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어쩔 수 없이 승자의 기록이다. 영화 『짝패』의 명대사,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것”이라는 말은 그래서 옳다. 결국은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역사의 진리이다.
역사에서는 그렇게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만 기억해준다. 오랜 격언 그대로 최후의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지는 법이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승자를 위협하였던 경쟁상대였다면 더더군다나 매장당해 마땅하다.
그런 사례가 하나 있다. 바로 궁예(弓裔)이다. 어떤 서양 학자가 잘 묘사하였다시피 크게 세 가지 인간군상이 있다고 했을 때, 좋은 놈은 태조 왕건(王建), 나쁜 놈은 후백제의 견훤(甄萱), 그리고 이상한 놈에 해당하는 것이 곧 궁예이다. 원래였다면 가장 마지막 경쟁자였던 견훤이 악역을 옴팡 뒤집어쓸 만도 했는데, 그는 운 좋게도(?) 마지막 순간에 왕건에게 투항하여 후삼국 통일을 완수하는 데 일조한 덕분에 미운 털이 박히는 것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
대신 온갖 악역은 궁예에게 거의 다 집중되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궁예는 후삼국 시대의 역사에서 이상하고도 지지리 못난 역할로 제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못되고 악한 인물인지는 의아한 부분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894년의 다음 기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궁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사졸과 즐거움과 괴로움, 어려움과 편안함을 함께 하였고, 상벌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무리가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였기에,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물론 사람은 나중에 성공하면 (대개는 안 좋게) 바뀌기도 하니, 이러한 젊은 시절의 궁예와 나이든 이후의 궁예가 다를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동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따르는 이가 많았다. 그의 명성을 듣고 저 멀리 평양의 성주도 궁예에게 항복하였고, 또한 패서(浿西) 지역의 호족들이 대규모로 그에게 투항해왔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왕건과 그의 아버지 왕륭(王隆)이었다. 뿐만 아니라 옛 상관 양길의 부하들도 궁예에게 자진해서 항복해오는 등 그는 무수히 많은 영웅들을 거느린 당대 최고의 군벌로 성장하였다. 인성이 극악하고 성격이 이상하기만 해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거나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던 궁예도 넘치는 자신감 혹은 오만한 자만심 그 사이 어딘가의 단계로 접어들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정식으로 자신을 왕으로 선포한 것은 901년이었다. 이때의 국가명이 고려(高麗)였다. 물론 896년에 이미 사실상의 건국을 마친 상태이긴 했다. 철원(鐵圓)에 도읍하고는 처음으로 관직도 이때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는 남쪽의 견훤이 그러하였듯 아직 장군이라는 호칭을 유지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그가 고려국의 국왕으로 등극한 것이 901년이었고,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변경하고 무태(武泰)라는 연호를 선포하였다. 이때서야 제대로 된 정부를 구성하였다. 수도도 897년부터 왕륭·왕건 부자의 송악에 자리하였던 것을 이때 다시 철원으로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실제 천도는 905년에 이뤄졌는데, 그것을 기념하여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바꾼 것도 이때였다.
911년에는 또 다시 국호는 태봉(泰封), 연호는 수덕만세(水德萬歲)가 되었다. 그리고 914년에는 마지막 연호인 정개(政開)를 도입하였다. 아마 이 사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의 달라진 모습을 역사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머리에는 금색 두건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걸쳤다. (중략) 외출하면 항상 백마를 탔는데, 비단으로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였다. 남녀 아이들에게 깃발, 일산, 향,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고, 비구 2백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이를 가리켜 그에게 적대적인 역사서는 이때 그가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였다고 적고 있다. 대개 이때의 그를 신정일치 사회를 추구한 폭군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이 모습을 바라본다면 이게 무슨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우선 그의 금색 복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대 사회의 왕족들은 심지어 금관과 각종 금붙이들을 착용하지 않았었나. 백마에 비단 장식은 또 어떠한가. 신라 왕족들의 무덤 속 귀중품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소박할 지경이다. 아이들과 비구 2백 명을 앞뒤로 둔 것 역시 일국의 왕의 행렬 치고는 수수한 정도의 규모이다. 가장 못된 모습을 보이고자 적은 기록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궁예를 띄워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궁예는 심지어 황제를 자임하고 있었던 것 같다. 918년 쿠데타를 성공시킨 왕건은 바로 다음 날인 6월 16일에 조서를 발표하는데, 여기에 선왕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절호칭존(竊號稱尊)
글자 그대로는 함부로 연호를 정하고 존귀한 칭호로 일컬었다는 것인데, 이를 좀 더 보편적인 다른 표현으로 바꿔보면 이렇게 된다.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운다는 뜻이다. 왕건은 자신의 전임자인 궁예가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마음대로 만들었다고 탓한 것이다. 물론 자신도 바로 전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선포하였으니 내로남불(?)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궁예는 고려-마진-태봉으로의 국호 변경은 물론 무태-성책-수덕만세-정개로 연호도 가장 많이 바꾼 왕으로 남아 있다. 그나마 철원-송악-철원의 천도 기록은 최다 기록은 아니다. 궁예가 왜 그토록 잦은 변화를 모색하였는지는 오늘날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거의 확실한 것은 그가 꿈꾼 것은 실질적인 황제였고, 그가 추구한 그의 국가는 제국이었다는 사실이다. 후임자인 왕건은 전임자의 잘못만 탓하였지만, 사실 그 역시도 연호를 세워서 준 황제의 길을 튼 것은 물론, 그의 아들인 광종 왕소(王昭)는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로 격상시키면서 실질적인 제국의 길로 들어섰다.
궁예가 꿈꾼 것을 고려의 태조와 광종 부자가 나란히 이뤄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지은 국호인 고려의 사실상 초대 황제는 결국 궁예였던 셈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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