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부여의 후예, 두막루

위클리 히스토리 2026. 3. 19. 09:36

723년, 두 사신단이 당나라를 방문하였다. 한쪽은 몽골의 선조로 추정되는 실위 계통의 달구(達姤)였고, 또 하나는 달말루(達末婁)라는 생소한 이름의 국가였다. 흥미로운 점은 특히 후자가 스스로를 “북부여의 후예”라고 소개했다는 것이었다. 옛날에 고구려가 북부여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유민들은 나하(那河, 타루하(他漏河))를 건너 그 북부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달구는 나하의 남쪽에 있어서 동북쪽에 위치한 달말루와 가깝게 지냈기에 이번에 함께 오게 된 것이었던 모양이다.

 

북부여의 공식적인 멸망 시점은 346년으로, 연나라(전연)를 세운 모용선비 세력에 의해 그 국왕과 5만 명이나 되는 국민이 끌려가는 것으로 부여의 역사는 곧 종결되었다. 부여의 수많은 후예들, 이를테면 북부여 외에도 가섭원의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심지어 백제의 또 다른 이름인 남부여까지 다양한 부여들이 있었지만, 그 시초는 곧 북부여였다. 달말루는 바로 자신들이 그 북부여의 후예라고 밝힌 것이다.

 

달말루는 두막루(豆莫婁)라고도 하고, 대막로나 대막루라는 비슷한 이름도 기록에는 남아 있다. 워낙에 단편적인 일부의 정보뿐이라 전체적인 모습을 오늘날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달말루(두막루) 사신단의 설명과는 달리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이 북부여의 이름을 빌린 실위 세력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특히나 <위서>라는 책에서는 두막루의 언어가 실위와 같다고 묘사하고 있어서 그러한 의심을 사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달말루와 달구의 사신단처럼 그들이 함께 외국을 방문하였을 때 자기들끼리 어느 한 쪽의 언어에 맞춰서 대화를 하였던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기록이 남은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공동으로 외교를 펼칠 정도로 가까웠다면 서로 다른 언어집단이라 하더라도 사신급이면 서로 상대방의 언어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었을까 싶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막루의 문화적 특성에 대한 설명이 과거 부여의 그것과 거의 빼다박듯이 닮아 있기에 아마도 그들이 주장하였듯 두막루는 북부여의 후예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하나 그 세부사항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두막루 부여
사람들은 정착해서 살며, 궁실과 창고가 있다. 좌동
산과 구릉 및 넓은 늪지가 많으며, 동이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다. 좌동
토양은 오곡에 적당하며, 단 다섯 과실은 나지 않는다. 좌동
사람들은 키와 몸집이 크며, 성격은 강인하고 용감하며 신중하고 중후하다. 그래서 노략질은 하지 않는다. 좌동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명하며, 읍락에는 우두머리(豪帥)가 있다. 좌동
(단, 부여는 호민(豪民), 두막루는 호수(豪帥))
먹고 마실 때는 제기(俎豆)를 사용한다. 좌동
삼베(麻布)가 있고, 의복은 고구려와 비슷하나 품이 크다. 삼베는 부여가 아닌 읍루에만 등장.
또 고구려와 부여는 의복 차이가 있었음
나라의 대인(大人)은 금은으로 옷을 장식을 한다. 좌동
형벌을 시행할 때는 엄하고 또 급하게 한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좌동
풍속은 음란하며, 부인이 심하게 질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만약 그러면 죽여서 주검을 도성의 남산 위에 두고 방치한다. 부인측 집에서 거둬가고자 하면 소와 말을 내놓아야 돌려준다.)
좌동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었다고 한다. 좌동

 

보다시피 일부 디테일의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 같은 정도인데, 그래도 작게나마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기에 오히려 그 차이만큼 두막루도 시대적 변화가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여하튼 그 공식적인 국명조차도 무엇인지 정확치 않을 만큼 두막루라는 나라에 대한 모든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점은 한계이다. 두막루, 대막로, 대막루, 달말루는 모두 같은 나라인가? 솔직히 정보의 부족으로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두막루와 달말루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예라고 하였으니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대막로와 대막루는 아예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 위치가 말갈과 실위 부근이었으니 이름과 지리적 특성을 감안하였을 때 그럴 공산이 크다 정도로 판단할 수는 있겠다. 한번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두막루를 직접 다루고 있는 가장 이른 사서는 <위서>인데, 그 책은 6세기 중반에 쓰여진 책으로 거의 동시대의 최신 역사를 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 말인즉슨 두막루는 최대한 늦게 잡아도 550년경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 이를 기점으로 삼아 다른 기록들과 비교해보자.

 

그 앞뒤로 485~486년경에 대막로(大莫盧)가, 567~569년에는 대막루(大莫婁)가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발음이 비슷한 이들 나라가 두막루가 아닐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긴 하다. 특히나 이때에는 같은 기록에서 실위, 말갈 등이 함께 등장하기에 지리적 위치도 이들과 비슷하다고 하였을 때 그럴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두막루일 확률이 높기도 하고 말이다. (달말루(두막루)와 달구(실위)가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어 온 것을 참고하자.)

 

이상이 맞다면 두막루는 485년경 이전에는 이미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두막루 스스로 자신들의 선조라고 부른 북부여가 모용선비에게 멸망당하였던 시점인 346년 이후 언젠가부터 고구려에 의해 쫓겨난 언젠가에 이르러 북부여의 원래 위치보다 더 위로 올라가 두막루를 세운 셈이 된다. 이를 추정해볼 수 있는 금석문 자료가 하나 있는데, 바로 모두루 묘지이다. 고국원왕 때 대형 염모(冉牟)가 북부여 지역에서 모용선비 세력과 다투었고, 또 광개토대왕 때 그 손자인 모두루(牟頭婁)가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라는 직책을 받게 되니, 그 사이 즈음에 고구려는 연나라로부터 북부여 지역 일대를 차지하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이 후연 세력을 공략하고 돌아온 것이 407년이라는 점을 참고해보자.

 

정리하자면, 두막루의 원 구성원들은 북부여 멸망 후 유민세력으로 남아 있다가 4세기 말이나 늦어도 5세기 초경 고구려가 북부여 지역을 확보하였던 그 무렵에는 더 북쪽으로 이주하여 북부여의 후예국가인 두막루를 건설하였고, 그 결과로서 6세기 중엽에는 중국측 역사서에 두막루 열전이 실리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들의 최후는 언제일까? 명확치는 않으나 가장 마지막으로 두막루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시점은 723년이므로 그 얼마 후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당시 상황을 한번 되짚어보자. 이 무렵 북방 영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이때는 바로 발해의 대외확장이 본격화되던 시점이었다. 제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는 발해 후방에 있던 흑수말갈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개설하자 이를 문제 삼으면서 흑수말갈 정벌을 추진하였는데, 동생 대문예(大門藝)가 이에 반발하면서 자칫 내전으로 번질 위기를 겪었다. 결국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을 떠났고, 이후 발해는 등주와 마도산을 공격하고 또 대문예 암살을 시도하는 등 강대강 전략으로 나가게 된다. 그와 동시에 발해는 배후에서는 점진적으로 동진과 북진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많은 말갈 세력들이 발해의 휘하로 끌려들어오게 된다.

 

두막루의 최후는 기록만으로는 전혀 알 길이 없지만, 이러한 국제분쟁의 여파와 시대적 흐름의 영향으로, 추정컨대 높은 확률로 발해에 의해 흡수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정확한 분석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주원류고>에서는 두막루가 최종적으로 발해로 병합되었다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가정이 맞다면 결국 북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 그리고 그 고구려의 후예가 되는 발해가 옛 북부여의 후신인 두막루를 통합함으로써 오랜 분열의 역사가 마감되는 역사적인 이벤트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만큼은 비극적인 엔딩이었겠지만 말이다.

 

 

# 참고자료 : 위서, 북사, 신당서, 만주원류고, 모두루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