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천재들

제2의 제갈량을 꿈꾼 강유(姜維)

위클리 히스토리 2026. 1. 19. 12:03
문무를 겸비하고 있고 공명을 세우고자 함이 투철했다.

 

 

   228년 봄,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諸葛亮, Zhūgě Liàng)은 당대의 초강대국 위나라를 상대로 첫 북벌에 착수하였다. 당초 위나라에서는 촉나라 하면 유비만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가 죽고나서 수년 동안 양국간 평화가 이어져 오고 있던 중 제갈량이라는 그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인물이 이끄는 촉의 대군이 진군해 오고 있다는 것은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그 당시 표현으로는 관중(關中) 일대를 뒤흔들었다고 할 만큼의 이슈였는데, 실제로 위나라 최전방의 3군(郡), 즉 남안군, 안정군, 그리고 천수군의 여러 현들이 두려움에 급박하게 촉나라에 귀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마침 이 당시 천수(天水, Tiānshuǐ)태수 마준(馬遵)은 공조 양서(梁緖), 주부 윤상(尹賞), 주기 양건(梁虔), 그리고 참군 강유(姜維, Jiāng Wéi, 202~264)을 대동하여 옹주자사 곽회(郭淮)를 수행하면서 현지 순찰을 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기산 침공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이은 관할 하의 현들의 배반 소식에 크게 놀란 곽회는 혹여나 자신을 수행하는 이들도 이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에 빠져 한밤중에 몰래 본거지인 상규(上邽, Shàngguī)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뿐만 아니라 마준도 원래는 본청이 있던 기현(冀縣)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이미 평정심을 잃은 마당이어서 황급히 곽회를 뒤쫒아가고자 했다. 강유가 기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해보았지만 이성이 아닌 공포라는 감정에 휘둘리고 있던 마준 입장에서는은 만에 하나 이들도 혹 다른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행원들조차 믿지 못하고 따로 행동하였다.

 

   강유를 비롯해 남겨진 이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태수가 혼자 달아난 것을 보고는, 이제는 기현으로 돌아가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결국 물리적으로 퇴로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사항전 외에는 오직 투항뿐이었다. 그리고 이때 강유는 고향 기현을 위해 고심 끝에 후자를 선택하였다. 그렇게 촉군 진영을 찾아간 27세의 젊은 강유를 만나보고는 제갈량이 그의 담력과 지략에 감탄하였던 것이 곧 강유가 제갈량에게 합류하게 된 계기였다. 가뜩이나 촉나라의 인재 부족으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던 당시 48세의 제갈량에게는 우연찮게 자신의 뒤를 이을 새로운 인재를 스카웃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소득이었을 것이다.

 

제갈량의 1,2차 북벌 - Wikipedia


   강유의 아버지 강경(姜冏)은 원래 천수군의 공조(功曹)라는 직책의 관리였는데, 주로 하는 일은 공적의 기록과 평가 등이었다. 한 번은 강족 등이 천수군을 공격해 왔을 때 전장에서 태수를 보호하다가 전사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아들 강유가 태수에게 중랑(中郞)으로 발탁되어 천수군에서 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강유는 무관보다는 문관의 길을 더 원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그가 존경한 이도 정현(鄭玄, 127~200)이라는 당대의 저명한 학자였고, 관직에서도 군의 상계연(上計掾, 태수 휘하로 정부에 각종 보고를 하는 직책)을 거쳐 더 진급하여 주의 종사(從事)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어쨌든 그가 제갈량에게 투항하던 당시, 위나라의 후속군을 이끌고 오는 장합(張郃, Zhāng Hé)에 대응하기 위해 제갈량은 마속(馬謖, Mǎ Sù)을 가정(街亭, Jiētíng)에 투입시켰다. 하지만 제갈량의 기대가 무색하게 마속이 어이없게 참패하고 나자 제갈량은 서현(西縣)을 함락시킨 이후 투항한 이들을 대동하여 부득이 촉나라로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제갈량과 함께 가게 된 강유는 아버지 사후 홀로 된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위나라의 고향에 두고 떠나오게 되었다. 위나라군은 촉나라군이 퇴각한 다음 기현까지 되찾고는 강유의 어머니와 남은 가족 모두를 사로잡았는데, 강유 입장에서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이들은 처형당하지 않고 수용소에 갇히는 선에서 마무리지어졌다.

 

   제갈량은 기대해왔던 마속을 잃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북벌도 무위로 돌아가게 된 마당에, 그래도 강유라는 새로운 젊은 인재를 확보하게 된 것만은 행운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아직 20대에 불과했던 그를 창조연(倉曹掾), 봉의장군(奉義将軍), 당양정후(當陽亭侯)로 삼았다. 제갈량이 강유를 평가한 내용이 아직 남아 있다.

 

   “그는 매사에 충실하고 부지런하며 생각이 치밀하고, 그의 재능을 평가해본다면 그는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일 것입니다.”
   “병법에 능하고 뜻과 열정이 있으며 또 군사들의 마음까지 이해할 줄 압니다. 이 사람의 재능은 보통을 넘어서니 추후에 군주를 모시고 중앙에서 일할 만하겠습니다.”

 

   강유를 이만큼이나 알아봐준 제갈량도 6년 후인 234년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강유에게 좀 더 경력의 길이 빨리 열리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때 촉나라의 수도 성도(成都, Chéngdū)로 돌아와서는 우감군(右監軍), 보한장군(輔漢将軍), 평양후(平襄侯)까지 오르게 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 때의 일이다.

 

   그 이후 그의 관운은 계속되었다. 238년 제갈량 사후 그의 후임이 되었던 대장군 장완(蔣琬)이 대사마로 승진하였을 때 강유는 사마가 되었고, 243년에는 진서대장군에 양주자사를 겸하게 되었으며, 247년에는 위장군에 녹상서사로 승진하였다. 장완마저 세상을 떠난 후에 차기 실세가 되었던 대장군 비의(費禕) 다음 가는 수준에 오른 것이다.

 

   그 사이에도 강유는 규모는 작았지만 자주 대외원정에 나섰는데, 이는 자기 자신이 중원보다도 서부 출신이기도 하여 지역에 대한 지식과 경험도 풍부하고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넘쳤기에 서쪽 이민족들을 끌어들여 우군화함으로써 위나라의 한쪽을 끊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대규모 출병을 원했었지만 정권의 실세인 비의가 누차 가로막았기에 실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는 1만 명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큰 공적을 올리기에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했고 간혹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지 못하고 패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언뜻 보면 능력 있는 부하에 대한 상관의 시기질투로 볼 여지도 물론 없지 않지만, 굳이 대신 변명을 해보자면 제갈량의 후임자들인 장완부터 비의까지는 기본적인 국정운영의 기조가 제갈량의 정책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워낙에 큰산과도 같았던 촉나라의 실질적인 건국자 제갈량이 튼실하게 구축해놓은 국가의 운영 체계를 개국 초기부터 크게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절명의 숙제를 이어받았던 만큼, 이들에게는 신생 약소국 촉나라의 장기적인 터전을 갈고닦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우선순위를 높게 둔 것이 국정 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거국적인 총동원을 통한 리스크 테이킹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는 점을 그들은 분명히 했다. 그렇기에 당시 역사가의 이들에 대한 평가는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제갈량이 정한 대로 따를 뿐 새롭게 고치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나라는 안정화되어 평화롭게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소국을 다스릴 때에 국한된 것이었다. 강유의 노선은 이들과 확연히 달랐다. 그의 입장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작은 영역에 국한되어 국가 안정화만 부르짖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강유의 생각에 제갈량의 유지는 국가의 안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가 생전에 북벌을 추진하면서 보여주었던 대외확장을 통한 삼국통일에 있다고 본 것이다. 굳이 오늘날 표현을 빌자면 비둘기파와 매파 중에서 강유는 매파에 가까웠다.

 

   그리고 시간은 결국엔 선배뻘인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젊었던 강유의 편이었다. 253년 봄 1월 비의가 갑자기 칼에 찔려 죽는 불상사가 발생하였고, 자연스럽게 정국은 강유가 추구하던 노선대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렇게 어느덧 52세가 된 강유는 그해 여름 4월에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드디어 위나라 공격에 나섰다. 야심차게 준비한 첫 타겟은 남안(南安)이었지만 옹주자사 진태(陳泰)의 저항에 직면에 결국 군량 소진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 여름 6월에 곧바로 다시 농산(隴山, Lǒngshān)으로 출병하자 그곳 중 적도현(狄道縣)이 먼저 투항해 왔고, 나아가 양무(襄武)까지 함락시켰다. 위나라군이 패퇴하자 강유는 승세를 몰아 진격하여 많은 성들과 적도 및 하관(河關), 임조(臨洮) 세 현의 백성들을 탈취해오는 데 성공하였다.

 

   255년 여름에 또 다시 앞서 위나라에서 망명해온 거기장군 하후패(夏侯霸)와 함께 재차 출진하여, 조수(洮水) 서쪽으로 위나라의 옹주자사 왕경(王經)과 싸워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 당시 왕경측의 전사자 수가 무려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왕경이 물러나 적도성(狄道城)에서 방어에 들어가자 강유가 성을 포위하였는데, 위나라 지원군이 도착하자 결국 강유는 다시 한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  봄 강유는 드디어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비의 사후 본인이 그렇게 원하던 대로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한 이후 얻은 성과를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그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하였다.

 

   강유는 처음에 기산 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불운하게도 당시 위나라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최고의 카드를 미리 준비시켜 두고 있었다. 위나라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 정식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촉나라와의 국경지대 방비를 맡게 된 등애(鄧艾, Dèng Ài, 195?~264)는 이미 촉군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등애는 앞서 강유가 위군을 상대로 소규모 병력으로 작전을 펼칠 때에도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었던 숙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위나라의 동향을 접한 강유는 부득이 우회하여 남안으로 진군했지만, 등애는 계속해서 강유와 요충지를 다투며 강력하게 대응해왔다. 강유는 등애를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한밤중에 위하(渭河)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 상규로 달려갔다. 그에게는 사실 진서장군 호제(胡濟)와의 공동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치명적인 문제는, 계획대로 호제가 제때에 상규에 도착하지 못 했다는 점이었다. 강유는 어쩔 수 없이 단독으로 숙적 등애와 단곡(段谷)에서 교전에 돌입했다. 결과는 그의 대패였다.

 

   가을 8월 패장 강유는 가까스로 성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전사자는 넘쳐났다. 촉군의 장수급 인재만 10여 명이 사망한 크나큰 패배였다. 겨우 살아돌아온 병사들 입장에서는 이번 실패에 대한 원인을 누군가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대상은 총사령관이었던 강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장이었던 농서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상황은 매우 안 좋아졌다. 결국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강유도 선택을 해야 했다. 스스로 잘못을 사과하고 관직 삭탈을 자청한 것이다.

 

   하지만 몸을 웅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유에게는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그 시작은 위나라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위나라의 정동대장군 제갈탄(諸葛誕)은 오나라의 제갈근, 촉나라의 제갈량과 사촌뻘이었다. 당대에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제갈씨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위나라의 공신이기도 했고 그 다음 사마의와도 관계가 괜찮았지만, 문제는 그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실세로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그의 반대파와 개인적으로 친밀했기에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졌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심적으로 궁지에 몰려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쿠데타였다. 257년 5월의 일이었다.

 

   상대방의 위기는 곧 나에게 기회가 되는 법이다. 제갈탄은 당시 오나라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위나라는 쿠데타군 토벌을 위해 중앙군 외에 각 지방군까지 긁어모아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은 촉나라와의 국경지역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제갈탄의 쿠데타 장소와 거리가 멀었던 촉나라의 강유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강유는 그 틈을 타서 진천(秦川)을 목표로 하여 또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駱谷)을 출발해 곧장 심령(沈嶺)에 이르렀다. 그때 심령 북쪽의 위나라측 장성(長城)에는 군량미가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지만 수비군이 적어서 강유군의 침공 소식에 다들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이 당시 장성은 사마의의 조카였던 대장군 사마망(司馬望)이 지키고 있었는데, 농우에 있던 등애도 급히 장성으로 달려와 수비진에 합류했다. 강유는 전진하여 망수(芒水)에 주둔하면서 산쪽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사마망 그리고 등애는 오로지 방어에만 몰두하였다. 강유가 여러 차례 도발해보았지만 이들은 결코 대응하지 않았다. 등애 입장에서는 제갈탄의 쿠데타라는 예기치 못하게 불거진 이벤트는 결국 시간이 자연스레 해결해줄 것이란 판단이 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별 소득 없이 대치만 이어가는 동안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인 258년 2월, 강유에게 모처럼 찾아왔던 천재일우의 기회는 안타깝게도 봄철에 눈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강유로서는 많이 아쉬웠지만 제갈탄의 몰락 소식을 듣고는 부득이 성도로 퇴각을 해야 했다. 그래도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부 차원에서의 재신임을 얻어 공식적으로 대장군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그간 끊임없이 직접 북벌을 추진해왔지만 어느 순간 그에 대한 한계를 느낀 것인지 혹은 촉나라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것인지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이제는 한 번 내실을 다질 때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가 모처럼 시간을 들여 한 일은 촉나라의 국방체계를 근본부터 개혁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국방체계는 요약해서 말하자면, 한중(漢中, Hànzhōng)을 중심으로 각 성에 방어병력을 충실히 배치해 두고는, 만일 적군이 침공해 오는 경우 성마다 자체적으로 치밀한 방어를 담당하고 동시에 독립적인 지원부대를 운영하여 각 공격받는 지역들을 긴급히 지원하는 방식으로 다층적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개별 방어거점으로서의 점과 점을 모아서 튼실한 면을 완성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통해 방어망 속에 적군을 가둬두고 시간을 벌면서 중앙군의 파병을 통해 한꺼번에 적군을 몰아낸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략 방향이었다.

 

성도(왼쪽)와 한중(오른쪽)


   실제로 244년 위나라의 대장군 조상이 10여 만 명의 병력으로 침공해 왔을 때 방어가 어려운 지역들은 부득이 포기하고 전략적 진지에만 병력을 집중하여 대적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처럼 점과 면의 전략으로 양보 없는 적극적 방어전략을 고수할 것인지 선택이 필요했을 때, 결국 후자의 방식으로 위나라군을 붙잡아둔 상태에서 전국적인 병력 지원을 통해 몰아낸 성공 케이스가 존재했다.

 

   이미 검증되어 있는 이 네트워크형 방어체계를 강유는 과감히 ‘선택과 집중(Selection and Concentration)’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방어하는 방식은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대에는 분명 효과가 있지만 대승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상되는 적군의 진격 시점에 맞춰 각 진영마다 모든 병력과 보급을 한성과 낙성(樂城)의 두 곳으로 집결시킴으로써, 적군이 아군 영토 내로 진입한다 하더라도 방어력을 극대화한 요충지에서 이들을 막아내는 방식이 더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대를 집중 투입해 그들의 약한 고리를 끊어낼 수도 있고, 적군이 우리의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본진을 공격해오더라도 결코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며, 이들 입장에서는 현지 조달이 가능한 식량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저 멀리 본국에서 원거리 수송을 해와야 하기 때문에 보급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적군이 결국 퇴각하는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아군이 집중 공격을 가하고 또 여러 유격대가 동시다발적으로 타격을 할 시 적군을 섬멸시키는 일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의 계획은 최종 실행되었다. 이에 따라 각 장군들도 재배치가 이루어졌으며, 낙성과 한성의 2대 거점에는 주력을 배치하고 또 주요 요충지마다 수비군을 새로 구성하였다. 이때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지는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수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262년 강유는 모처럼 몸을 풀고는 후화(侯和) 방면으로 출진하였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등애가 반격에 나서 강유는 또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어느덧 이 해에 환갑도 지난 만큼 아무래도 현장 감각이 점차 쇠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날과 달리 평균 수명이 짧았던 사회였음을 감안해야 하니까 말이다.

 

   아무리 강직한 인물이어도 허약해 보이는 순간 그 약점을 파고들고자 하는 인간은 어느 사회에나 있는 법이다. 촉나라 정권 내에도 당연히 그런 인물군상이 존재했다. 바로 군사적 경쟁상대인 우대장군 염우(閻宇), 그리고 정치적 반대파인 환관 황호(黃皓)가 그들이었다. 특히 황호의 경우 258년 강유가 대장군으로 복직하였을 무렵 정권의 실세로 올라선 인물이었는데, 강유를 견제하여 정치적 파트너였던 염우를 대신 군의 실세로 올리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강유 또한 그런 동향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유선(劉禪, 207~271, 재위 223~263)에게 황호의 숙청을 보고하기도 했었지만, 이미 무능하기로 유명했던 황제는 황호의 편이 되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강유는 수도인 성도를 벗어나 군 주둔지인 답중(沓中)에 머물렀다. 꼴사나운 정치판은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리였던 것일까.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당장의 소나기는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밖에서 몰려오고 있는 쓰나미의 파국은 결코 피할 길이 없었다. 263년 어느 날 강유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근래에 종회가 관중에서 군사 훈련을 하면서 우리 나라를 공격해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장익(張翼)과 요화(廖化)에게 군 지휘를 맡겨 미리 방비를 시키시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강유와 다섯 살 터울이던 유선은 17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로 등극하여 무려 40년 동안이나 제위를 무탈하게 지켜온 만큼 그리 심각한 걱정은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물론 배후에는 환관 황호가 이 와중에도 정적 강유를 견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술수도 작동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렇게 골든타임을 놓치고는 위나라 정벌군이 파죽지세로 국경선을 넘어 들이닥치고 나서야 정부는 뒤늦은 대처에 뛰어들었다.

 

촉나라의 멸망 - Wikipedia


   당시 위나라 정벌군의 구성은 이러했다.

 

  • 대장군 사마소 : 본국 총지휘관
  • 정서장군 등애 : 답중 방면(임무는 강유와의 교전), 3만여 명
  • 옹주자사 제갈서 : 교두 방면(임무는 강유의 퇴로 차단), 3만여 명
  • 진서장군 종회 : 10만여 명

 

   이 중 등애는 강유를 정면에서 공격하고, 제갈서(諸葛緒, Zhūgě Xù)는 강유의 퇴로를 끊는 게 공식적인 역할이었던 만큼 당시 위나라군이 촉나라의 정벌에 있어 얼마나 강유라는 존재를 신경썼는지 알 수가 있다.

 

   어쨌든 강유는 답중에서 요화의 지원을 받아 등애 휘하의 장수들과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또 다른 루트로 종회가 한중까지 진입하였다는 소식에 최전선에서 서둘러 퇴각하였는데, 등애 휘하의 양흔에게 추격을 당했다. 그렇게 달아나던 중 제갈서가 교두(橋頭)에 주둔하면서 자신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마치 제갈서의 후방을 급습할 것처럼 일부러 행동을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 지리에 자신이 없었을 수밖에 없는 제갈서는 강유의 갑작스런 동향에 놀라 혹여나 정말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10여 킬로미터 물러났는데, 이를 틈타 강유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교두를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제갈서가 뒤늦게 이를 알아채고는 다시 퇴로 차단에 나섰지만 하루 차이로 강유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동시간대에 종회(鍾會, Zhōng Huì, 225~264)는 한중 공략에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촉나라 방위군은 강유가 개혁한 방어체계대로 대응을 하고 있었다. 즉 소규모 보루들은 포기하고 한성과 낙성의 두 곳으로 전력을 집중하는 전략대로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두 성에 모인 병력은 각각 5천 명씩이었고, 종회가 이 두 성을 포위하는 데 배정한 병력은 그 두 배인 1만 명씩이었다. 또한 촉군의 요충지 중 한 곳인 관성(關城)은 종회의 휘하 장수에 의해 함락되어 군량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이렇게 강유가 수립하였던 방어전략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방어력을 집중한다는 취지는 적군 입장에서는 그곳만 차단하면 그만인 셈이어서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기존 방식에서는 방어거점이 점점이 분산되어 있어서 공격측 입장에서는 어느 곳 하나 방치하고 지나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두 하나하나 점령하기에는 온갖 지원부대들의 훼방까지 감안하면 공격측의 끊임없는 소모전을 유발하게 된다는 게 장점이었는데, 강유의 모든 계란을 두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방식은 둘 다 떨어뜨리는 순간 모두 깨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명확해지게 된 것이었다.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없다. 각 상황에 좀 더 적합한 답만 존재할 따름이다. 언제나 그렇듯 결과가 결국 의도부터 과정까지 모두 정당화시켜주는 법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강유의 실패는 곧 촉나라의 실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강유는 답중에서 퇴각하는 데 성공한 이후 병력들을 좀 더 모아서 관성에서 2차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도중에 관성이 위나라군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 검각(劍閣)에 방어진을 마련하였다. 현실적인 목표는 종회의 곧 이어질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토록 혼란한 상황 속에서 등애와 종회는 누가 먼저 촉나라의 수도 성도를 함락시키느냐 하는 경쟁에 돌입했다. 이제 이 당시 일흔이 다 된 등애와 39세의 젊은 종회의 경쟁이었다. 침공군을 이끄는 세 장군 중 제갈서는 본 경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는데, 그의 미션은 원래 강유를 저지하는 것이었을 뿐 그 이상의 진군은 명령받은 내용이 아니었지만,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종회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심가였던 종회는 제갈서가 아니라 그의 병력만 탐이 났기에, 음모를 꾸며 그를 전장에서 쫒아내고는 그대로 부대를 통합해버렸다. 그렇게 대규모 군대를 확보한 종회는 검각을 공격했으나 강유의 촉군은 의외로 강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것이다. 종회도 결국 여기에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종회와 강유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등애는 겨울 10월 산에 길을 뚫고 계곡에 다리를 놓는 식으로 무려 300 킬로미터에 달하는 기존에 없던 길을 만들어 성도를 기습하는 작전을 전격적으로 추진하였다. 등애가 직접 말한 적이 있듯이 병법서의 “적이 미처 방어하지 못하는 곳을 공격하라”는 격언대로 한 것이다. 당연히 이 험난한 작업에는 온갖 난관이 따랐다. 길이 험하니 식량 수송에도 어려움을 겪었고, 절벽을 기어오르고 끈 하나에 의지해 산기슭을 내려가는 것은 예사였다. 그렇게 힘들게 진격하여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길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도에 접근할 수 있었다.

 

   촉나라군도 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격하러 나서긴 하였으나, 이미 등애의 군대는 그 지옥의 길을 거치며 최정예가 되어 있었다. 이때 제갈량의 아들인 위장군 제갈첨(諸葛瞻, 227~263)이 촉나라의 마지막 저항을 진두지휘하다가 37세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촉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유선은 태자와 제왕 그리고 신하들 60여 명을 이끌고 등애에게 항복하였다. 그렇게 성도에 1등으로 도착한 공은 노익장을 과시한 등애의 몫이 되었다.

 

   강유는 제갈첨의 패전 소식까지 전해듣고는 이제는 최종 판단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성도로부터 황제 유선의 항복 명령을 받아든 그는 장익, 요화, 동궐(董厥) 등의 장군들 그리고 총 4~5만 명에 이르는 병력들과 함께 끈질기게 추격해오던 종회에게 투항하였다. 장군들은 분개하였지만 황제 자신이 항복한 마당에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62세의 강유 앞에서 39세의 종회는 예의를 갖추었다. 단순히 나이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를 존중하였고, 중원의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뛰어나다는 평을 따로 하기도 하였었다. 그래서 같이 수레를 타고 앉을 때도 동급으로 자리에 앉도록 배려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휘하 군사들이 촉나라인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못하도록 규율을 통제하였고 스스로 겸손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촉나라 관리들과도 별도로 친분을 쌓았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한편 등애에게 선두를 빼앗긴 현 상황에서 역전을 하기 위해서는 최고 실력자를 포함해 현지인들을 자기 편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본능적 감각으로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해 12월 점령군으로서의 등애는 종회와 달리 어깨에 힘이 들어간 자세를 취했다. 위나라 정부에 보고를 한 내용의 톤을 보면 당대의 권력자 사마소가 우려할 정도였다. 이는 결국 2등 종회에게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자연스럽게 등애의 모반 위험성을 비밀리에 보고한 것이 주효해서 등애는 결국 본국으로 압송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강유를 등에 업은 종회의 순간이 왔다.

 

   사실 모반의 위험성은 등애보다는 종회가 더 높았다. 실제로 오랫동안 촉나라군을 괴롭힌 것도 등애였고, 이번 촉나라 정벌전에서 수도 함락이라는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도 등애였는데, 이대로면 모든 공을 등애에게 빼앗기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종회였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2등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2등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1등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통했다. 종회로서는 고작 3만 명을 거느린 등애보다 무려 13만 명을 통솔하고 있는 자신이 더욱 큰 인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촉나라 최고의 장군은 자진해서 자신에게 투항해왔는데, 심지어 5만 명에 달하는 병력까지 함께 자신의 수하에 들어오게 된 셈이었다. 위나라 중앙정부에서 바라봤을 때 과연 등애와 종회 중 누가 더 위험한 인물로 비쳐졌을까?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어차피 구워삶아질 운명이다. 기왕이면 작은 개보다는 큰 개가 더 위험할 게 분명했다.

 

   강유가 직접 종회에게 등애의 제거부터 수도 장안으로 진격하는 쿠데타의 실행방안까지 귀띔해주었는지는 오늘날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종회가 반역의 기치를 높이 들었을 때 강유를 선봉으로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게 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곧 쿠데타 계획에 강유가 깊이 개입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여기서 추론해볼 수 있는 부분은 애국자 강유가 뒤늦게 배신자가 되었다기보다는 위나라 장군들을 이간질시킴으로써 점령군을 자중지란에 빠트림으로써 일말의 촉나라 재건의 기회를 찾고자 하였다고 보는 편이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가 항복한 것도 굳이 따져보자면 사실 황제 유선의 직접적인 명령 때문이었지 판세가 뒤집어졌으니 자기 혼자 살겠다고 두 손 들고 투항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은 《자치통감》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강유는 종회를 부추겨 위니라 장수들을 죽이게 하고 자신이 다시 기회를 잡아 그를 죽인 다음 위나라 군사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근거로 강유가 유선에게 보낸 밀서를 들고 있다.

 

   “폐하께서 며칠만 치욕을 이겨내신다면 제가 이 재난상황에서 국가를 구해내겠습니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자면 강유의 선의는 분명해 보인다. 역시 끝까지 그는 스스로 선택한 조국을 향한 일편단심 애국자였던 것이다.

 

   다만 예기치 않았던 문제는 종회라는 인물 본인에게 있었다. 264년 1월 15일 성도에 들어온 종회는 등애의 압송을 조치하고는 미리 계획한 대로 다음날 곧바로 쿠데타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명분을 삼기 위한 국서 위조부터 그의 적절한 연기까지는 대략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지만, 결정적으로 간부들과 병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강유가 종회에게 쿠데타의 성공을 위해서는 장수들부터 처단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는데 그 소문이 어쩌다 흘러나간 것이다. 18일 정오에 위나라 군사들은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우발적으로 집단폭동을 일으켰다. 미처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에서 종회 그리고 그의 가까이에 있었던 강유는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의 와중에 휩쓸려 죽임을 당했다. 어떠한 구체적인 성과도 없이 끝나버린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그렇게 강유의 죽음과 함께 촉나라는 최종적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촉나라(Shǔ)의 마지막 영토(262년) - Wikipedia

 

   여기서 동시대에 촉나라 조정에서 직접 강유를 접했던 이의 솔직한 평을 한번 들어보자.

 

   “강유는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누추한 집에 살 만큼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옷이든 음식이든 필요한 만큼만 살 뿐 결코 사치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살아온 까닭은 다른 이들보다 더 도덕적이기 위해서 혹은 스스로 욕망을 억누르기 위한 부단한 노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생활에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강유처럼 배움을 즐기면서 부지런하고 청렴하면서 절약할 줄 아는 이는 분명 이 시대의 모범일 것입니다.”

 

   그를 극찬한 내용에 이어 이번에는 공정하게 《삼국지》를 지은 진수의 냉철한 평을 들어볼 차례이다.

 

   “강유는 문무를 갖추고 있으면서 또한 공명을 세우고자 뜻이 있었지만, 병사들을 중히 여기지 않고 군사력을 허비하였으며, 결단력은 있었지만 치밀함이 부족하였기에 끝내 죽음에 이르고야 말았다. 《노자》에서는 ‘큰 나라를 통치하는 일은 작은 물고기를 조리하듯 해야 한다(治大國若烹小鮮)’고 하였는데, 작은 나라에서 그토록 계속 일을 벌였으니 어쩌겠는가?”

 

   원래 적국이었던 위나라 출신이었지만 제갈량에게 운 좋게 발탁되어 출세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점부터 남달랐지만, 그 이후에도 스스로 몸가짐을 철저히 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촉나라 정부의 핵심으로 떠올라 특히 대외정책에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 사실은 확실히 그의 뛰어난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커리어는 제갈량의 기존 국정 설계안을 철저히 지키는 쪽이었던 장완과 비의와는 달리 제갈량의 노선에서 대외 확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졌다. 그런 측면에서는 제갈량의 진정한 후계자는 장완이나 비의가 아니라 강유쪽이 더 적합해 보인다.

 

   다만 그가 가지는 궁극적인 한계는 그는 결국 제갈량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소위 융중대(隆中策)라고 부르는 천하 삼분지계와 같은 대전략이 강유에게는 부족했다. 제갈량은 내치부터 국방까지 두루 가능한 만능형 인재였지만, 강유는 개인적으로 학자적 자질은 갖추고 있었는지 몰라도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에 치중된 군사활동가적 측면이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의도나 과정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떠나 결과론적인 성과만 놓고 보자면, 끊임없는 대외활동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결국 없다는 점이 그가 갖는 한계이자 비극을 말해준다. 심지어 국방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위나라의 대군이 밀어닥쳤을 때에는 그가 계획한 대로 방어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우왕좌왕한 끝에 중앙정부가 허무하게 항복해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다만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무너져내리기 직전의 촉군을 끌어모아 위나라의 정예군과 맞서 싸워 기어코 이겨내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군 지휘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과 또 깊은 애국심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