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평가를 좋아했고 학문과 책략에서 뛰어났다

와룡봉추(臥龍鳳雛), 엎드려 있는 용과 봉황의 새끼를 일컫는 말로 흔히 세상에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뛰어난 인재를 뜻한다. 이는 삼국지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각각 제갈량과 방통(龐統, 179~214)을 가리킨다. 소설 상에서는 특히 주인공격인 유비를 중심으로 띄워주기 위해 양대 천재를 거느린다는 컨셉의 소재로 활용되었지만, 소설에서든 실제 역사에서든 제갈량이라는 강한 빛에 가려진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존재로 여겨진다.
제갈량과 두 살 터울인 방통은 당대에 이미 유명한 재야 인사였다. 그는 형주(荊州)의 양양군(襄陽郡, 오늘날 후베이성 북서쪽) 출신으로 어렸을 때에는 딱히 주목을 받진 못했었지만, 스무 살 때 사마휘(司馬徽)라는 당시 유명인사를 만나보고는 남부에서 최고의 인재라고 평가를 들은 것을 계기로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통은 명성을 쌓아나갔고 고향인 양양군에서 공조(功曹)라는 직책도 얻게 되었다.
방통은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로 칭찬만 해주었는데, 이를 특이하게 여긴 이들이 그 까닭을 물어본 적이 있다. 방통의 답은 이러했다.
“지금은 난세여서 착한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사회가 질서를 되찾고 윤리를 바로 세우게 하려면 좋지 않은 말보다는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착한 사람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칭찬을 통해 열 명 중 다섯 명은 실패해도 나머지 절반은 성공할 수 있다면 칭찬을 들은 이들이 세상을 위해 노력하게 될 테니 그럼 괜찮지 않겠습니까?”
이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유비와 함께 형주를 얻어내고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주유(周瑜)가 210년 사망하자 그 유해를 호송하여 오나라로 간 인물이 바로 방통이었다. 이때 오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방통의 명성을 듣고 알고 있었는데, 방통이 일을 마치고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육적(陸勣), 고소(顧劭), 전종(全琮) 이렇게 세 사람이 그를 전송하기 위해 나왔다. 이들을 본 방통이 인물평을 하였다.
“육적은 둔한 말이지만 빠른 발을 가지고 있고, 고소는 느린 소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전종 당신은 지혜는 어떨 지 잘 모르겠지만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인물입니다.”
이를 들은 이들은 방통과 마음 깊이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언젠가 당시 인물평으로 나름 한 이름 하고 있던 허소(許劭)가 방통의 숙소를 찾아가 그에게 자기 자신과 비교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방통의 답변은 이러했다.
“세상을 바로잡고 인물을 판단하는 부분에서는 물론 제가 선생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제왕의 계책을 생각하고 세상사의 핵심을 파악하는 측면에서는 제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까지 포함하여 스스로에 대한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자신감만큼이나 세상에서 뜻을 이루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그에게 필요하는 것은 적절한 때와 자신을 이끌어줄 리더의 존재였다. 그 순간은 바로 유비가 적벽대전 무렵 형주를 확보하면서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유비는 형주 통치를 위해 여러 가지 행정조치를 시행하였는데, 그중에는 방통에게 뇌양현(耒陽縣)의 현령을 맡긴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방통은 작은 현의 현령으로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해 결국 면직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출세를 위한 첫 시작 치고는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에겐 명성과 그에 따른 인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오나라의 노숙(魯肅)이 유비에게 편지를 보내 방통을 위해 구명을 대신 해주었다.
“방통은 지방관보다는 참모로서 임무를 맡겨야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마찬가지로 방통을 잘 알고 있던 제갈량도 그를 다시 유비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이에 유비는 방통을 직접 만나보고는 깊게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야 그가 유능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치중종사(治中從事)로 발탁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방통이란 인물을 곁에서 직접 겪어보면서 유비는 그를 제갈량만큼 신임하게 되었고 마침내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군사중랑장으로 삼았다.
그 결과는 곧 제갈량이 형주에 남아 있는 동안 촉으로 유비를 수행하는 역할은 방통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그가 갈망해왔던 대로 제대로 자신의 실력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렵 어떻게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후한 말 세상이 혼란스러워졌던 시기에 유언(劉焉, ?~194)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키아밸리즘을 통해 익주(益州), 곧 촉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는 나름 지방군벌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야심에 비해 천운과 능력 두 가지 모두 부족하였기에 세력 확장을 위해 좌충우돌하던 중 병사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이가 바로 수도 장안에 파견되었다가 때마침 돌아온 유장(劉璋, Liú Zhāng, ?~)이었다. 그는 사실 유언의 네 아들 중 막내였는데 두 큰형은 혼란의 와중에 살해되고 셋째 형은 정신병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에게 익주의 권력이 넘어오게 되었다.

그는 성품이 착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평시라면 좋은 자질이었을 지 몰라도 이 당시는 난세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그의 또 다른 평은 그래서 판단력 부족과 우유부단함이었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대외 확장정책을 지속하긴 하였지만 창업에 성공이라도 했던 아버지보다 더 능력이 떨어졌기에 제대로 성과도 내지 못한 채 대내외적으로 혼란만 일으킬 뿐이었다.
그러던 중 조조가 그와 가까운 한중 지역을 재패하자 유장은 이번엔 그에게 줄을 서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나비효과처럼 유비와 유장을 이어주는 계기가 된다. 유장이 파견한 장송(張松)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선임자가 조조에게 대우 받았던 것을 보고는 자신도 내심 후한 대우를 기대하고 있다가 정작 제대로 선물을 받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었는데, 마침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아예 대놓고 유장에게 조조가 아니라 유비와의 연대를 제안하게 된 것이다.
장송과 유장의 대화를 한번 직접 들어보자.
“조조의 대군이 만약 장로(張魯, Zhāng Lǔ)와 연합하여 우리 땅을 노린다면 누가 그에게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나 또한 걱정이지만 달리 방법이 있겠소?”
“유비는 주군과 친척지간이자 동시에 조조와는 원수지간입니다. 그는 군사적 능력도 뛰어나니 그를 통해 장로를 제거하는 방법이 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장로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우리 익주는 강해지고 조조와도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귀가 가벼웠던 유장은 그 말을 그럴 듯하다고 여기고는 극진한 선물과 함께 법정(法正) 등을 보내 이 당시 형주에 머물고 있던 유비와 협력 관계를 도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정이라는 자 역시 장송과 마찬가지로 친유비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는 주군인 유장이 아닌 오히려 유비 편에 서서 유비에게 익주를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쪽을 택했다.
“장군께서 유장의 나약함을 공략하신다면 장송이 내부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익주의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지리적 이점을 잘만 활용하신다면,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설득력 있는 법정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던 유비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제갈량과 관우는 형주에 남겨두고, 방통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익주로 향했다. 군대를 동원한다는 것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유장과의 군사동맹을 추진하기 위한 실력 과시의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유비는 드디어 자신의 후대의 본거지가 될 익주 지역으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211년 유장이 있던 성도(成都)로부터 약 140km 떨어진 부현(涪縣)에서 유장과 유비는 첫 공식적인 만남을 가졌다. 100여 일 동안이나 한데 어울린 다음 유장은 유비에게 군수품을 공급해주고 경쟁자인 장로를 유비가 공격을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기나긴 회동을 마무리지었다.

그런데 사실 이 시기에 장송은 같은 편인 법정을 통해 유비 그리고 방통에게 회담 장소에서 유장을 제거할 것을 은밀히 제안했었다. 하지만 워낙에 진중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아직 속마음을 내비칠 만큼 신뢰가 쌓이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던 유비는 이러한 제안을 완곡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알아차린 인물들도 당연히 존재했다. 모든 일에는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듯이, 친유비파를 자처하는 장송에 반하는 세력들도 당연히 반격에 나섰다. 이중 왕루(王累)라는 인물은 아예 스스로 성문에 거꾸로 매달려 그 위험성을 알리고자 하였지만, 이미 장송에게 깊이 설득된 유장은 오히려 같은 편이라고 믿어버린 유비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한 번 눈에 무언가 씌이면 그것의 장점만 눈에 보일 뿐 다른 측면은 보이지 않는 게 인간이 가지는 인지능력의 한계인 듯하다.
한편 이때 방통도 유비에게 똑같은 제안을 한 바 있었다. 부현의 부성(涪城)에서의 회견 때 방통이 유비와 나눈 대화를 살펴보자.
“지금 이 회담을 이용하여 유장을 잡을 수 있다면 장군께서는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이 땅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처음 다른 나라에 들어온 것인데 아직 신의를 제대로 쌓은 바도 없으면서 그렇게 할 수는 없겠소.”
“형주는 땅이 황폐해진 상황에서 인재도 부족한 반면, 동쪽에는 오나라 손권이 있고 북쪽에는 조조가 있어 삼국정립의 계획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익주라는 곳은 땅이 풍요롭고 인력도 튼실하며, 인구는 백만에 국방력 또한 탄탄하니 굳이 국가 경제를 다른 곳에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을 바탕으로 대사를 추진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나와 정반대되는 인물은 조조라오. 조조가 엄격하다면 나는 관대하고, 그가 힘에 의지한다면 나는 인덕에 의지하고 있소. 나는 지금껏 조조와 반대로 행동하면서 뜻을 이뤄오고 있는데, 지금 그런 일 하나로 세상의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변화의 시대에는 길이 오직 한 가지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약자를 흡수통합하고 적을 공격하는 것은 춘추시대 5대 강국(五覇)이 원래 해온 바입니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익주를 쟁취한 다음 올바르게 다스리고 정의롭게 보다듬고 나아가 내정을 안정화시킨 다음 대국(大國)의 길로 나아간다면 이게 어찌 신의에서 벗어나는 일이겠습니까? 만일 지금 우리가 쟁취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누군가 다른 이가 낚아채어갈 게 뻔한 상황입니다.”
실리주의자 방통과 원칙론자 유비의 모습이 꽤 잘 드러나는 대화이다. 그리고 물론 결론은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유비의 뜻대로 되었다. 냉정하게 그 당시 현실을 바라보자면 물론 방통과 장송의 제안이 합리적이긴 했다. 불필요한 군사력 낭비를 막고 세력을 온전히 한 채 익주 지역의 국력을 극대화하는 방안으로는 단 한 명, 유장만 제거하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유비의 선택은 실리만을 따진 것이 아니라 좀 더 상황을 크게 바라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촉 지역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들의 제안대로 하는 것이 물론 옳았을 것 같지만, 유비는 중원 전체를 시야에 두고 난세를 살아간 큰 인물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탈취할 정권이라도 나름 자신만의 명분 쌓기를 통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하더라도 평판을 유지하면서 실리와 명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묘수를 찾아야 하는 게 더 현실적인 이슈였던 셈이다. 결코 단기간의 이익에 함몰되기보다는 그 다음 수까지 바라보고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최고 리더로서의 그의 탁월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회담종료 후 유비는 약속대로 북쪽으로 경쟁자 장로 공격을 위해 진군을 개시하였는데, 사실 유장에게만 도움이 되는 장로 토벌전보다는 지역 내에서의 자신의 인기를 모으는 데 훨씬 힘을 썼다.
그러던 중 다음 해인 212년 조조가 오나라 공격을 개시한다는 소식을 접한 유비는 유장에게 당장 장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까지는 만들어 두었으니 이 기회에 동맹인 손권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유장은 어쩐 일인지 유비의 병력과 보급에 대한 요청사항을 절반도 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다보니 유비의 설명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던 모양이겠지만, 처음의 기대와 달리 유비가 자신에게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던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유비가 떠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크게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친유비파의 실질적인 리더를 자처하고 있던 장송이었다.
“지금 대사를 이루려고 하는 마당에 어찌 이곳 익주를 떠나려 하십니까?”
그런데 그가 우려하였던 것보다 문제는 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예상보다 더 빨리 터져버리고 말았다. 장송의 형이 여기서 자칫 일이 잘못될 것을 걱정하여 결국 유장에게 장송 그리고 유비의 정권탈취 계획을 폭로한 것이다. 크게 놀란 유장이 당장 장송을 처형하였고, 당연히 유비는 가뜩이니 유장의 군사적 지원이 기대에 못미쳐 열받아 있던 와중이어서 결국 두 세력간의 본격적인 다툼이 이로써 시작되었다.
이때 유비의 브레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방통이 유비에게 세 가지 전략 방향을 제시하였다.
- 상책 : 은밀히 정예 병사를 뽑아 밤낮으로 가서 성도를 직접 습격한다. 유장은 본래 용병이 약한 인물이고 또 평상시 내부 변란에 대한 방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면 한 번에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중책 : 양회(楊懷)와 고패(高沛)는 유장의 유능한 장군들이고 각각 정예군으로 요지를 수비하고 있다. 듣기로 이들은 유장에게 유비를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측에서 먼저 사신을 파견해 그들에게 형주에 위급한 일이 생겨 우리는 돌아가니 구원을 요청한다고 설명하고, 실제로 군을 철수시키는 듯 행동을 취한다. 이 두 사람은 그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내심 기쁜 마음으로 유비를 환송하기 위해 달려올 올 테니, 이때 그들을 사로잡고 또 그 군사들까지 탈취하여 성도 공략에 나선다.
- 하책 : 백제성으로 후최한 다음 형주까지 연계하여 장기전을 준비한다. 다만 오래 생각만 하고 막상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면 앞으로 큰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책은 어차피 채택 불가능한 안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제외하고 본다면, 상책은 상당히 공격적인 제안이라 나름 보수적인 유비가 선택하기에는 리스크가 있어 보였을 테고, 그럼 어차피 남는 방안은 중책이었다. 당연히 유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두 번째 전략을 채택하였다.
유비는 그렇게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는 성도를 향해 진군을 개시하였다. 유비의 거병 소식에 유장은 휘하 장군들에게 유비와의 관계 단절을 명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유비는 진격 과정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면서 심지어 유장과 처음 만났던 장소인 부현까지 점거해버렸다. 유장은 부현을 지켜내려고 별도로 파병까지 하였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계속해서 유장은 군대를 보냈지만 오히려 유비에게 투항하는 등 점차 전세는 기울어서 유비의 세력이 커지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 무렵의 일화 하나만 소개하자면, 유비가 부현을 탈취하고 기분 좋게 그곳 부성에서 크게 연회를 열고는 측근인 방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연회는 참으로 즐겁소이다.”
이에 방통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나라를 정복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현명한 이의 군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때 유비는 술에 취해 있었다보니 화를 내며 대꾸했다.
“무왕이 주나라를 토벌할 때에도 노래부르고 춤췄다고 하는데 그럼 그 또한 현명한 인물이 아니었단 말이오? 당신 말은 틀렸소. 썩 자리를 비키시게.”
머쓱해진 방통은 머뭇거리다 일어나 연회장을 나갔다. 잠시 후 제정신이 돌아온 유비는 곧바로 후회하고 방통을 다시 자리로 불러들였다. 이에 방통은 돌아오긴 했지만 유비에게 딱히 사과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만 할 뿐이었다. 뭐라도 대화를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유비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방금 한 논쟁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겠소?”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유비는 이 말에 크게 웃고는 처음으로 돌아가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의 방통의 대답은 유비의 잘못도 있고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한 발 물러선 것이었는데, 엄밀히 따져묻는다면 유비의 잘못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유장을 배신하자고 한 것은 방통의 계책이었지만 이는 그가 모략을 즐겨서라기보다는 어차피 악을 행할 때에는 그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의 제안인 것이었고, 유비의 즐겁다는 반응은 평상시 그가 내세워왔던 난세라 할지라도 도덕과 윤리가 필요하다고 했던 주장을 스스로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라 자신의 속마음이 술김에 비쳐나온 것을 방통이 바로잡아주려고 하였던 것이니 말이다. 유비가 성인군자가 아니듯이 방통 역시 마찬가지이나, 최소한 이를 얼마나 잘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대의를 위해 효과적으로 행동할 것인지의 측면에서는 방통이 한 수 앞이 아니었나 싶다. 유비의 한바탕 웃음으로 넘어가긴 하였지만 방통이 자존심을 지키면서 유비를 위해 절반은 양보한 것이 조금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겠는가 생각된다.
그렇게 유비의 전격적인 성도 공략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 총력전 단계로 접어들자 유비는 관우만 형주에 남겨두고 제갈량과 장비, 조운 등 주요 전력을 모두 유장과의 전장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동시에 유비는 진군하여 낙현을 포위하였다. 이때 방통은 하나의 부대를 통솔하여 낙성(雒城)을 공격하던 중 허무하게도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만다. 불과 서른여섯 살의 젊은 나이였다. 그 당시 유비와는 열여덞 살 차이, 제갈량보다는 두 살 많았을 뿐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에 유비는 애통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유비군이 성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인 214년의 어느 여름 날 결국 유장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당시 수도에는 3만 명의 정예군이 상주해 있었고 물자 또한 1년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이 있었음에도, 좋게 표현하면 착한 사람이었던 유장은 선의의 피해자가 될 국민을 우선시 여기고는 스스로 성문을 열고 투항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다행히 기분이 좋아진 유비가 선처를 약속하고 실제로 그것을 지켜준 덕분에 유장과 그 자식들은 끝까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정복자 유비는 군사들에게 성대한 축하연을 열어준 것은 물론 물질적인 보상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전승에 대한 공적을 나누었는데, 스스로는 익주목으로 올라섰고 자신이 이끌고 있던 무장과 문인들 역시 한 자리씩 다 챙겨주었다. 여기서 유비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은 유장측 인사들부터 유장의 반대파들까지 통크게 골고루 등용하였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유비는 후대에 촉한(蜀漢)이라는 약칭으로도 불리게 되는 지역을 처음 정복할 수 있었다. 이를 이루기 위해 대내외의 여러 인물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내부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하였던 모사는 다름 아닌 방통이었다. 제갈량이 그를 질투하여 죽음을 방치하였다는 속설은 차치하고, 나름 “삼국정립”이라는 전략적 프레임을 제시한 또 다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가치는 분명 빛을 발한다. 심지어 그 기반이 되는 익주 탈취라는 대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하였던 주체였으니 그의 기여도는 충분히 인정할 만할 것이다.
다만 그가 진정한 천재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제갈량의 빛에 가려졌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기에는 사실 역사적 기록상으로는 이 둘의 관계가 그렇게 잘 드러나 있지 않고, 또 전략적 마인드와 전술적 계획성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탁월한 모습은 잘 이해가 되지만, 천재적인 발상을 통해 세상을 뒤집을 만한 기재였는지는 솔직히 단정짓기 어려워 보인다. 성도 공략의 초기 기획은 분명 그의 공로이지만, 유장 암살의 건은 장송이나 법정도 동일하게 떠올린 아이디어였고, 그 전후해서는 눈에 띄는 활약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젊은 시절부터 인물평으로 이름을 날린 덕분에 나름의 이지적인 명성을 쌓은 측면,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나면서 잠재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사실, 거기에 아깝게 인재를 잃었다는 세간의 아쉬움이 더해지면서 생겨난 평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다. 천재적인 인물상이었다는 점은 확신하기가 어렵지만, 분명 그 시대에서 앞서가는 똑똑한 인재였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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