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세계의 국제공용어의 위치는 사실상 영어(English)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에스페란토(Esperanto)가 더 먼저 그 지위에 도전하였다고 해도 대세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 있는 상황입니다. 전통적으로 미국에 적대적인 나라의 국민들조차도 해외에 나가면 어색하게나마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게 작금의 현실입니다. 누가 이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모국어 화자의 규모 기준으로 본다면 영어는 중국어, 스페인어에 이은 3위에 불과(?)하지만 제2언어 화자까지 포함하였을 때는 총량에서 1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또 직간접적으로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본다면 압도적으로 영어가 1등 언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몇 개 없지만, 그 영어를 배우기 위해 지금도 수없이 많은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이 그들 나라를 찾고 있다는 현실은 참으로 부러울 따름입니다.
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아래의 지도(출처: 위키피디아)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와 일부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를 한 번에 표시한 것입니다. 보다시피 이것만 봐서는 지역색이 강한(?) 언어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건 착시효과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영어의 유창도(proficiency)를 기준으로 다시 그려본 지도입니다. 사실상 남극과 북한(!)을 제외하면 전세계가 아주 조금씩은 영어를 사용하고 있고, 북유럽이나 일부 나라에서는 그 색이 진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약과입니다. 전세계에서 영어를 최소한 초등 이상 의무교육을 하고 있는 곳을 표시해보면 아래에 보다시피 그 외연이 확연히 넓어집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더욱이 교육은 주로 어리거나 젊은 학생들이 대상이기에 그만큼 앞으로 영어의 확장은 더 분명하고 확실해지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일부 분류가 잘못된 지역들이 있지만 대세에 지장 없으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계 최대의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의 각 언어별 컨텐츠 수를 참고할 수도 있겠네요. 예컨대 여기서 한국어 컨텐츠는 73.8만 개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웃국가의 경우에는 일본어는 149.1만 개, 중국어는 152.4만 개입니다. 그렇다면 에스페란토와 영어의 갯수는 어떻게 될까요? 각각 37.3만 개와 714.1만 개입니다. 스무 배 정도 차이가 나는군요. 하지만 이는 순수하게 갯수의 비교입니다. 한 컨텐츠당 담고 있는 데이터의 양은 그보다 훨씬 심하게 격차가 납니다. 즉 영어 컨텐츠는 한 건수당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고, 에스페란토의 경우는 그보다는 빈약한 수준으로 내용이 기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상은 단순 컨텐츠의 수일 뿐이고, 사용자수 등 다른 지표들 측면에서도 영어는 압도적으로 1등입니다. 그리고 아쉽지만 에스페란토는 더 거리가 멀어집니다.
이제 세상은 세계화, 정보화를 넘어 인공지능(AI)의 초고도 발전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AI의 학습을 담당하는 방대한 데이터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과반 이상 아니 절대다수의 데이터가 영어로 만들어져 있고 생성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세계 젊은이들이 영어를 배우고 있고 거의 모든 정보가 영어로 처리되는 현실은 이미 우리 뒤로 지나가고 있는 미래일 따름입니다. 국제공용어든 국제보조어든 뭐로 부르든 국제어는 사실상 영어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영어 자체도 장점이 많은 언어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시면 단어에 성이 있다거나 형태 변화가 잦은 문법구조 등은 특히 유럽의 언어들을 배울 때 크나큰 장애물이 됩니다. 그에 비해 영어는 외우기 어려운 성도 없고 단어들 역시 기존 유럽어들로부터 차용한 게 많기에 유럽인들이 배우기에는 편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법도 다른 유럽어들 대비해서 (역시 상대적으로) 그리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표기법 역시 독일어의 움라우트(umlaut)나 스페인어의 혀굴리는 발음(rr)같은 것 없이 우리가 아는 그대로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 유럽어들을 섭렵한 자멘호프도 영어의 심플함을 높이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허나 동시에 영어는 하자가 많은 언어이기도 합니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여기저기서 단어들을 마구 받아들였다보니 중구난방이 된 어휘들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의 복수의 단어들이 많고, 한 단어의 형태 변화도 규칙 파괴가 다반사며, 또 묵음도 많고 단어의 발음이 스펠링과 따로 노는 잡탕이 된 것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참으로 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이 언어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 정도가 이제는 많이 심해져서 사실 비유럽계 외국인으로서 불규칙 많은 영어를 익힌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각종 유럽어를 기반으로 단순화를 컨셉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에스페란토는 상대적인 강점이 있을 것입니다. 단어 발음은 스펠링 그대로라서 읽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고, 문법에도 예외가 전무하기에 진입장벽이 이보다 낮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동양인으로서 S-V-O의 문장구조에 익숙해져야 하고 여전히 새로운 어휘들을 대량으로 외워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에스페란토는 오늘날 성공하지 못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진화론에서 말하듯이 가장 강한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발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대표적으로 복잡한 영어에서 문법적 단순화를 이루고 어휘도 통일시키려는 작업들이 여러 차례 있어왔습니다. 이를테면 Basic English, Simple English, Plain English, Globish 등 이런저런 형태의 그런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정착하지는 못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영어가 모국어인 화자는 굳이 저런 단순화한 영어로 다운그레이드(?) 할 필요가 없고, 또 새로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와 같은 인공적인 영어가 쓰이는 곳이 없으니 본격적으로 배울 니즈가 딱히 없다는 데에 있겠습니다.
에스페란토도 실상은 그와 비슷합니다. 물리학에는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자식 표현으로 임계질량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는 핵분열의 연쇄과정을 만들어내는 최소한의 질량을 의미합니다. 이를 언어에도 빗대어 사용하자면 한 언어가 존속하거나 혹은 확장되어 나가라면 그 최소한의 화자의 숫자, 사회의 구성, 경제적 규모 등 어떠한 크리티컬 매스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단순하고 쉽다고 하더라도 소위 임계질량을 이루지 못하면 더 이상 확장되지도 심지어 유지되기도 어려워지는 게 곧 언어의 크리티컬 매스입니다. 대표적으로 (K컬처의 영향을 제외하면) 한국어는 솔직히 여타 외국인들이 굳이 따로 배울 니즈가 없는 마이너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결정적 이유는 그것을 말하는 총 8천만 명의 커다란 인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는 언어적으로 완벽해서 세계적인 국제어로 자리매김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단점과 문제에도 불구하고 수억 단위의 모국어 화자와 그 언어만 사용하는 복수의 국가들의 존재,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경제가 돌아갈 수 있는 거대한 시장규모가 갖춰져 있기에 오늘날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봄이 옳겠습니다. 더욱이 영어의 시작은 브리튼 섬에 기반한 민족어에서 출발하였지만, 오늘날 영어 사용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굳이 어느 특정 민족의 나라도 아닙니다. 사실상 영어는 여타 언어들과 달리 민족어의 굴레, 즉 어느 한 민족의 지역 언어로서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상태입니다.
그에 반해 에스페란토의 화자의 수는 폭넓게 보아도 2백만 명 정도이고(아마도 취미로 배운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최대치이겠지만), 상시 사용환경은 어쨌든 전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에 그저 드문드문 이루어지는 지역별 소규모 모임 혹은 연례 세계대회 정도에서나 공용어로 잠깐 등장할 뿐이고, 경제규모는 부끄럽지만 언급하기도 어려울 만큼 협소한 상황입니다.
솔직히 독자적 생존과 지속 가능한 에스페란투요(Esperantujo)는 없는 셈입니다. 즉 에스페란토는 크리티컬 매스를 달성하지 못하여 지금도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의 소멸위기언어(endangered language)입니다. 이를 다른 위기에 처해 있는 언어들의 숫자와 비교해볼 수도 있습니다.
편의를 위해 유럽만 살펴보자면, 스페인 북부와 일부 프랑스 남부에서 사용하는 바스크어나 아일랜드 고유의 아일랜드어 등은 통계에 따라서는 십여 만부터 최대 몇십만의 사용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강력한 주사용 언어 때문에 소멸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영국의 웨일스어는 통계에 따르면 80만 명 이상 사용 가능하다고 하여 지금은 소멸위기언어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유창한 수준의 에스페란티스토의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이들보다 결코 더 많다고 말할 수는 없는 정도입니다. 더욱이 그나마 한군데 몰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 쓰는 저 언어들의 사용환경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것이 에스페란토의 현실이고 말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예컨대 30여 만 명이 사용하는 아이슬란드어같은 경우에는 숫자는 적지만 국민들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언어를 지켜내고 있기에 소멸위기언어에는 포함되지 않기도 합니다. 다만 물론 절대적인 규모도 중요하겠지만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젊은 세대가 그 언어를 배울 의향이 있고 실제로 배우고 있느냐입니다. 지금 당장 천만 명이 사용하고 있어도 다음 세대가 굳이 그 언어를 배울 의사가 없다면 그 언어도 사멸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유네스코(UNESCO)의 기준을 보아도 결국 소멸위기언어의 판단은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언어의 미래를 감히 함부로 재단해볼 수는 없겠지만, 저 기준에 따른다면 좋든 싫든 수많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배우고 있는 영어는 앞으로도 미래가 창창할 게 분명하지만, 반면에 더 이상 젊은 인구의 유입이 담보되지 않는 수많은 언어들은 그 미래가 불투명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에스페란토는 과연 어느 길로 가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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