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히스토리

탐라국, 초기 교류의 역사

위클리 히스토리 2026. 3. 3. 14:35

역사는 언제나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특히나 기록이 풍부하지 못한 초기의 상황은 흐릿한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나가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오늘날 제주라고 불리는 탐라국의 초기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3세기 중반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담고 있는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주호(州胡)가 마한(馬韓)의 서해(西海) 가운데(中)의 큰 섬(大島)에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서해라는 표현 하나 때문에 주호가 과연 지금의 제주를 가리키는 것이 맞는지 여전히 의문을 사고 있다. 그 다음으로 탐라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의 백제와 관련된 기록에서이다.

 

(476년 4월) 탐라국(耽羅國)에서 토산물을 바치니 백제 문주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恩率, 3등급)로 삼았다.
(498년 8월) 백제 동성왕이 탐라(耽羅)가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직접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 전라남도 광주)에 이르니,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중지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다음이다. <일본서기>는 탐라의 백제 통교 시점을 이와는 다른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508년 12월) 남해(南海)에 있는(中) 탐라인(耽羅人)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

 

물론 <일본서기> 자체가 워낙에 온갖 허황된 내용부터 실제 사건의 시점 오류까지 부정확 정보가 한가득이긴 하지만, 때로는 기록이 부실한 <삼국사기>에서 놓치고 있는 당대의 고급 정보들을 상당수 담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이 탐라와 백제의 통교 기록은 위치상 남해(南海)로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측의 기록이 활용된 것이 분명하기에 특히나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의 세 가지 종류의  백제 사서가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자료의 존재는 <일본서기>의 찬자가 모든 것을 창작한 것이 아니며, 군데군데 백제측의 당대 자료가 그대로 활용되었음을 증명해준다. 일일이 출전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탐라의 기록 또한 백제인의 기록에 기반하고 있음을 이로써 추정해볼 수가 있다.

 

즉 508년의 통교 기사는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476년과 특히 498년의 기록은 무엇일까? 전자의 경우는 아마도 1회성 조공(朝貢) 무역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렇기에 드문드문 찾아오는 탐라측의 태도에 백제에서는 정벌까지 추진하였던 모양인데, 탐라도 자칫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저자세로 백제 달래기에 나섰던 것이리라. 다만 이후에도 정례화까지는 되지 않은 채 비정기적인 교류가 이어지다가, 공식적으로 백제와 탐라간 상하 관계를 맺은 것이 508년의 기사로 남은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이 역시도 완벽하게 백제의 속국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 시간이 흘러서도 탐라는 여전히 국가(國)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589년) 수나라 전함 한 척이 탐모라국(耽牟羅國)에 표류하여 왔다. 그 배가 돌아가려고 백제의 경계를 지나니, 위덕왕이 물건을 매우 후하게 주고 아울러 사신을 보내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좀 더 후대의 신라측 기록이긴 하나, 탐라국이 백제와 좀 더 긴밀한 관계로 나아가는 그 시점을 7세기로 알려주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662년 2월) 탐라국주(躭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 혹은 津)이 와서 항복하였다. 탐라는 무덕(武徳, 618~626) 연간 이래로 백제에 신속(臣屬)해 왔기 때문에 좌평(佐平)을 관직 호칭으로 썼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해서 속국이 되었다.

 

탐라가 이때도 신라에 완전히 항복한 것은 아니었기에 속국이 되었다는 말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지만, 최소한 탐라가 7세기 초에 좌평(佐平)이라는 백제 16관등 등 1등급이 된 것은 확인할 수가 있다. 앞서 처음 탐라가 백제와 교류를 시도하였던 시기에 은솔(恩率)이라는 3등급 관등을 받았던 것을 참고하자면, 그럼 그 중간의 508년의 정식 통교 당시에는 2등급 달솔(達率)을 받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탐라가 국가 체제를 완전히 버리고 백제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한 것은 또 아니었다. 탐라는 이후에도 어느 한 나라에 종속된 적은 없었다. 백제와 교류를 시작한 이래 오랫동안 백제를 중심으로 외교를 진행해온 것은 맞으나, 660년 백제 멸망 직후에는 신라 외에도 왜국, 당나라와도 새롭게 통교를 추진하였다.

 

(661년 5월 23일) 탐라(耽羅)가 처음으로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 일본서기(왜국)
(661년 8월) 탐라국왕(耽羅國王)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 내조하여 조공을 바쳤다. - 책부원귀(당나라)

 

실제로 탐라는 백제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인 왜국과 한동안 꽤 밀접하게 지내긴 하였지만, 오랜 고민 끝에 결론적으로는 <신당서>의 기록처럼 삼한통일을 이룬 신라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걸어보는 쪽으로 길을 정하였다. 이후의 미래는 우리도 알다시피 신라가 쇠락하고 후삼국시대가 열렸다가 고려가 최종 통일을 이룸으로써, 탐라 역시 고려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탐라가 과연 처음부터 오늘날 제주도라는 섬에만 존재했을까 하는 점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는 곧 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탐라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 자리에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가만히만 있었을 리는 만무할 테니까 말이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탐라의 성씨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후기에 있었던 대규모의 외부 이주를 제외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제주 중심지 성씨 : 고(高), 양(良/梁), 부(夫), 문(文)
제주의 지방 성씨 : 정(鄭), 김(金), 이(李), 문(文), 안(安), 현(玄), 함(咸), 양(楊)
외부로부터 이주해온 성씨 : 김(金), 이(李), 박(朴), 임(林), 유(兪), 주(周), 조(趙), 송(宋), 정(鄭), 홍(洪), 서(徐), 최(崔), 오(吳), 차(車), 지(池), 한(韓), 마(馬)

 

즉 제주 고유의 성씨와 외부 이주 성씨를 구분하고 있는데, 후자는 물론 고려 내지 조선까지의 제주도 이주 집단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하나 기록으로 전해지는데, 고, 양, 부의 제주 3대 성씨와 함께 있는 문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원래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인데, 일찍이 탐라로 이주해와서 고씨 집안의 사위가 되어 나중에 왕자(王子) 집단을 이끌게 되는 독특한 역사가 있다. 참고로 보성은 탐진의 동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들의 존재가 상징적으로 말해주듯이 탐라와 육지간의 인적 교류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당연히 그 빈도도 꽤 잦았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탐라의 신화에서도 세 명의 신인(神人)은 땅에서 솟아나왔지만, 동시에 그들의 배우자는 동쪽의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혹 탐라인들은 육지에도 일종의 직할령을 가지지는 않았었을까 하는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보자. 즉 가설로서의 탐라의 내륙 영토설이다. 마치 삼국 초기 왜(倭)가 한반도 남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것에 착안하여 왜인들이 일부 육상에서도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과도 비슷할 듯하다. 가야 일대인 변진의 그 이름조차도 일본어스러운 미오야마(彌烏邪馬)국이 <삼국지>에 실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한 것이, 일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소시모리(曾尸茂梨)라는 장소 또한 그 발음부터가 한국어스럽기에 자연스럽게 한반도 남부로부터 기인하였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주장도 있다. (여하튼 소위 왜국의 한반도 남부 점령을 상징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니 오해 없기 바란다.)

 

마찬가지로 탐라는 혹 한반도 남부에 자신들의 영토를 가지는 것이 과연 불가능했을까? 이를 입증하기는 상당히 까다롭긴 하지만 검토 정도는 한번 해볼 수 있을 듯하다.

 

우선 탐라(躭羅)에 매칭되는 바다 건너 육지의 지역 이름은 탐진(耽津)이었다. <고려사>는 이를 오인하여 탐라가 탐진에서 그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보았지만, 실은 거꾸로 탐진이 탐라에서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도 역사적으로 탐라라는 명칭이 훨씬 더 오래된 것이 맞기도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아예 탐진은 신라의 삼한통일 후 경덕왕 때(757년) 지어진 이름이라고 못박아두고 있다.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탐라와 육지간 교통로 -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이곳 탐진의 백제 시절 이름이 동음현(冬音縣)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백제 멸망 직후인 662년 신라에 귀부하겠다고 하였던 탐라국주의 이름이 바로 도동음률(徒冬音律)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도동음률의 마지막 글자를 모양이 비슷한 진(津, 나루터)으로 기록한 것도 있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그렇다면 (도)동음진(冬音津)이 되는 셈인데, 바로 백제의 지역명인 동음현과 같은 뜻이 된다.

 

즉 이렇게 되면 해석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이를테면 662년에 “탐라국주 좌평 무리가 동음진에 와서 항복하였다(耽羅國主佐平徒冬音津來降)”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탐라의 신화 속에서도 신라 전성기 때 성주(星主) 가문의 시작인 고후(高厚), 고청(高靑) 등 삼형제가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 곧 백제 동음현)에 와서 신라에 내조하였다고 전한다. 마치 역사 속 탐라국주 좌평과 신화 속 고후, 고청이 동일인물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다만 이 당시 탐라의 국왕은 유리도라(儒李都羅)로, <당회요>에서 성이 유리에 이름이 도라라고 명확히 하고 있기에 신화 속 인물인 고후 자신은 국왕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참고로 탐라 역사 초기에는 양씨 집단이 좀 더 우위에서 지배층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들의 시조는 양을나(良乙那)였는데, 나중에 첫 글자만 떼어서 성씨로 삼게 되지만 그 이전까지는 양을이 구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의 중국식 발음은 ‘량이(Liángyǐ)’로, 탐라국왕의 성씨인 유리의 중국식 발음인 ‘룰리(Rúlǐ)’와 성조까지도 비슷하다. 아마도 당나라에서 탐라 사신의 발음을 듣고 글자로 기록하면서 자신들 귀에 들리는 대로 적으면서 발생한 차이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에 국왕(國王)과 국주(國主)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역사 기록은 그럼 어떻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역사에서는 이 둘을 동일인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한데, 한편 달리 생각해보면 탐라국에 성주와 왕자가 별개의 직책이었던 것을 고려해보았을 때 각기 다른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예컨대 국주는 성주(星主), 국왕은 왕자(王子)로 구분해서 본다면 고후와 같은 고씨가 성주를, 유리 내지 양(량)씨가 왕자 가문을 담당하여 각자가 탐라를 대변하여 각국에 대표로 외교를 진행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더 후대이긴 하나, 후삼국 통일 직후에 고려와 외교를 튼 인물만 해도 성주 고자견(高自堅)과 왕자 양차미(梁且美)로 각기 별도의 세력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참고로 각종 자료에서 초기 탐라의 3대 성씨가 양-고-부의 순서로 나타나다가 후대가 되면 고-양-부의 순서로 바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화의 내용대로 신라로의 길을 정한 고씨가 결국 이후 탐라 내의 주류 세력으로 거듭나면서 그렇게 우선순위도 변화를 맞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싶다.

 

여하튼 백제 멸망 후 신라와 교류를 트기 위해 탐라의 고위층이 직접 방문한 곳도 동음현, 즉 탐진이었던 것도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동음(冬音)이라는 지역명 자체도 사실은 탐라에서 유래한 것이었을 공산이 크다. 백제어가 고구려어와 마찬가지로 같은 부여 계통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니, 실제로 동음이 어떻게 이 당시에 한반도에서 사용되는지를 <삼국사기>에서 한번 살펴보자.

 

고군(皐郡) : 고구려의 동음홀군(冬音忽郡), 고려시대의 염주(州)
동음홀(冬音忽) : 시염성(豉城)이라고도 한다.

 

이를 보면 동음은 곧 바다(海)라는 뜻을 지녔던 것 같다. 이는 별칭으로 소금(鹽)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그렇다면 혹 동음현 내지 동음진은 바다의 고을, 바다 나루터라는 뜻이 되어 탐진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탐라를 가리키는 지역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동(冬)은 같은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ㅎ’ 발음으로도 났던 것을 보면 '탐라'라는 이름과 실질에 대응되는 비슷한 백제어로서 채택된 것으로 봐도 크게 틀림이 없을 듯하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부터는 상상이기는 하나, 탐라와 육지간에 인적 교류가 그토록 빈번하였다면 한편으로는 그 육지의 일정 부분은 탐라가 실질적으로 차지하고 활용하였을 가능성은 과연 없을까? 마치 당나라 동부에 존재하였던 신라방(新羅坊)과 같은 신라인 자치구역처럼 말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위치는 아마도 탐진이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미 백제 때부터 탐라와의 교류를 위한 장소로 여겨졌던 바로 동음현, 백제도 탐라의 존재를 상정하고 지역명을 그렇게 지었듯이 탐라인들은 이곳을 자주 왕래하였고, 마찬가지로 육지인들도 특산물 교역을 위해 이곳을 통해 탐라를 들락날락하였었다. 아마도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이곳에는 아예 탐라인들을 위한 상시 혹은 비상시 거주공간이 있었을 공산이 크며, 조금만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어느 정도는 자치권을 가지고 운영까지 할 수 있는 그만한 영토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턱없이 부족한 자료와 또 불확실한 정보 속에서 작은 실마리 하나하나를 매만져가며 역사의 실체를 찾아나가는 과정은 매번 고통스러우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역시 역사는 언제나 미스터리로 가득하다.

 

 

# 참고자료 : 삼국사기, 일본서기, 삼국지, 책부원귀, 당회요,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