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년 겨울 11월, 견훤의 후백제군이 신라 수도를 급습해왔다. 이때 경애왕은 왕실 구성원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 가서 잔치를 열고 노느라 적병이 이르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왕과 왕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일가친척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넙죽 엎드려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견훤은 병사들을 풀어서 온갖 재물을 약탈하게 하고, 자신은 궁궐을 차지하고는 달아난 왕을 찾아오게 하였다. 왕은 후궁에 있다가 이때 군영으로 잡혀와서는 자결을 강요받았다.
이것이 대략적인 견훤의 신라 급습 사건의 전말이다. 한 나라의 국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정부로 싹 갈아엎어버린 것은 물론, 이 직후에 뒤쫓아 고려의 왕건을 공산 동수 전투에서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파격적인 대승을 거두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오랫동안 문제가 되었던 지점은 바로 포석정이라는 존재이다. 견훤의 내습이 이루어진 시점이 한겨울인 음력 11월이었으니, 오늘날 양력으로 보면 대략 1월쯤 되는 가장 추울 때이기 때문이다. 그 추운 겨울에 야외에서 술마시고 놀았다고 하니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필사본 『화랑세기』같은 책에서는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社), 즉 사당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한겨울에 놀았다는 것보다는 제사를 지냈다고 함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이들은 포석정을 목적지로 이동한 게 아니라, 후백제군이 들이닥쳤을 때 마침 포석정을 지나던 길이 아니었겠나 하는 추론이다.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927년 9월, 후백제의 견훤은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진군을 재개하여 대략 10월경에는 신라의 고울부(高鬱府)까지 당도하였다. 근품성까지만 해도 신라 수도에서 거리가 있었기에 크게 긴장하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고울부는 바로 신라 왕경과 맞닿아 있는 지근거리였다. 견훤의 전격적인 기동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만큼, 특히 그 진격로의 일직선상에 있던 신라로서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급히 신라왕은 고려로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왕건 역시 그 첩보를 접하고 구원군을 파견하기까지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무런 추격군이 따라붙지 않은 견훤 입장에서는 훼방꾼 없이 먹잇감이 놓여 있는 무주공산으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만큼 신라는 당시에 최약체의 존재였다.
견훤의 후백제군이 신라 수도로 진입한 것은 겨울 11월의 일이었다. 이때의 후백제군은 계림(鷄林)의 서쪽 교외로 침투하였고, 신라 왕실은 포석정까지 달아나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왕궁이던 월성에서 포석정까지의 직선 거리는 3km도 채 되지 않는다. 즉 후백제군의 기병이 빠르게 뒤쫓는다면 불과 10분도 안 걸릴 거리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후백제군의 접근을 알고 있던 경애왕과 그 일족이 한겨울에 야외에서 술마시고 놀고 있었다는 것은 그래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다시 좀 더 현실적으로 재현해보자면, 이들은 후백제군의 빠른 접근 소식에 당황하여 다급히 월성을 빠져나왔고, 아마도 배후의 산성인 남산(南山) 신성(新城)을 목적지로 이동하였던 모양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북쪽 경로로 오르지 않고 남산을 우회하여 좀 더 서남쪽으로 이동하다가, 포석정에서 추격군에 따라잡힌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모든 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된다. 후백제군의 고울부 습격 사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이들이 왜 굳이 포석정에 나가 있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포석정은 이동경로 중에 불과했다고 본다면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거나 포석사에서 제사를 지냈다거나 하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단순히 살기 위해 달아나던 도중에 기동력이 뛰어났던 후백제군에게 마침 포석정에서 따라잡혔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왕비, 부인 등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던 인력들도 포함이었다보니 월성에서 3km도 벗어나지 못해 빠르게 추격군에 붙잡혔다고 보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다만 기왕이면 남산 신성을 북쪽에서 올랐다면 좀 더 신속하게 산성의 방어력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산성을 우회하여 남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 조금 의외라면 의외이다. 혹 북쪽 루트가 너무도 예측 가능해서 일부러 피한 것인지, 아니면 그쪽의 방어시설이 미비하여 안전하게 포석정에서 이어지는 남산 서쪽의 포석골을 통해 남산 신성의 정상부로 오르는 루트를 선택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하튼 남산 신성은 둘레만 해도 무려 5km 가까이 되는 큰 규모이고, 또 내부에 장창(長倉)이라는 양식과 무기를 저장하는 창고도 있었기에 장기전을 대비하기에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 경애왕과 그 일가족이 후백제군에 대항하기 위해 이보다 가깝고 이보다 안전한 장소가 또 있었을까 싶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포석정에서의 어이없는 유흥과 집단 학살의 결말 역시 단순히 옛 역사가가 망국의 국왕을 탓하기 위해 그저 그들이 나라의 위험도 눈치 채지 못하고 마냥 놀고만 있었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견훤의 진격로와 당시 신라 내부의 사정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이는 믿기 힘든 사실임을 깨달을 수 있다. 좀 더 합리적인 정보를 일부 더해서 보면, 포석정은 그저 이동경로상의 한 장소였을 뿐이라는 정도는 쉽게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그래서 매번 새로운 발견의 즐거움을 주는 발굴의 학문이기도 하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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