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력이 있었고 전략에 능하였으며 사리분별이 뛰어났다.

《삼국지》의 실질적인 주인공 조조의 주변에는 수많은 책사가 있었다. 제갈량이 위나라의 넘쳐나는 인재를 보면서 한탄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승자의 기록이라는 편향성을 감안하더라도, 《삼국지》의 인물들을 다룬 〈열전〉의 인명수만 단순 비교해보더라도 위나라가 촉나라의 2배에 달한다. 객관적 평가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당시 알려진 인물들의 이름만 카운트 하더라도 위나라가 경쟁국가들 대비해서 훨씬 인재의 풀이 폭넓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조조에게 있어 큰 도움을 준 성공적인 인재들도 많았지만, 여러 참모진 중에서 가장 안타까움을 자아낸 젊은 천재로는 곽가(郭嘉, 170~207)를 손꼽을 수 있다. 다른 모사들이 대부분 조조와 동년배들이었다면 곽가만은 그와 15세의 나이차가 있었기에, 조조는 자신의 은퇴 이후를 생각했을 때 차세대 그룹의 대표주자로 그를 가장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조조의 마음에 어떻게 들게 되었는지를 그럼 한번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곽가가 제일 처음 만난 인물은 조조가 아니었다. 그의 출신지는 오늘날 허난성의 중심부였는데, 가까운 이웃 출신인 원소(袁紹, ?~202)를 먼저 찾아간 적이 있었다. 곽가는 세상이 혼란을 겪기 시작하던 당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영웅을 물색하고 다녔었는데, 원소를 만나본 다음 이와 같은 평을 남기고 그를 떠났다.
“원소는 인재를 등용할 줄 모르고, 일을 추진함에 있어 생각은 많으나 방법론이 부족하고, 또 전략을 좋아하는 듯해도 정작 결단력이 없으니, 세상의 혼란을 평정하고 패도를 밟아나가기는 어렵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조조도 자신을 도와 전략을 기획하고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숨은 인재를 찾고 있었다. 그 역시 곽가를 만나기에 앞서 책략의 귀재인 희지재(戯志才)라는 천재적인 인물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희지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함께 대업을 세울 만한 사람이 없구나. 과연 누가 희지재의 빈 자리를 메꿀 수가 있겠는가.”
조조의 이러한 한탄에 순욱(荀彧)이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라고 하며 추천한 이가 바로 젊은 곽가였다. 순욱의 주선으로 이 둘은 드디어 만나게 되는데, 마침 196년 유비가 여포에게 쫓겨 부득이 조조에게 귀순하였기에 그의 처분에 대해 논할 기회가 있었다. 조조의 또 다른 참모 정욱(程昱)이 이 기회에 잠재적 경쟁상대인 유비를 처치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조조가 곽가에게도 그 제안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곽가의 답변은 이러했다.
“옳은 말입니다. 공께서는 그간 정의를 기반으로 군대를 결성하여, 민중을 위해 혼란을 평정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선의를 밑바탕으로 신뢰를 보여주어 영웅들을 불러모아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마침 이번에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는 유비가 우리에게 기왕 몸을 맡겨 왔는데, 그러한 이를 만약 제거해버린다면 우린 분명 악평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유능한 인재들일수록 우리를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 생각을 고쳐먹고 다른 세력들에게로 전향해버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데 된다면 공께서는 누구와 함께 세상을 평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잠재적 위협을 없애기 위해 천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더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이를 옳게 여긴 조조는 유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영웅들을 끌어모을 시기가 맞네. 이런 때일수록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세상의 인심을 잃는 것은 옳지 않겠지.”
물론 결과적으로는 정욱의 우려대로 역사는 흘러가게 되지만, 그 순간의 최선의 결정은 곽가의 의견대로였다. 이때 만일 유비를 제거하였다 하더라도 미래의 경쟁상대 하나만 역사에서 조기에 사라지는 것일 뿐, 아직 원소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던 당시 여러 군벌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조조측으로서는 그 반대급부로 발생했을 여러 부정적 영향까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어쨌든 조조는 곽가의 손을 들어주면서 확실히 뛰어난 인재를 얻었다고 판단했고, 곽가 또한 종합적 사고에 기반한 합리적 판단과 거시적 안목에서의 의사결정 능력을 갖춘 리더를 드디어 만났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오해가 없도록 부연하자면, 그렇다고 곽가가 혹여나 친유비파였는가 하면 그것은 전혀 아니다. 이로부터 3년여 후의 일이지만, 조조가 모처럼 유비를 출전시킨 일이 있었는데 뒤늦게 이를 들은 곽가가 나서서 그 결정을 강하게 만류하였다.
“유비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차 싶었던 조조도 유비를 되돌리려고 하였지만, 이미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유비는 멀리 달아나 곧 서주(徐州)를 탈취하여 다시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하게 된다. 이 상황을 가장 우려하였던 지라 조조는 바로 다음 달인 200년 봄 1월에 곧바로 동쪽으로 유비를 정벌하려고 하였고 이 아이디어에 적극 동조한 것도 역시 곽가였다. 그렇게 유비는 조조군에 의해 격파당하여 황급히 북쪽의 원소에게로 도망쳤고, 홀로 남은 관우가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투항하게 된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다. 즉 곽가는 단순히 대의명분에만 집착하는 고지식한 캐릭터가 아니라 정확히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가장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봄이 옳겠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198년의 늦가을인 9월에 조조가 여포(呂布)를 토벌하기 위해 동진하였을 때의 일이다.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하비성까지 몰아붙이자 드디어 여포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역습에 나섰다. 하지만 조조의 군은 그런 여포를 격파하고 하비성(下邳城) 바로 아래까지 추격하였다. 공포감에 사로잡진 여포가 그냥 항복하려고 하자 진궁(陳宮)이 나서서 그를 만류하는 한편 원술(袁術)에게 구원을 요청하도록 설득하였다. 겨우 제정신을 차린 여포였지만 재차 반격에 나서보았지만 연이어 패하고자나 이제는 오로지 성을 수비하는 데에만 힘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여포를 지원하러 오던 원술이 도중에 패하고는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결국 여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러 차례 조조가 하비성을 몰아붙여보아도 끝내 함락에는 실패하자 군사들도 지칠 대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방법이 없었던 조조는 부득이 회군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에 전장에 함께 와 있던 곽가가 순유(荀攸)와 함께 조조에게 현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제시하였다.
“여포는 머리는 나쁘지만 용맹한 게 강점인데, 지금껏 세 차례 모두 패한 이후 그 기세가 크게 꺾인 상태입니다. 군의 중심인 최고사령관이 흔들리면 군 전체의 사기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궁은 두뇌는 좋을 지 몰라도 전략이 부족하고 또 아직 여포는 제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오히려 공격력을 집중하여 급격히 몰아붙인다면 여포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주변 하천인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줄기를 하비성 방향으로 돌리고 둑을 무너뜨려 물줄기가 하비성을 덮치게 하는 작전이었다. 실제로 그 방법을 통해 조조군이 성을 통째로 물에 잠기도록 만들자, 성 안에서 수비만 하던 여포군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포 토벌전을 전개한 지 석 달만에 여포의 변심한 부장들이 진궁을 사로잡아 조조에게 투항해버렸다.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던 여포도 성벽보다 먼저 심리적 마지노선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스스로 나와 항복한 것이다.
조조 앞에 끌려나온 여포가 능글맞게 자신을 장군으로 삼아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옆에서 그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가 바로 이 당시 조조에게 기탁하고 있던 유비였다. 결국 조조는 여포를 처형시켰다. 다만 진궁의 경우에는 그의 효심을 인정하여 남은 가족만큼은 인도적으로 대우해주었다.
이상은 자칫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뻔한 것을 곽가의 적극적 설득으로 최종적으로 목표 달성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사례이다.
조조가 강력한 경쟁자 원소를 꺾고 《삼국지》의 주연으로 등극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서기 200년에 일어났다. 조조와 원소의 세력권 사이의 국경지대였던 관도(官渡)를 중심으로 일대 격전이 벌어져서 그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관도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중원의 패권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었던 만큼 조조도 원소도 모두 총력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게 이 관도대전이었다.
다만 문제는 뒤늦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조조가 북방에서 전통적으로 강자로 군림해온 원소에 비해 여러 모로 불리하였다는 점이었다. 군사력부터 보급량에 이르기까지 조조가 다 밀리고 있었지만, 심지어 지리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에도 원소는 배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상황인 데 반해 조조는 남부에 여전히 경쟁세력들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온갖 리스크에 둘러싸여 전쟁을 벌여야 하는 악조건이었다.

최전선에 전력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조조를 마음 졸이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강동의 강자 손책(孫策)이었다. 그는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전선을 구축하고 강동(江東) 지역, 곧 장강(長江, 일명 양쯔강)의 동쪽 연안을 전부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든 정력적인 정복자였다. 당대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미남자에 성격도 활발하였으며 사람을 좋아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는 매력적인 훈남이었다고 한다. 나이도 이때 26세로 젊음 덕분에 자신감 넘치는 리즈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사실 그의 타오르는 야망을 인지하고 있던 조조도 그를 포섭하기 위해 자신의 딸과 손책의 동생을 결혼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다하긴 했다. 하지만 손책은 젊긴 했어도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남북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던 조조가 마침 원소와의 대결을 위해 사실상 전군을 북쪽 황하(黃河)에 가까운 관도에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야심만만했던 그답게 장강 너머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 있던 조조의 본거지 허도(許都, Xǔ)를 공략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곳에는 이제는 이름뿐이긴 했지만 여전히 한나라 최고 권위의 상징인 마지막 황제 유협(劉協)이 머물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동향은 항상 배후의 움직임을 전장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던 조조에게도 빠르게 탐지되었다. 앞뒤로 강적을 맞게 되는 가장 우려하던 시나리오가 어느새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보고한 이가 다름 아닌 곽가였다. 그는 파격적이게도 단언컨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손책은 이제 막 강동을 병탄했을 뿐 본래 즉흥적인 성격에 무언가 미리 대비하는 일이 없는 위인입니다. 반면 그 과정에서 그에 의해 제거된 이들은 모두 강한 리더십을 갖추고 휘하의 마음을 얻은 이들이었습니다. 지금 손책은 강한 군대를 이끌고는 있다지만 성격상 주변 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탓에, 만일 원한을 가진 자객이 마음 먹고 접근하고자 한다면 손쉽게 타격을 입힐 수 있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손책은 분명 한 사람의 손에 죽을 공산이 큽니다.”
곽가의 생각은 파격 그 자체였다. All or Nothing, 마치 도박가의 올인 전략에 가까운 게 그의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즉 원소와의 결전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후방의 손책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손을 놓고 있어도 좋다는 선택과 집중의 극단적 전략이었다. 이는 마치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아 수익률을 극대화한다는 공격적 주식투자자의 행동에 버금가는 결정이었다. 아무리 종합적인 분석의 결과라고는 해도 상대방의 여러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해서 단 하나의 가능성에 나의 의사결정을 몰아버린 이때의 곽가의 모습은 모험가의 전형을 닮아 있다. 천재성을 보이는 이는 많지만 동시에 행동의 대범함까지 갖춘 이는 말 그대로 드물다. 곽가는 행동형 천재인 조조가 이끌릴 수밖에 없는 위험을 즐길 줄 아는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예언과도 같은 곽가의 분석은 소름돋게도 실제로 일어났다. 앞서 손책은 자신이 빼앗은 오군태수(吳郡太守) 자리의 전임자 허공(許貢)을 살해하였었는데, 그 휘하에 있던 인물에게 기습적으로 저격을 당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때 입은 상처가 매우 심각해서 백일 동안이나 몸저누워 있어야 했다고 하는데, 그러고도 회복되지 못하여 결국 일곱 살 터울의 동생 손권(孫權)을 후계자로 지명하고는 사망하고 만다.
손책의 때 이른 죽음 덕분에 조조는 후방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덜었고, 관도대전에 온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만일 곽가의 냉정한 현실 분석이 없었다면 조조도 부득이 양면전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승은 불가능했을 일이다.
원소 세력과의 대결에서의 곽가의 기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관도대전에서 패전한 원소는 결국 202년에 불운하게 생을 마감하였고, 그의 아들들이 이끄는 잔당에 대한 토벌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던 상황이었다. 조조의 휘하 장군들이 여세를 몰아 이 기회에 원담(袁譚)과 원상(袁尚) 형제를 아예 섬멸시켜버려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미래에 문제가 될 싹을 미연에 잘라내야 한다는 제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곽가는 생각이 달랐다.
“원소는 두 아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삼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여전히 두 형제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다가 함께 몰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강하게 압박하면 할수록 그들 형제는 힘을 합쳐 우리에게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공세를 풀어주면 그들은 다시 경쟁심에 서로 싸우게 될 게 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이 남쪽의 유표를 공격하고 있으면 됩니다. 상황 변화를 기다렸다가 그 순간 재차 공격에 나서면 저들은 더 쉽게 평정할 수가 있습니다.”
명민했던 조조는 곽가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실제로 그가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원담과 원상 형제는 아버지의 후계자라는 명분과 유산이라는 실리를 놓고 서로 전쟁에 돌입해 있었다. 곽가의 예측 그대로였다. 203년 8월, 최종적으로 형 원담은 동생 원상과의 경쟁에서 패하였고, 조조에게 항복과 함께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조는 전장에 복귀하여 원소의 중심지였던 업성(鄴城, Yè)을 공략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두 형제 모두 격파하고는 205년 봄 1월에 기주(冀州) 전체를 평정하였다. 이때의 공로로 곽가는 유양정후(洧陽亭侯)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제 곽가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일이 한 가지 남아 있다. 조조가 기주를 손에 넣을 당시 원담은 결국 제거되었지만, 원상 그리고 원소의 차남 원희(袁煕) 이 두 명은은 동북방 지역의 이민족인 오환(烏桓)에게로 달아난 바 있었다. 원소가 살아 있을 당시 그는 배후에 있던 오환족과 우호적 관계를 구축해두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환은 이후 원상 형제외 함께 여러 차례 유주(幽州, 오늘날 베이징 일대) 등 국경선 너머로 침공을 시도하였고, 조조는 문제의 근원 자체를 해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바로 그 유명한 조조의 “오환 정벌”의 시작이었다. 207년 초 조조가 오환 정벌을 선언하자 여러 장군들이 한결같이 만류하였다.
“원상은 일개 도망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오환족의 영토로 원정을 떠난다면 이때다 싶어 유비는 어떻게든 유표를 설득해 우리의 배후를 노릴 것입니다.”
하지만 곽가만은 조조의 원정 계획에 찬성표를 던졌다. 유표는 결코 유비를 믿지 않을 것이기에 문제 없다는 게 그 논리였다. 앞서 원소와의 관도대전 때 손책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았을 때의 모험가적 기질이 또 발동된 것이었다.
“명공께서는 지금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계시지만 이민족은 자신들이 멀리 있다는 것을 믿고 외침에 대한 대비를 분명 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틈을 타 급습에 성공만 한다면 완전히 섬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원소는 항상 그들과 우호적으로 지냈으며, 심지어 원상 형제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획득한 이곳 기주는 공의 위세 때문에 숨죽이고 따르고 있지만 아직 마음까지 복속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원상을 남겨둔 채 남정을 떠난다면, 그는 다시 옛 신하들을 불러모으는 한편으로 동시에 중원에 대한 야욕을 가진 오환족의 도움까지 받아 함께 행동할 것입니다. 그가 만일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면 아마도 북부 지역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에 반해 유표는 그저 말뿐인 인간이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유비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에게 결코 중임을 맡길 수도,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처지입니다. 즉 공께서 굳이 나라를 비워두고 원정을 떠나신다 하더라도 조금도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역시나 곽가의 선견지명대로 이후 조조가 원정을 나가 있는 동안 유표 그리고 유비는 조조의 배후에서 전혀 적대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 사이 조조는 본격적으로 오환의 본토 침공을 준비하였다. 이때도 곽가는 진언을 멈추지 않았다.
“용병에서는 신속함을 가장 중요시 여깁니다. 급습을 위해 이제 먼 거리를 행군해야 하는데, 군수품이 너무 많아 전략상의 이점이 없어질까 걱정입니다. 적들이 우리 공격에 대한 첩보를 얻으면 당연히 대비에 나설 텐데, 차라리 지금은 군수품보다는 경무장으로 신속한 기동을 통해 저들이 미처 생각치 못한 순간에 공격을 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연히 그의 말이 옳았다. 동북방 지역의 험난한 지형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중원 출신의 조조로서는 전혀 겪어보지 못한 온갖 난관을 다 겪으면서, 도중에 현지인의 조력까지 받아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루트를 뚫어가며 진군한 끝에 유성(柳城, 오늘날 랴오닝성 차오양시)의 오환 본거지를 직접 타격할 수 있었다.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이다. 조조는 오환의 대군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는, 오환의 왕을 참수하고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새로 손에 넣게 되었다. 다만 이때 원상, 원희 형제는 운좋게 빠져나가 사실상 독립국으로 변경에서 군림하고 있던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그러자 이 기회에 요동까지 정벌하여 원상 형제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조조는 이때만큼은 반대의견을 명확히 했다.
“나는 이제 공손강에게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내오도록 할 작정이오.”
그리고는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였다. 조조의 말마따나 얼마 후 공손강은 원상과 원희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내왔다. 놀란 장군들이 조조에게 물었다.
“명공께서 중간에 이렇게 돌아오셨는데 어째서 공손강은 이 둘의 머리를 베어 보내온 것일까요?”
“공손강은 평소 원상 등을 견제해왔지만, 만일 내가 급히 공격을 하면 그들은 힘을 합쳤을 것이네. 그래서 공격을 미루고 그들끼리 다시 서로 싸우게 만들었던 것이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다만 조조는 자신의 예측이 들어맞은 이 결과에 기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이해에 38세였던 곽가는 험난했던 전장으로부터 복귀한 그때 대신 큰 병을 얻고 말았다. 조조가 직접 문병도 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쏟았지만,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운명은 여기까지였던 듯했다. 207년 말 아직도 많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남긴 채 곽가는 눈을 감았다.
인생을 더 오래 산 조조만큼이나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과 때때로 사안을 다르게 바라보고 역발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던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고 있던 젊은 인재의 짧다면 짧은 생애였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 이후 조조의 위왕국 그리고 조비의 위제국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변화가 가능하지 않았었을까 하는 가정 섞인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조조가 천재 책사 곽가를 잃은 207년 그 해에 유비는 또 다른 젊은 천재 제갈량을 얻는다. 이후 조조는 더 이상 파격적인 승리를 거두는 일이 없었지만, 유비는 형주에 이어 촉 지역을 석권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그저 한 명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으나 어찌 되었든 천재적인 인간이 기여할 수 있는 최대치의 공로가 어떠한 격차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운명의 장난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조조가 요절한 곽가에 대해 마음 속으로 지니고 있던 생각들이 여럿 기록으로 남아 있다. 우선 그의 장례식 후에 황제에게 올린 문서에서 곽가를 평가한 부분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중대한 사안마다 적에 대항하여 변화에 잘 대처했습니다. 제가 전략을 고민할 때에도 그는 능숙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 데 있어 그가 기여한 바가 상당합니다. 안타깝게도 생명이 일찍 다하여 성과를 끝까지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곽가의 활약을 되짚어본다면 그는 진정 위인이었습니다.”
나중에 적벽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고 돌아왔을 때에도 조조는 곽가를 떠올리며 한탄을 하였다.
“곽가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곽가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고 또 낭비벽도 좀 있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고발을 당한 적도 있었는데, 그래도 곽가는 스스로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인재를 씀에 있어 단점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장점만 보았던 조조에게는 딱히 이 또한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곽가에 대한 그의 중용은 계속되었다.
평상시 조조가 곽가에 대해 하던 말을 끝으로 적어둔다.
“오직 곽가만이 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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