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고조선과 부여, 같거나 다르거나

위클리 히스토리 2026. 3. 12. 12:02

 

고조선과 북부여 - 국토지리정보원 및 위키피디아

 

우리는 종종 배운 대로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그 배운 내용도 실은 누군가가 언젠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에 불과할 때도 있는데 말이다. 예컨대 4대 문명이란 개념이 원래 존재하지 않는데도 언젠가부터 그렇게 배워왔고, 또 혀의 미각은 사실은 우리가 배운 것처럼 맛별로 특정 영역에만 몰려 있지도 않다. 뿐인가, 한국어를 우랄알타이어로 많이들 들었겠지만 그것은 이미 폐기된 낡은 개념일 뿐인데도 여전히 그렇게 알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다. 마치 지구는 평평하다고 배운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역사에도 그러한 일들은 태반이다. 특히 상고사, 고대사에서는 그런 수많은 논쟁적인 아이템들이 있다. 오늘은 그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 한 가지를 해보고자 한다. 바로 고조선과 부여의 이야기이다.

 

흔히들 한민족의 역사를 단군왕검의 고조선부터 시작한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심지어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정하여 국가의 공식 휴일로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 10월 3일이 실제로 단군과 관련있는지도 의문이지만(게다가 원래는 양력도 아니고 음력이었다), 기원전 2333년으로 정해져 있는 단기(檀紀) 역시도 의문 투성이이다.

 

이의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삼국유사> 고조선 조에는 중국 요임금 즉위 50년 설(B.C.2284)과 경인(庚寅)년 설(B.C.2311) 두 가지가 모두 기재되어 있다. 정작 기원전 2333년은 또 아니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단군 기원설을 담고 있는 <제왕운기>는 요임금과 맞춘 듯이 무진(戊辰)년 설(B.C.2333)을 채택하고 있다. <고려사>도 마찬가지로 단군의 기원을 무진년으로 설정하였다.

 

여기에 더해 공민왕 때 활약하였던 문신 백문보(白文寶)는 단군의 기원을 그 당시와 연계하여 이렇게 계산한 적이 있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경과하여…

 

물론 정확히 1의 자리까지 맞춰서 계산한 것 같지는 않고 대략 3,600년이 지났다고 본 것인데, 이 당시로부터 역산해보면 기원전 2237년이나 2238년 정도 될 것이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말해서 단군의 시작 시점은 불분명하다가 답이다. 임의로 무진년 설을 택하여 기원전 2333년이라고 정한 것 뿐이다.

 

그만큼이나 불분명한 것이 또한 부여의 역사이다. 부여는 시조가 동명(東明)이라는 신화만 전해질 뿐 그외에는 초기 역사부터 역대 국왕들의 연혁 그 어느것 하나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진정 잃어버린 왕국은 어쩌면 부여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오늘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우리는 고조선이 한민족의 첫 국가였고 오랜 세월 후 멸망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국가들이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의외로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건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조선과의 상관관계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흥미로운 부분이다.

 

여기선 가장 이른 국가인 부여의 신화만 놓고 본다면, 북쪽 이민족(北夷)의 나라인 탁리국(橐離國, 혹은 고리(槀離), 색리(索離) 등)에서 동명이 남쪽으로 탈출하여 건국한 것이 부여였다고 한다. 동일한 설화가 고구려에도 나타나는데, 이는 시조 주몽이 부여 출신으로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남진하여 건국을 하였다보니 그 신화를 은근슬쩍 가져다 썼기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구려 건국 초기에 비류국(沸流國)을 병합하면서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로 명명하게 되는데, 이 ‘다물’이라는 말은 고구려어에서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부연설명이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할 수밖에 없는데, 민족주의적으로는 고조선의 옛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여 출신인 주몽이 언젠가 자신의 원래 출신지인 부여를 차지해야겠다는 의지를 담은 명명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여담이지만 비류국 역시 졸본부여(卒本夫餘)라는 이름의 또 다른 부여이기도 했다.

 

이처럼 부여가 더 북쪽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면, 그보다 좀 더 남쪽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고조선은 그럼 뭐가 되는 것일까? 두 신화의 공통점은 아무리 찾아보고자 하여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이다. 이 둘은 서로 전승 자체가 다르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고조선 집단은 고조선 나름의 신화가 있고, 부여는 부여 나름대로의 전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이 둘은 별개의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해준다. (혹여나 부여의 또 다른 시조로 알려져 있는 해모수(解慕漱)를 단군의 아들로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을 위해 부연설명하자면, 해모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단군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또한 이 둘의 지역기반을 비교해보면 생각보다 가깝지도 않음을 알 수가 있다.

 

  •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다. (중략) 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 삼국유사
  • 부여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玄菟)의 북쪽 1천 리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 삼국지, 후한서

 

여기까지만 봐서는 명확히 지리적 차이를 알기가 어려운데,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 소위 한사군이란 것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정도는 역사를 좀 배워본 이라면 대충 기억할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현도인데 그곳으로부터 1천 리(약 4백km) 가량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힌트가 된다. 학계에서는 대략 오늘날 농안(农安), 창춘(长春), 지린(吉林) 그 어딘가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안타깝게도 부여의 역사에서는 이러한 위치를 입증해줄 만한 유물이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다. 참고로 이보다 남쪽으로 4백 km 떨어진 곳이 현도였다는 것인데, 이 당시 현도는 원래 위치보다 북쪽으로 요동 지방, 즉 오늘날 랴오닝성(辽宁省) 즈음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더욱이 고구려 때이긴 하지만 영류왕 14년(631년)에 천리장성을 쌓았을 때 서남쪽 바다, 즉 발해로부터 동북쪽 부여성까지의 거리가 1천 리 남짓(4백km 이상)이었다는 기록을 참고하자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부여도 중심지가 옮겨졌던 전력이 있기에 마지막 부여성의 위치이긴 해도 초기 근거지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가 고조선은 <삼국유사>의 기사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여러 차례 그 중심지가 이동하였다는 정보도 더불어 알 수가 있다. 발굴된 낙랑 시기의 유물로 보았을 때에는 그 마지막 위치는 오늘날 평양 인근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에도 낙랑, 현도 등은 계속해서 그 위치가 바뀌어나갔기에 어느 한 곳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서 보자면 부여와 원래 고조선은 4백km가 아니라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봄이 옳다. 즉 이 둘이 과연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기에는 그 거리부터가 너무 멀다. 건국에 대한 전승부터 물리적 거리까지 모든 것이 고조선과 부여의 상관성을 강하게 증명해주지 못하는 셈이다.

 

더욱이 고조선의 멸망 당시 잔여세력은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결코 북쪽으로 부여의 땅까지 이동한 게 아니었다.

 

  •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準)이 궁인(宮人)과 주위 사람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심지어 이들 유민까지도 부여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다보니, 결론적으로는 어느 모로 보나 고조선과 부여는 별개의 기원을 가졌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서로 다른 전승이 가득한 나라들을 단 하나 고조선의 후예들로 만들게 된 것일까? 그 원죄(?)는 다름 아닌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저자 이승휴(李承休, 1224~1300)에게 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저서에 담았다.

 

시라(尸羅, 신라), 고례(高禮, 고려), 남옥저와 북옥저, 동부여와 북부여,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었다.

 

중세의 고려인 이승휴는 은퇴 후 스스로 오랜 배움의 결과물로서 다채로웠던 고대 시대의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물이 1287년에 완성한 <제왕운기>였다. 그에 비해 동시대인인 일연(一然, 1206~1289)은 동일하게 고조선의 역사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담기는 했어도 굳이 역사를 새롭게 재구조화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여러 전승들 중 하나로서 고조선의 역사기록을 책에 있는 그대로 담았을 뿐이다. 그럼 이 둘의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일까? 힌트는 그 둘의 저서 첫머리에 나오는 집필의 목적에 있다.

 

중국은 반고(盤古)로부터 금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東國)는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처음 일어나게 된 근원을 책에서 찾아보고서 같고 다른 것을 비교하여 핵심을 뽑아 문장을 지었습니다. - <제왕운기> 서문
제왕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일반인과는 다른 점이 있기에 큰 변화를 타고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런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하단 말인가. 이 기이(紀異)를 여러 편의 첫머리로 실은 것은 그 때문이다. - <삼국유사> 서문

 

<제왕운기>는 중국의 역사가 그 시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듯이 우리나라의 역사 역시도 그 시초부터 지금까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게 목적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고, <삼국유사>는 그런 거창한 목표보다는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 폄하받아 공식적인 역사에서 제외되었던 옛 기록들을 오늘날 되살리겠다는 데에 방점을 두고 있다. 즉 두 책은 똑같이 단군과 고조선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지향점이 미묘하게 달랐기에 서술 방식도 결국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통은 그 이전까지 등장하지 않던 고조선을 이들이 다룬 이유를 고려 후기 몽골 제국 아래에서 고초를 겪던 고려인들의 민족정신 부흥을 위한 노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후대인들의 관점에 따른 해석일 따름이다. 둘 다 비슷하게 1280년대에 출간되었는데, 이 무렵인 충렬왕 혹은 전임자인 원종의 재위 기간이 고려가 몽골 지배기로 넘어가던 혼란의 시대였던 것은 사실이긴 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몽골의 침략이 그 이전보다 더욱 거세졌다거나 재정 침탈이 훨씬 심해졌다거나 하는 것은 또 사실 아니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직접적으로 온갖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민중의 삶은 안정을 되찾은 측면도 컸다. 오늘날 주식시장으로 비유해보자면 소위 불확실성보다는 차라리 예측 가능한 리스크가 낫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조금 더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이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이러한 역사서들이 나왔다고 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사회적 혼란으로 치자면 그 얼마 전까지 무려 1백 년 동안이나 견뎌내야 했던 무도한 무신정권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싶기도 하다. 몽골의 침입으로 민족주의 의식이 솟아났다면 무신정변으로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계급론이라도 탄생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승휴의 다음 언급처럼 그의 집필 의도는 오랜 배움의 결과물이지 어떤 장대한 계획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제왕운기>를 편수한 것은 부족한 제가 유교 경전과 옛 서적들을 읽으며 거칠게나마 얻은 깨달음을 반딧불처럼 희미한 빛으로 햇빛과 달빛의 밝음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현대적인 민족주의를 내려놓고 보면, 원래도 이승휴는 과거에 급제한 관료이자 학자에 문인이었다. 그런 그가 은퇴 후 한 일은 글을 읽고 책을 쓰며 인생 후반기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본인 말마따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한번 그 생각대로 중국의 역사처럼 우리나라의 역사도 비슷하게 정리해본 것이 곧 <제왕운기>였다. 즉 지금의 중국에 금나라가 들어서기 전에 송나라와 요나라가 있었고, 그 전엔 당나라, 또 전엔 수나라, 그런 식으로 계속 올라가다보면 결국 삼황오제(三皇五帝)까지 이어진다는 게 <제왕운기> 상권의 흐름이다. 이처럼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그 시원에 다다른다는 깨달음이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까지 정리해보게 된 계기였고 말이다. 그렇게 동일하게 우리나라의 역사도 고려부터 순차적으로 과거를 거슬러 나가다보니 다다르게 된 것이 단군왕검과 고조선이었다는 게 곧 <제왕운기> 하권의 내용이다.

 

어떤 목적성을 걷어내고 보면 오히려 그 실체가 훨씬 더 명확히 드러나 보일 때가 있다. 이것은 이럴 것이라는 나의 관점을 들어내고 봐야지만 그것의 진면목이 더 잘 보일 수가 있다. 기존에 배웠던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바라봐야지만 그간 보이지 않던 것이 순간 더 잘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전적인 제단이나 기존에 배워 익힌 지식이 오히려 고정관념으로 작동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도 언제든 있기 마련이다. 앞서 배운 모든 것이 결코 항상 진리일 수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가끔은 굳이 어떤 의도나 생각 없이 바라봐야 비로소 보일 때도 있는 법이다.

 

자, 정리해보자. 고조선과 부여는 과연 같은 출자를 공유하고 있을까? 실제로는 서로 별개였을 공산이 크다는 쪽에 한 표를 던진다.

 

 

# 참고자료 : 제왕운기, 삼국유사,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