 위나라를 상대로 한 그의 계획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제갈각의 이러한 적극적인 현지 활동은 위나라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일종의 나비효과가 되어 그의 운명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그가 국경지대를 계속해서 어지럽히고 다니자 당시 최고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던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직접 그를 공격하겠다고 나서게 된 것이다. 위나라 정부 내의 많은 이들은 제갈각의 움직임은 방어가 완비되어 있는 견고한 성으로 자신들을 유인하는 작전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원정군을 파병하여 제갈각을 공격해보았자 오나라의 지원군이 금새 도착하여 위나라군만 진퇴양난에 빠져 얻을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마의의 생각은 달랐다.
“적들의 강점은 수전(水戰)인데, 이번에 그들의 성을 공격하고자 함은 그 형세를 지켜보고자 하는 것이오. 만약 그들이 부득이 성을 나온다면 이는 곧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고, 혹 저들이 남아서 성을 지킨다고 해도 어차피 호수는 겨울에 얼어서 배를 움직일 수 없으니 분명 수전 대신 원조하는 수밖에 없을 테니, 이는 결국 그들의 약점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유리한 결과가 될 것이오.”
243년 가을 9월, 드디어 사마의가 제갈각 토벌을 위해 출정하였다. 거의 실시간으로 이러한 동향은 오나라에도 첩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손권은 처음에는 지원군을 추가 파병하여 맞대응하려고 하였지만 전황상 불리하다는 내부 판단을 듣고는, 최종적으로 제갈각의 주둔지를 후방인 시상(柴桑)으로 옮기는 것으로 의사결정 하였다. 이에 제갈각은 사마의가 예상했던 시나리오처럼 부득이 군수품을 불태우고는 성을 버리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 된 사마의는 기왕 진격해온 김에, 적군을 완전히 압도하기 위해서는 군량이 곧 결정적 요소라고 판단하고는 대규모 둔전(屯田) 작업에 착수하였다. 수로를 확장하는 한 편, 비탈진 곳을 개간하여 농토를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향후 이 근방에는 곳곳에 식량 창고가 세워지게 된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것은 다음 해 봄 1월의 일이다.
이렇듯 제갈각은 모처럼 여러 해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자 오나라 정부 내에서 자신에 대한 비토 분위기가 거세져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간 성공가도만 걸어온 그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다. 얻은 것 없이 국력만 낭비한 꼴이 된 그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다름 아닌 최근 승상이 된 육손(陸遜)이었다. 바로 유비의 대군을 초토화시킨 이릉(夷陵) 대전으로 유명한 그 인물이었다.
그래도 아직 천운은 제갈각에게 있었다. 승상이 된 지 불과 1년 만인 245년 초 육손이 세상을 뜨자 오히려 그에게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246년 가을 9월에 대장군으로 승진한 것은 물론 기존 주둔지에서 서쪽인 무창(武昌)에 주둔하면서 육손을 대신하여 형주자사의 직무를 겸하게 된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괜히 있는 법은 아닌 듯하다.
시간은 더 흘러 그렇게 자신을 높이 평가해준 손권도 세월은 이기지 못하고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병상에 처음 불러온 인물도 그 누구도 아닌 제갈각이었다. 마지막까지도 그를 믿어준 것이었다. 이 당시 막내아들인 태자 손량(孫亮)이 겨우 아홉 살이어서 걱정이 된 손권이 제갈각을 태자태부로 삼아 새 황제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인 252년 4월 결국 손권도 생이 다하였고, 제갈각은 새로운 황제의 태부가 되어 드디어 권력의 최상층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미납세금을 면제해주고 관세를 없애는 등 국정을 운영하면서 국민들의 혜택 위주로 판단하고자 하였기에 이를 반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제갈각이 길을 다닐 때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자 대중들이 목을 빼고 있는 광경들도 자주 목격되었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왔던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오래 전 손권이 수도를 건업으로 옮길 당시 동흥제(東興隄)라는 호수의 제방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관리하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제갈각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이곳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했다. 252년 10월 동흥에 인력을 집결시켜 큰 규모로 제방을 재건하고는 동시에 좌우에 제방을 활용해 두 개의 성을 구축하였다. 장수 전단(全端)에게는 서쪽 성을, 도위 유략(留略)에게는 동쪽 성을 지키도록 하고는 각 성마다 1천 명씩 병력을 배치하였다.
제갈각의 식견처럼 위나라 역시 이곳의 전략적 가치를 파악하고는 호수를 막고 있는 제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재빨리 공세에 나섰다. 불과 두 달 만인 12월 초에 제갈각에게는 삼촌뻘인 위나라의 제갈탄(諸葛誕) 등이 총 7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동흥을 포위하고 남군과 무창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왔다. 제갈각에게는 다행히도 동흥의 새로 쌓은 두 성이 높고 험준한 곳에 건설되어 있어서 위나라의 대군도 초반의 기세가 무색하게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어쨌든 이 소식을 접한 제갈각도 12월 19일에 4만 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즉시 반격에 나섰다. 밤낮없이 달려가서 나흘만인 12월 23일에 제갈각의 대군은 동흥에 도착하였다. 이때는 한겨울이라 날씨가 몹씨 춥고 눈까지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위나라 장수들은 생각보다 제갈각 휘하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기고만장해져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제갈각의 군사들은 제방 기슭으로 올라와 곧장 함성을 지르고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이에 놀란 위나라군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고, 제방 공격을 위해 호수 위에 설치해두었던 부교(浮橋)로 너도나도 몰려들다보니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다리가 부서져서 병사들 다수가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때 낙안태수 환가 등이 한꺼번에 익사했고 위나라로 도망쳤던 한종이라는 장수도 오나라군에 붙잡혀 참수를 당했다. 단 한 번의 기습만으로 거두어들인 적군의 물자와 장비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리고 1월 5일, 남아 있던 위나라군은 모두 철군하였다.
2월에 제갈각의 군대가 동흥에서 개선해오자 오나라에서는 성대한 포상이 있었다. 제갈각 자신은 양도후(陽都侯)로 승진하였고, 형주목과 양주목 그리고 독중외제군사(督中外諸軍事)가 더해졌다. 그리고 금 1백 근에 말 2백 필, 그리고 비단과 베를 1만 필씩 상으로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에 심취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그는 이때 많은 이들이 그래왔듯이 마찬가지로 승자의 저주에 빠져들고 말았다. 원래부터도 스스로 똑똑하다는 걸 잘 알았기에 자신감이 넘쳤고, 오랜 황제의 신임에 이젠 전국민적 지지를 받는 데다가, 줄곧 하는 일마다 다 잘 되었다보니 승자의 교만함이 어느덧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전쟁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봄에 위나라로 군대를 출병하고자 하였다. 확실히 그에게는 위나라라는 강대국도 이제는 더 이상 그의 맞수가 아니라고 느껴졌던 것 같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빈번한 출병은 병사들을 지치게 한다면서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를 말렸지만, 이미 성공의 단맛으로 눈이 먼 상태에서 그런 말들은 자신의 성공을 시기질투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긴 글을 써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아래는 그 내용을 압축한 것이다.
원수가 있는데 그를 놔두면 그 피해는 내가 아니라 나의 후손이 입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위나라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옛 조조 때의 병사들이 남아 있지 않고 그 다음 세대는 아직 다 자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을 지금 정벌하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적국의 국민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전력이 되지 못할 뿐입니다. 만약 지금으로부터 10년이 흐른다면 위나라의 국력은 분명 현재의 두 배가 될 텐데, 거꾸로 우리는 전력을 지금 쓰지 않고 묵혀두고 또 10년이 지난다면 아마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이렇게 적국의 인구는 배로 늘어나고 우리의 군사력은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이들은 틀림없이 이런 나의 논리를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것입니다. 미래의 문제가 지금 당장 닥쳐오지 않았는데도 미리 걱정부터 하는 것을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떤 이들은 우리 국민들이 여전히 힘든데 더 몰아부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더 큰 위기는 못 보고 작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나 제갈각이 갑자기 죽는다면 장기적인 안목의 국가 정책이 추진될 수 없음을 알기에,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우리 후세를 위해 나의 우려를 전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제갈각이 고집을 부려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실행에 옮길 것임을 알고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제갈각은 완곡히 자신을 말리는 친구의 제언도 깨끗이 무시했다.
그리고는 종전 2개월만인 그해 3월에 각 지역들에서 총 20만 명을 대거 징발하여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당연히 국민적 저항이 따랐고, 제갈각 자신이 기껏 쌓아올린 인망도 이때 모두 잃고 말았다. 얻기까지는 애써 오래 걸렸지만 잃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당초 계획은 회남(淮南) 공략이었지만 도중에 계획을 수정하여 조금 더 가깝게 바로 그 아래인 합비(合肥)의 신성(新城)을 목표로 우선순위를 바꾸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갈각에게는 행운의 축복 대신 드디어 불행의 어두운 기운이 찾아왔다. 여름 4월, 야심차게 신성 포위를 시작하긴 하였지만 당초 기대하였던 것과 달리 성의 함락은 몇 달이 지나도 요원했다. 늦봄에 개시한 전쟁이었던 만큼 곧바로 시작된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제갈각의 발목을 잡았다. 더운 날씨에 주변의 아무 물이나 자꾸 마시다보니 설사부터 온갖 돌림병이 군을 휩쓸었던 것이다. 각 진영에서 제갈각에게 환자의 현황을 보고했지만 그는 과장된 것이라면서 오히려 체벌을 하려고 드니 더 이상 사실을 말하려는 관리도 없어졌다.
이때는 제갈각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을 치욕으로 여겨 얼굴 가득 화가 나 있었다. 휘하 장군 중에 한 명이 현재의 상황을 객관적 사실로써 논하자 제갈각은 격노하여 그의 병권을 빼앗아버렸다. 또 한 명은 대응방안을 여러 차례 보고하였지만 제갈각이 전혀 받아들일 생각을 않자 아예 전선 너머 위나라로 투항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이때 위나라에서는 태위 사마부(司馬孚), 곧 이 당시엔 이미 고인이 되었던 사마의의 동생을 파견하여 제갈각을 막도록 한 상태였다. 위나라측에서는 오나라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구원군을 전진시켰다. 이와 동시에 성안에서는 포위망을 뚫고나가 제반 소식을 전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를 하였는데, 그중 여러 명이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심리전으로 오나라군측에서는 위나라 구원군이 돌아갔다고 소문을 내기도 하였으나, 위나라 사자들의 살신성인의 노력으로 위나라의 대군이 오고 있다고 전함으로써 성내의 사기를 지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가을로 접어든 7월, 달리 묘책이 없었던 제갈각은 결국 회군을 결심했다. 병사들은 부상당하고 병들어 철수하는 길에도 쓰러지고 포로로 잡히고 난리가 아니었다. 산 자든 죽은 자든 귀천 불문하고 모두가 슬프고 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갈각 본인은 태연자약했다. 그는 회군 도중 장강 가에 한 달이나 머물면서 심양현에서 둔전을 시행할 것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에게 복귀를 요청하는 조서가 끊임 없이 전달되어 왔으므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제는 모두가 제갈각에게 실망을 넘어서 원한을 품게 되었다.
가을 8월 제갈각의 군대가 오나라의 수도 건업에 도착하자, 병사들을 배열시켜 이끌고 관소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중서령 손묵(孫嘿)을 불러 사납게 다그쳤다.
“너희들은 어쩌자고 몇 번씩이나 조서를 보내온 것이냐?”
겁을 먹은 손묵은 병을 핑계로 집에 들어앉았고, 제갈각이 계속해서 늘 사람들에게 화만 내니 누구나 혹 그와 마주칠까봐 걱정부터 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는 다시 원정군 편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여긴 이들 중 한 명이 손준(孫峻)이었다. 사실 그는 손권 사망 당시 제갈각을 제거하려고 했던 음모를 귀뜸해줌으로써 그의 실각을 미연에 막아준 인물이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본인이 제갈각을 직접 제거하는 주체가 된 셈이었다. 그는 11세의 어린 황제 손량까지 끌어들여 정변을 준비했다.
공식적으로는 손량이 제갈각을 술자리에 초청하는 모양새였다. 밤새 잠을 뒤척인 그는 손량을 알현하기 위해 궁궐 문 앞에서 수레를 내렸다. 손준이 직접 나와서 그를 만나서 궁궐 안으로 자연스럽게 안내했다. 하지만 아직 제갈각에게도 우군이 있어 오늘의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전하는 밀서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를 본 제갈각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온 것인지 은근슬쩍 궁을 떠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하필 궁궐 문 앞에서 태상 등윤을 마주쳤는데, 그런 음모는 전혀 모르고 제갈각에게 황제를 꼭 뵈어야 한다고 재차 이야기를 한 것이 그만 제갈각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다시 궁궐로 들어온 그는 칼을 차고 신발도 신은 채 손량에게 인사하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술상이 준비되었지만 독살을 경계한 그는 술 마실 생각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들 리 없었다. 이를 눈치 챈 손준이 의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연스레 제갈각에게 원래 마시던 술이라도 드시라고 제안하자, 거기에는 예에 맞추어 대응을 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손준이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몸을 일으키고는 갑자기 소리쳤다.
“제갈각을 체포하라!”
제갈각은 깜짝 놀라 일어섰는데, 그가 칼을 뽑기도 전에 손준이 먼저 그를 찔렀다. 제갈각을 수행하던 장약이 손준을 공격했지만, 손준이 역공하여 손준의 팔을 잘라버렸다. 호위병들이 뛰어들어왔지만 손준이 이들을 제지했다.
“오늘 죽이려던 제갈각은 벌써 죽었다.”
제갈각에게는 제갈작, 제갈송, 제갈건 등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불미스러운 일로 죽임을 당했었고, 둘째와 셋째는 이번 일로 급히 피신을 하다가 둘 다 처형되었다. 아버지 제갈근이 오래 전 예견하였던 대로 일족이 몰살당하는 화를 입고 만 것이다.
어려서 신동이었고, 자라서도 촉망받는 인재로 인정받았고, 장성해서는 본연의 총명함으로 맡은 바 일들을 모두 다 완수해내는 능숙함을 보이면서 결국 인생의 최고 절정을 맛보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과욕으로 인해 포르투나(Fortuna)의 버림을 받아 인생의 나락으로 급전직하한 이의 씁쓸한 결말이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천재 가문인 제갈(諸葛) 씨 집안에서 태어나 제갈근, 제갈량, 제갈탄과 같은 탁월했던 윗세대로부터 바톤을 이어받아 새로운 세대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올라서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승자의 저주에서 벗어나 그 성공을 유지해내는 것은 결국 다른 영역의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그에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제3자적 시각이 가능했다면 말년의 불운은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좋은 집안 출신에 주위의 거듭된 칭송 그리고 거듭되는 성공의 행운이 결국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자신감과 자만심은 한 끝 차이일 뿐이다. 아주 살짝이라도 거리를 두고 밖에서 나를 바라보기는 너무나 어렵고 스스로 내 안의 나에 갇히기는 너무도 쉽다는 게 인간이 가지는 본연의 한계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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