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년은 신라의 역사에서도, 아니 한국사 전체적으로도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던 해이다. 이때 발생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을 계기로 천년왕국 신라는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해이기도 하고, 50년 가까이 난세를 맞이하였던 후삼국시대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해를 기점으로 무려 7년 간을 최치원은 지옥같은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역설적으로 이때 등장한 영웅들만 해도 수도 없다. 대표적으로 태봉국의 궁예(弓裔)와 그의 뒤를 이은 고려의 건국자 태조 왕건(王建)이 있고, 또 오늘 다룰 인물인 후백제의 견훤(甄萱)도 그 중 한 명이다.
안타깝게도 중세 이전의 역사기록들이 왠만하면 다 그러하지만, 한 시대를 풍비하였던 이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이들의 등장 배경부터 기록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누구는 왕의 불우한 서자라고 하고 누구는 용의 자손이라는 식으로 설화 수준의 가계도 정도가 남아 있는 기록의 전부이다.
견훤도 마찬가지이다.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영웅적 설화는 물론 지렁이의 자식이라는 황당한 설화까지 그 수준도 가지각색이다. (견훤의 당시 발음은 '진훤'이었는데, 그래서 지렁이라는 발음과의 연관성도 있는 모양이다) 그의 집안을 신라 진흥왕까지 이어붙이는 경우도 있지만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그의 집안을 가장 현실적으로 설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중략)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제 스스로의 힘으로 살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견훤이 태어나 아기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 어머니가 그에게 식사를 날라 주었다. (후략)
즉 오늘날 경상북도 문경시 인근 어딘가에서 견훤은 지역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설화를 걷어내고 보면 그 끝이 창대했던 한 명의 영웅이라도 그 시작은 미약한 법이다. 시대가 난세였기에 혹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평범하게 살다 떠났을 인물도 장성하여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비견할 만한 인물로는 궁예를 꼽을 수 있다. 평범한 인물이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두 가지 길로 종교와 군대를 드는데, 원래 이름이 법명으로 선종(善宗)이기도 했던 궁예가 전자의 사례라면 후자의 대표주자는 바로 견훤이었다.
867년생인 견훤이 군에 입대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다만 추정은 가능한데, 당시 사회에서 처음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인 15세에 스스로 이름을 정하였다는 기록을 참고하자면, 그는 881년경에 스스로 군인의 길을 택하였던 것은 아닐지 싶다.
장성하자 체구가 크고 용모가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있어 범상치 않았다. 군인이 되어 왕경에 들어갔다가 서남해의 방수군으로 부임하였는데,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대비할 정도로 그의 기상은 항상 병사들 중 제일이었다.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 기록 자체가 진성왕 때의 정치 문란 이전의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장이 된 시점은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최소한 889년 혹은 그 이전의 일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견훤의 출세의 시작점이 889년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그의 본격적인 출세를 892년으로 잡고 있지만,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남은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견훤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 시점은 889년이 분명하다. 아마도 892년은 견훤이 무진주(武珍州, 전남 광주)를 기반으로 공식적으로 대외에 독립을 선포하였던 해로 기록된 것으로 봄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면 하필 왜 889년일까? 바로 원종과 애노의 난으로 촉발된 신라 붕괴의 시작 시점이 바로 그 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난을 일으켰던 장소를 다시 살펴보자.
사벌주(沙伐州)
그렇다. 그곳의 이름은 다름 아닌 사벌주, 곧 상주였다. 하필 견훤의 고향이자 아버지 아자개가 살고 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원종과 애노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견훤은 이 당시 신라군에 몸담고 있었음은 앞서 확인하였으니 차치하고, 그렇다면 아버지 아자개는 이때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던 것일까? 앞서의 아자개 기록을 <삼국유사>에서 좀 더 자세히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아자개는 … 광계(光啓) 연간(885~888년)에 사불성(沙弗城,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스스로 장군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 분명 그 역시 원종과 애노의 난과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그의 출신상 정부군에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하니, 그렇다면 그는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 측에 섰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원종과 애노의 난의 결과는 공식 기록상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저 신라 정부의 토벌군이 그들 반란군 앞에서 호되게 당한 기록만 남아 있다. 토벌에 성공하였으면 성공한 대로 기록을 남길 만도 한데 전혀 없다. 그럼 이후의 상주의 처지를 살펴보면 그때의 결과도 역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재밌는 것은 그때의 기록에도 아자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918년 가을 7월) 상주의 도적 우두머리인 아자개(阿茲盖)가 사자를 보내 태조(왕건)에게 투항하였다.
이때로부터 무려 29년 후의 기록인데, 아자개는 여전히 같은 상주에서 독자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얘기인 즉슨 그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실상 아자개가 계속해서 상주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원종과 애노의 난을 통해 ‘장군’으로 자립하면서 그 반란의 중심지였던 상주를 자신의 근거지로 확고히 하였던 것이 분명해진다.
참고로 여기서 그가 사불성 곧 상주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 시기는 광계 연간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하한선이 888년이므로 혹 원종과 애노의 난 이전에 이미 그가 반역의 깃발을 든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성왕 때에 정치가 문란해지면서 중국 당나라와의 외교도 물리적으로 어려워졌고(실제로 최치원도 신라 내 교통로가 마비되는 바람에 사신 파견이 불발로 끝난 적도 있다), 이처럼 부득이 새로운 연호를 당나라에서 받아오지 못한 탓에 기존의 연호를 좀 더 연장해서 사용하던 시절의 기록일 수도 있다는 점을 남겨둔다.
그렇다면 그 동안 견훤이 숨겨진 야망과 스스로의 판단으로 신라 정부에 반기를 든 것으로 오랫동안 믿어 왔던 부분에 대해서도 일말의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혹 그는 상황상 어쩔 수 없이(!) 반역의 길로 들어섰던 것일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점이다.
견훤이 원종과 애노의 난 이전에 이미 신라 정부에 적대적으로 돌아섰다는 근거는 없다. 신라 말의 모든 혼란은 진성왕 때에 있었던 원종과 애노의 난이 그 시발점이다. 평화 시기에 신라 정규군 소속인 견훤이 갑자기 미쳤다고 막무가내로 독립을 선언했을 리 만무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원종과 애노의 난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텐데, 사실 그것은 그들의 봉기 지역이 바로 견훤 자신의 고향이자 아버지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 그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황상 889년에 아버지 아자개는 원종과 애노의 난에 동참하였을 공산이 크다. 이는 아들인 견훤에게는 치명적인 이슈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라 정부군에서 심지어 지휘관인 비장의 자리까지 오른 상태였으니 말이다. 정규군의 장수인 그에게 아버지의 반란 참여는 절망적인 소식일 수밖에 없다. 연좌제가 살아 숨쉬던 근세 이전의 사회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반역은 그와 무관한 가족도 무참히 몰살시키는 것이 상식이던 시절이다.
서남해에서 반역하는 무리를 때려잡던 장수인 그가 오히려 반역자의 아들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고작 두 개뿐이다. 선선히 붙잡혀 가서 연좌제로 극형에 처해지거나, 아니면 자신도 똑같이 반역의 길로 나서는 것, 그 외에 다른 길은 사실상 없었다.
그리고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삼국지>의 조조가 그러하였듯 세상이 나를 저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세상을 저버리겠다는 그런 심정이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아버지 아자개와 연대하는 길은 선택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배신으로 피해를 입게 된 건 자신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가 향한 곳은 동북방의 아버지가 있는 상주가 아니라, 오히려 서쪽으로 바다를 거쳐 서북방의 광주, 그리고 북향하여 전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버지와의 단절은 이로써 확정적이 되었다.
물론 아버지 아자개도 이미 반역의 길로 들어섰을 때 모든 것을 체념하였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아들 한 명 정도는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을 수도 있겠다. 흥미롭게도 상주 지역에서 근 30년을 버티던 그가 투항하는 대상은 아들이 있던 후백제가 아니라 생면부지의 고려였다.
태조 왕건도 아자개의 정치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918년 7월에 아자개가 투항 의사를 알려오자 두 달 만인 9월에 그를 직접 맞이하는 행사를 수도 개경에서 거창하게 준비하였다. 이때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하나를 살펴보자.
(918년 9월 24일) 상주(尙州) 반란군의 우두머리 아자개(阿字盖)가 사신을 보내 투항해왔다. 태조 왕건이 의전을 갖추어 맞이하도록 명하였다. 구정(毬庭)에서 의전을 연습하느라 문·무관이 모두 도열해 섰는데, 이때 광평낭중(廣評郞中) 유문율(柳問律)과 직성관(直省官) 주선길(朱瑄劼)이 자리 다툼을 하였다. 태조 왕건이 그 일을 전해듣고 꾸중하였다.
“사양하는 예(禮)의 으뜸이고 공경하는 것은 덕의 근본이다. 이제 예로써 손님을 맞이하여 장차 성과를 보려 하는데, 유문율과 주선길이 자리를 두고 다투니 어찌 삼가고 공경하는 것이라 하겠는가? 마땅히 모두 변방으로 내쫓아 그 죄값을 치르게 하라.”
그렇게 유문율은 결질되고, 순군낭중(徇軍郞中) 경훈(景訓)이 그를 대신하여 광평낭중으로 임명되었다.
이를 통해 아자개의 정치적 가치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가 있다. 고려의 국왕뿐만 아니라 신하들이 모두 도열해서 맞이해야 했을 만큼, 또 그 자리에서 서로 잘 보이기 위해 앞에 서려고 자존심 경쟁까지 하였다고 하니 말 다한 것 같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아들 견훤 역시도 나중에 그만한 혹은 그 이상 가는 파격대우를 받으며 고려로 넘어오게 되니, 역사는 돌고도는 것이라는 그 흔하디 흔한 말도 이렇게 보면 정말 일리가 있어 보인다.
여하튼 889년에 상주에서 발발한 원종과 애노의 난이 촉발시킨 역사의 수레바퀴는 같은 지역의 아자개는 물론 그의 아들이었던 신라의 장수 견훤에게까지 커다란 여파를 미쳤다. 아버지 아자개의 반란 동참으로 인해 아들 견훤은 절반은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절반은 이판사판이라 생각했는지 자신의 야망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데 온 정열을 쏟게 된다. 그 결과가 892년에 무진주(광주)를 차지하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고, 최종적으로는 900년에 완산주(전주)를 정식 수도로 한 후백제의 건국 선포였다. 일종의 역사적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아닐까 싶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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