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는 의외로 몇 군데 없습니다.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정도가 우선 떠오를 텐데요. 그외에도 영어를 잘 하는 국가로는 싱가포르, 인도, 필리핀, 북유럽 여러 나라 등 더 있긴 합니다. 원래 잘 쓰던 나라는 어차피 우리의 검토대상은 아니고, 어쩌다 나중에 영어를 공용어(혹은 사실상의 공용어)로 쓰게 된 나라들이 오늘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하였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한 민족이 자기 고유의 언어를 놔두고 이국의 언어를 새롭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매우 드물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긴 합니다. 다만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수는 불행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발생합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일제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왜 일본어에 능하신지 말입니다. 국가가 강압적으로 어린시절부터 교육으로 밀어붙이면 자연스럽게 그 언어를 받아들일 여지가 커집니다. 당연히 일제강점기였던 만큼 일어사용환경(?)이 만들어져 있던 것도 물론이고, 주변에 일본인들이 아예 와서 살았으니 자연스럽게 일본어 회화가 이루어지기도 쉬웠던 측면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대신에 대한제국 당시까지만 해도 영어를 잘 한다고 평가받았던 조선인들이 나중에는 일본인 영어선생님들 탓에(!) 영어를 못하게 된 것은 슬픈 일이지만 말입니다.) 이는 우리뿐만 아니라 대만(Taiwan)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수십 년 동안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본어를 상당수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범 영어권 국가들도 매한가지입니다. 우선 아일랜드(Ireland)도 너무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보니 전 국민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게 된 사례입니다. 치열한 분쟁 끝에 지금은 가까스로 독립한 상태이고, 아울러 옛 아일랜드어를 복원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말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인도(India)나 필리핀(Philippines)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각각 영국과 미국의 지배를 받았었기에 (전국민은 아니지만) 영어가 가능한 인구집단이 사회 내에 자리잡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영어를 잘 한다는 건 부러울 수 있지만, 그 역사적 배경이 식민지배 탓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딱히 동경하기는 어려워집니다. (어쨌든 둘 다 인구는 많으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지는 못하고 있기도 하고요.)
홍콩(Hong Kong)도 사실 비슷은 합니다만 조금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영국의 오랜 지배의 결과로 영어가 좀 더 능숙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 언어로서의 영어가 정착한 것이지 홍콩인들 전부가 영어에 능한 것은 또 아닙니다. 다수의 시민들은 광둥어가 모국어이고 영어가 가능한 인구는 절반이 채 안 된다고 합니다. 단일민족사회이다보니 굳이 서로 영어로 대화할 일 자체가 별로 없는 것입니다. 다만 영국의 영향과 지리적 이점상 무역이 발달한 덕분에 영어가 자연스럽게 사회 곳곳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여전히 영어가 안 되는 홍콩인들이 더 많습니다.)
싱가포르(Singapore)도 홍콩과 비슷한 도시형 국가이지만 결정적 차이는 화교가 다수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다민족 사회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자원 하나 없는 섬나라에 불과하다보니, 심지어 물도 이웃나라 말레이시아에서 사와서 씁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국부 리콴유(李光耀, 1923~2015)가 극빈도시인 싱가포르를 초창기 말레이 연방에 가입시키려 애썼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던 싱가포르는 결국 정말 살기 위해서 자립의 길을 찾아야만 했는데, 크게 4개 민족이 공존하던 사회였던 만큼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입된 정책 중 하나가 영어 공용화였습니다. 리콴유 자신이 영국 유학파에 영어가 능수능란했다는 점도 물론 컸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차별없는 언어정책이 불가피했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자원 없이 외국과의 교역만이 살 길이었다는 사실 등은 그 당시 싱가포르가 영어를 정책적으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을 잘 설명해줍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가장 영어 실력이 뛰어난 아시아 국가는 싱가포르가 된 것도 그러한 환경 탓이었습니다.
그외에 재밌게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들 중에서 영어실력이 가장 뛰어난 나라들은 북유럽 계열 국가들이 손꼽힙니다. 매번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서로 순위만 일부 변동이 있을 뿐이지 언제나 그들이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각자 고유의 모국어가 있고 또 공식적으로는 영어가 공용어가 아님에도, 사회 전반적으로 어려서부터 영어를 교육하고 잘 사용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경제규모 탓이 가장 커 보이는데, 왜냐하면 자체적으로 내수만으로 먹고 살 기에는 기본적으로 인구 측면에서부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 바깥을 향하고 살아야 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국제 공인 무역어이기도 한 영어가 사실상 생존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번외로 또 다른 흥미로운 사례는 이스라엘(Israel)입니다. 지금 이들이 사용하는 공용어인 히브리어는 사실 매우 독특한 케이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단일민족에 가까운 유대인들이지만, 이스라엘이 처음 건국하던 시점으로 돌아가보면 모두가 유럽, 근동 등 각지에서 모여들다보니 서로 각자 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통큰 결정을 하게 되는데, 바로 사어(死語)였던 히브리어를 오늘날 되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상 전례가 없던 상황이었지만 유대인 특유의 고집이 통해서였는지 지금까지도 이들은 한때 사멸되었던 히브리어를 구어로서 멀쩡히 잘 쓰고 있습니다.
정리해보자면, 영어를 잘 쓰는 나라는 ① 환경적으로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된 케이스와 ② 살기 위해 마치 진화론의 자연선택처럼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케이스, 크게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겠습니다. 전자는 어차피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니 넘어가더라도, 후자의 측면은 한번쯤 고민해볼 만한데, 여기에 기반해서 20여 년 전에 대한민국 사회를 한때 뜨겁게 달구었던 영어 공용어론이 등장하기도 했었습니다.
다만 위의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외국어인 영어를 한 사회 내로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식민지배를 제외하면) 그 사회의 규모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든 이웃나라 일본이든 영어 공용어화 정책이 도입되기 어려운 결정적인 사유는 그 인구규모가 너무(?) 크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도입할 만큼의 작은 내수시장이어야지만 그에 대한 반발이 적을 텐데, 한국이든 일본이든 그 시장규모가 어느 이상 되면 굳이 그런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가 싱가포르처럼 민족구성이 다양했다면 강제적으로 밀어붙일 동인이라도 있었겠으나, 심지어 단일민족에 가까운 상황에서는 이 또한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어였던 히브리어를 되살릴 수 있었던 것도 굳이 따져보면 그들의 총인구수가 1천만 명이 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가 사실상 다민족국가처럼 각자 다른 모국어를 가진 채 건국에 참여한 것이었기 때문에 언어의 통일에 대한 필요성에 대승적인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었고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측면에서 솔직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자원빈국이라는 특성상 여전히 무역에 대한 갈증은 기본적으로 클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전국민 중 영어를 잘 하는 인력들이 적절히 잘 배출되는 구조만 갖춰져 있다면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지금의 현 상황이 정확히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말입니다. 학교에서부터 영어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키고 있는 것도 그런 환경에 큰 장점입니다. 회화 교육은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그 중 좀 더 필요성을 느끼고 사회적 성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어학연수든 해외유학이든 절차를 통해 영어가능인구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은, 우리나라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은 알아서 다들 자발적으로 외국어를 배워 스스로 살 길을 찾아나간다는 점입니다. 국내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주는 게 딱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좋든 싫든) 동네마다 있는 영어학원이든 어학연수나 해외유학이든 이처럼 널리 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또 이웃나라 일본의 가장 많은 유학생을 차지하는 것도 우리나라 청년들이고, 중국어 역시 마음만 먹으면 공식적으로 제2외국어로 학습 가능한 게 우리나라입니다. 어차피 자원빈국으로서 고급인재의 배출만이 살 길인 대한민국에서 이렇듯 해외와의 교류를 통해 기회를 모색해나가려는 노력 자체는 큰 장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 또 다른 언어가 과연 정착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놓고 본다면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됩니다. 한때 유행했던 영어마을이나 국제학교 등 외국어 교육환경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단일민족에 단일언어로 통일된 사회에서는 특정 외국어가 추가로 자리잡기는 하늘에 별따기일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이 모여사는 곳으로 유명한 서래마을에서도 프랑스어는 공용어의 지위에 있지 않고, 또 쁘띠프랑스나 독일마을같은 경우도 사실상 관광지화된 케이스이지 해당 언어사용환경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에스페란토같은 제2의 언어가 한국 사회에 한 꼭지로 작게나마 뿌리를 내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한낱 상상입니다만, 누군가 갑부가 통크게 부지를 내주고 그곳에서는 그 언어만 사용한다고 선언한 다음 작게나마 그 안에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질 만큼의 규모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은 그럴 만한 기회는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상 유일하게 시도되었던 에스페란토 사용국가 "로즈 아일랜드 공화국"은 독창적이고 유쾌했던 사례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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