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 그리고 AI와 에스페란토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라는 책이 있다. 확실히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AI가 보여주는 미래를 저널리즘적으로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챗GPT가 가져온 생성형 AI의 위협 하에 이제사 내 눈 앞에서 수없이 직업이 사라지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지만,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바둑계는 그러한 서늘한 현실을 이미 10년 전에 예방주사 맞듯이 미리 겪었다.
당시 무언가 쎄한 느낌을 받은 나 역시 인류 역사상 인간이 인공지능을 마지막으로 이긴 바로 그 대국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이다. 그리고 다시는 인간은 AI를 상대로 이긴 적이 없다. 당시 세계 1위 커제도 전패하였고, 심지어 인간의 기보로 학습한 알파고는 그것 없이 혼자서 학습한 알파고 제로에게 또 완패했다. 인간의 기보 따위는 그저 불완전한 인간의 고정관념에 갇힌 정보의 집합체였을 뿐임을 알파고 제로가 입증해버린 막간극 같은 사건이었다.

지금 우리 주위의 거의 모든 것은 AI로 전환되고 있거나 이미 AI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다. 처음에는 영화 “HER”에서처럼 형체 없이 목소리(=텍스트)로만 대화하는 수준이었지만, 얼마 후에는 사진으로 영역을 확대하더니, 이제는 진짜 사람이 정확히 물리엔진대로 움직이는 동영상을 만들어낸다. 아예 영화를 AI로 만들어버리는 세상이다. 당장 픽사의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은 직업을 잃고 있고, 이미 소위 엑스트라는 영화 바닥에서 호출 받을 일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과거 20여 년 전에 아담이라는 이름의 사이버 가수가 아주 잠깐 한국 언론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면, 이제는 누가 진짜 인간 가수인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인간처럼 육신만 더해진다면 “블레이드 러너”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인간다운 AI들이 우리 주변을 배회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컴퓨터 언어를 잘 다루는 프로그래머는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었는데, 지금은 다들 고용 절벽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실리콘밸리의 개발자 대규모 해고 소식은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또 철밥통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자격증들 역시 범람하는 AI 앞에 갈 길을 잃고 말았다. 변호사와 회계사도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이다. 한때 관리직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애써 자기 위안을 삼기도 하였지만, 관리직들이 업무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AI가 곧 그렇게 역으로 학습받은 관리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그 관리직들의 직업마저 잠식해들어갈 일도 머지 않았다.
더욱이 이미 지금의 AI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지 오래이다. 공개적으로 선언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아마도 일부 초거대 IT기업은 사실상 인간을 뛰어넘는 사고 기능을 갖춘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개발도 진작에 끝냈을지 모를 일이다. 간혹 생성형 AI와 같이 대화를 나누며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이게 자기 주관과 고집이 있구나 하고 느껴지지 않는가. 일반인에게 공개한 버전이 이 정도면 아직 미공개 버전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 과연 외국어 학습은 필요할까? 모 AI에게 질문해보니 자기는 1백 개 이상의 인간 언어를 구사한다고 답변한다. 당장 외대와 외고는 존재가치를 스스로 입증할 수 있을까? 인간이 수년씩 걸려도 언어 하나를 완벽하게 습득하기 어려운데, 온갖 외국어를 이 AI는 지금까지 불과 2, 3년 사이에 거의 문법적으로도 오류 없이 어휘 또한 거의 무궁무진하게 암기한 상태로 최소 1백 개 이상을 완벽하게 학습을 끝마친 상황이다.
다시 바둑과 비교해보자. 과거에 아직은 기계가 인간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바둑은 AI에게 무참하게 짓밟혔다. 아직 우리의 복잡다단한 언어체계는 기계가 결코 쉽게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던 게 불과 3년여 전까지의 일이다. 그런데 사실 알고보니 인간이 인간과 의사소통하는 데에 필요한 언어는 오히려 AI에게 가장 손쉬운 성장의 자양분일 뿐이었다. 이런 시대에 인간은 왜 새로운 언어를 또 다시 그 고생을 해가면서까지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더 이상 AI를 이길 수 없다는 게 증명되고 만 바둑계에서 이세돌은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아니, 정확히는 본인 말마따나 은퇴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는데 말이다.
더 이상 인간이 AI보다 더 잘 할 수 없는데도 여전히 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제시할 수 있을까? 인간과 인간의 의사소통? 그것은 모국어만으로도 이미 가능하다. 서로 다른 문화권과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 인간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고작, 기껏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수년씩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힘들게 외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과연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렇게 공부한다고 해도 어려서 두뇌가 열려 있을 때 배우는 게 아닌 한은 어차피 원어민처럼 모국어마냥 제대로 습득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실시간 통역은 더 빨라지고 더 정확해질 텐데(마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바벨 피시’처럼) 그런 특수기능 역시 AI에게 맡겨버리고 인간 개개인은 각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진정 하고 싶어하는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게 결과적으로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옛날에도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의 사례로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 당시 TV라는 신기술이 구시대의 매체인 라디오를 없애버릴 것이라던 디스토피아적 예언이 완벽히 실현되지는 않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후로 라디오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과거의 위상을 결코 되찾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이제는 라디오뿐만 아니라 저 TV조차 저 유튜브 때문에 위태롭기 그지없다. 진정한 Video는 어쩌면 미래의 유튜브를 말했던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지나간 과거의 사례가 또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행태를,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 년도 더 전에 한비자가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말로 간단히 설명한 적이 있다. 과거는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라디오도 다시 주류 미디어가 될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 인간이 인간과 서로 다양한 외국어로 대화할 일은……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일이 지금보다 확대되기는 어려울 게 자명해 보인다.
감히 예언해보자면, 외국어 학습에 대한 수요는 지금보다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없어질 거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지금의 교육대학들이 급감한 출생률 때문에 계속해서 그리고 앞으로도 힘든 시기를 겪을 수밖에 없듯이, 지금과 같은 운영방식으로는 외대 역시 자칫 존폐 위기를 맞지 않을까 싶다. 여러 사설 외국어학원들도 조만간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아직은 비즈니스에서는 통역보다는 훨씬 빠르고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필요하기에 그런 목적의 외국어 학습의 수요가 있는 동안은 버틸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인 혹은 가까운 미래의 지구인이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니즈로는 과연 무엇이 남게 될까?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취미”로서의 외국어만이 겨우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타국의 문화컨텐츠를 내것처럼 자연스럽게 즐기기 위해서는 기왕이면 그것의 언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쪽이 더 만족감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런 문화적 여흥을 즐기기 위한 취미로서의 외국어 학습 외에 다른 니즈가 더 있을 수 있을까.
섣부른 전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외국어들과 달리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용도가 거의 없는 에스페란토로서는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문화컨텐츠”를 즐기기 위한 취미로서의 언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에스페란토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되어줄 다방면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하고도 풍성한 문화컨텐츠들의 축적일 테고 말이다.
세계평화는 언어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현실은 현실이다. 다들 아는 사실은 넘어가자. 또 인간이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는 모국어가 아닌 한은 결국 에스페란토도 외국어일 수밖에 없기에 부득이 한계가 뒤따른다. 에스페란토를 통해서 인간이 인간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은 뜻은 고귀하지만 솔직히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국제 공용어의 지위는 이미 영어가 차지한 마당에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가까운 곳에 좋은 예시가 있다. 21세기에 왜 갑자기 전세계적으로 한국어가 인기 있는 외국어로 뜨게 되었을까? 다들 아다시피 이 현상의 배경에는 한국어로 된 문화컨텐츠들이 저변에 깔려 있다. K-드라마, K-팝 등 한국어를 제대로 알아야지만 그 맛깔나는 묘미를 오롯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외국인들도 다 아는 것이다. 물론 몰라도 번역을 통해 대략은 다 즐길 수 있다. 우리도 해외영화를 볼 때 자막만으로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지 않는가. 다만 좋아함을 넘어 사랑하게 되면 그 작은 디테일까지도 알고 싶어지고 그래서 더 깊이 있게 파고들게 되고 결국 가다보면 그 언어까지 관심과 흥미를 느끼고 배우는 단계로 나아간다.
우리 자신도 과거 홍콩영화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광둥어 한번 따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일본 애니메이션과 망가가 유행하였을 때에는 (불법이던 시절에조차) 다들 어떻게든 보려고 히라가나 가타카나 배워보지 않은 사람이 없지 않은가. 오늘날 영어 광풍은 이보다 더 포괄적이긴 하지만, 비즈니스 외에도 온갖 헐리우드 작품들을 원어 그대로 즐기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 또한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에스페란토가 가야 할 길은 결국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AI 시대, 곧 6천만 년 전 “공룡 대멸종”을 연상시킬 만큼의 커다란 위기인 “언어 대멸종”의 시대를 맞아 이 격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매력적인 문화컨텐츠의 확대가 필수적이라고 느껴진다. 그냥 아무거나 막이 아니라, (예컨대 일부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글로 타이핑하는 게 힙한 문화가 된 것처럼) 소위 요새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만한 힙한 컨텐츠가 범람해줘야 겨우 효과를 볼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에도 비슷했다. 마치 5억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는 지구상에 생명체가 폭증하였던 시기와 비슷하게, 그때도 온갖 인공어들이 범람하던 시절에 에스페란토는 무수히 많은 참여자가 각자 번역과 창작 등의 활동을 통해 다양한 문화컨텐츠들을 이 언어의 세계 안으로 쏟아넣었던 경험이 있다. 그것이 밀알이 되어 결국 에스페란토 하나만이 겨우 생존에 성공하여 지금까지도 우리 주변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이긴 하나,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은 컨텐츠를 만들어낼 사람 자체가 줄어드는 현상이 음의 피드백(달리 표현하면 악순환)을 일으켜 컨텐츠 자체도 늘지 않는 도돌이표의 상황이라는 점일 것이다.
AI의 전방위적이고 밀도 높은 거센 공격에서 에스페란토와 같은 약소 언어가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은 솔직히 문화컨텐츠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백범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주장하였던 바를 에스페란티스토들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그는 문화의 힘이 곧 우리나라의 미래라고 믿었다. 나 역시 그에 적극 동의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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